소설리스트

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106화 (106/346)

106화

덕분에 정신이 확 들었다. 휴가는 아직 절반 이상 남았지만, 휴식 시간은 이제 끝났다. 생각해 보니 내가 이렇게 맘 편히 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데뷔를 앞두고 준비할 게 많았다.

우선 앞으로 발생할 일들에 대한 정리가 필요했다. 투마월 시즌 2에 대한 정보만 준비하면 됐던 지난 서바이벌 기간과는 차원이 달랐다. 적어도 내가 회귀하기 전인 4년 후까지의 기억들을 시기별로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그에 앞서 상태창에 대한 정비가 우선이었다. 사실 파이널이 끝나고 가장 놀랐던 점은 바로 상태창의 존재였다. 리얼리티 촬영까지 하느라 정신없어서 몰랐는데, 정신차려 보니 상태창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것 아닌가.

회귀하고 그동안 이 상태창에 대해서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어디서 나타난 건지, 과연 언제까지 나타날 건지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봤다. 그 결과 내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1. 상태창은 내가 회귀하면서 처음 등장했다.

2. 내가 회귀를 한 목적은 (아마도) 지운이 형과의 데뷔이다.

3. 회귀의 목적이 달성된 순간 상태창도 사라질 거다.

삼단논법인 듯 아닌 듯했지만, 꽤나 그럴싸한 가정이었다. 갑자기 회귀를 하게 되면서 상태창이 등장했으니 얘가 사라지는 것도 회귀한 이유와 관련되지 않을까? 그래서 처음 예상했던 상태창의 소멸 시기가 바로 서바이벌의 파이널 무대였다.

지운이 형과 나의 데뷔가 모두 확정 난 그 순간, 상태창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지막에 데뷔조 멤버들 머리 위로 하트가 만발하는 게 상태창의 마지막 인사라고 혼자 생각했던 거 같다.

[이름: 문승빈]

외모: A-

끼: B

보컬: A

댄스: B-

프로듀싱: C+

그런데 멀쩡하게 다시 나타난 상태창은 심지어 그사이에 끼가 한 단계 올라가 있었다. 파이널 무대를 하면서 처음 겪어 보는 대형 공연장과 수많은 관객들 앞에서의 무대가 영향을 준 것 같았다.

예상치 못한 상태창의 재등장은 존재만으로도 내게 안정감을 주었다. 사실 둘도 없는 치트키 아닌가. 나 자신의 능력치는 물론이고, 타인의 능력까지 확인할 수 있다니. 아이돌에 한해서만 능력치가 발휘된다는 게 아쉬울 정도로 유용한 기능들이었다.

그래서 몇 가지 가설을 더 세워 봤다.

‘회귀의 목적이 형과의 데뷔라면 실제 데뷔를 하는 것까지가 미션 달성인 것 아닐까.’

사실 데뷔의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데뷔 앨범이 나왔을 때, 데뷔 쇼케이스를 진행할 때, 아니면 실제로 음악 방송에서 첫 데뷔 무대를 가질 때.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따라 데뷔의 시점이 달라질 수가 있는 거였다. 그렇기에 내가 생각한 마지막은 바로 음악 방송 데뷔 무대였다. 데뷔 무대까지 방송되고 나면 정말 확실하게 데뷔가 확정되는 거니까.

‘그럼 그때까지 최대한 상태창을 활용해야지.’

우선 남은 포인트를 확인해 봤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잔여 포인트가 남아 있지 않았다. 파이널 무대를 준비하면서도 사실 한 번 타임 어택 미션이 떴었다. 심지어 미션 자체는 어렵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때 갑작스러운 컨디션 난조로 인해 병원을 다녀오느라 시간이 지나면서 성공을 못 했다. 파이널 전에 하나라도 더 스텟을 올리고 싶었는데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른다.

파이널이면 상태창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기에 마지막 합숙 전에 남아 있는 잔여 포인트를 전부 사용하기도 했다. 앞으로도 이 상태창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니 포인트가 생기는 대로 바로 사용해야 할 것 같았다.

다음으로 할 것은 바로 앞으로 4년간의 기억 정리였다. 사실 혼자 생각할 때마다 웃기는 부분이다. 이걸 지난 4년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앞으로의 4년이라고 해야 할지.

기록하기 위해 핸드폰 메모 어플을 하나 새로 구매했다. 누가 볼지 모르는 노트 같은 곳에는 적을 수가 없는 내용이기에, 몇 번에 걸쳐 보안 장치를 걸 수 있는 비밀 메모 어플을 고르고 또 골랐다.

[20XX년]

가장 먼저 연도별로 폴더를 나누고 그다음에는 또 분기별로 세부 폴더를 만들었다. 정확한 달까지는 기억을 못 하더라도 대략 어느 시기인지 정도는 구별할 수 있도록 정한 기준이었다.

제일 먼저 기존 데뷔 그룹인 ‘투샤인’에 관련된 것들부터 기록했다. 아마 ‘크리드’는 투샤인과 또 많은 부분이 달라지긴 하겠지만 일단은 혹시 모르는 거니까.

‘데뷔 앨범 콘셉이 어땠더라.’

‘얘네가 대상을 탔던가?’

‘재계약은 안 했던 거 같은데-’

특히 기존에도 데뷔조였던 윤빈, 정유현, 박선우에 대한 기억들을 최대한 끌어모았다.

‘윤빈이 다쳤던 거 같은데, 그게 언제쯤이었지?’

‘정유현 부모님 관련된 것도 똑같이 터지려나?’

‘선우 형은 별다른 문제는 없었던 거 같고.’

투샤인은 높은 인기 때문인지 데뷔 초부터 온갖 사건 사고가 많았던 그룹이었다. 앞으로 크리드를 위해서도, 멤버 개인을 위해서도 위험한 일은 최대한 막아야만 했다. 모든 미래를 바꿀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모든 걸 다 해 볼 거니까. 형과 함께 데뷔했으니 이 소중한 그룹을 가장 높은 곳까지 오르게 하고 말 테다.

그러고는 VM 엔터테인먼트에 관해서도 정리했다. 원래의 과거에서는 내가 데뷔조에서 탈락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도현과 김병대가 같은 팀으로 데뷔했다. 대형 기획사라는 후광을 업고 매 앨범 기록을 갱신했지. 강도현과는 어색한 관계를 유지하다 결국 연락이 끊겼다. 망돌이라 시간이 남아돌던 나와 달리 강도현은 아주 바빠졌거든. 같은 목표를 가지고 달렸기에, 그걸 얻어 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더 이상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란 꿈같은 얘기였다.

한 끗 차이로 내가 얻지 못한 그들의 성공을 지켜보며 괴로워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지만 이제는 괜찮았다. 더 이상 끔찍한 과거를, 아니 미래를 반복하지는 않을 테다.

강도현만 크리드로 데뷔하게 되면서 VM의 기존 플랜도 많이 뒤바뀌겠지만, 아마도 시기상 머지않아 남자 아이돌이 데뷔하긴 할 거 같았다. VM 대표 남자 아이돌인 루커스도 벌써 4년 차 아이돌이었으니까 계속 미루긴 쉽지 않을 거였다.

‘일단 데뷔시키고 중간에 강도현을 합류시키려나.’

다음으로는 유명 남자 아이돌 그룹들의 컴백 시기를 정리했다. 과연 내가 앨범 일정에 얼마나 관여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메가 히트를 친 곡들은 피해 갈 필요가 있단 말이지. 그밖에도 연예계 주요 이슈부터 사회, 정치 면까지 기억나는 모든 것들을 적었다.

‘언제 어떤 정보를 활용할지 모른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말 중 하나가 ‘유비무환’인데, 뭐든지 준비해서 나쁠 건 없다는 뜻이다. 근데 별걸 다 기록하고 있으니 문득 우울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로또 번호라도 하나 외워 둘걸.’

* * *

휴가를 마치고 오랜만에 맞이한 숙소의 아침. 7명의 서로 다른 취향을 반영한 듯, 식탁 위에는 각기 다른 7개의 시리얼이 놓여 있었다. 그중 호랑이 그림이 그려진 시리얼을 먹던 박재봉이 결심했다는 듯 폭탄선언을 했다.

“저, 이름 바꿀 거예요.”

“응?”

“엥?”

모두 입에 있는 밥을 다 씹지도 못하고 눈으로만 외쳤다.

‘넌 무슨 개명 얘기를 아침 먹으면서 하니……?’

“갑자기?”

윤빈 형의 말에 박재봉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팔짱까지 끼고 꽤나 진지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갑자기가 아니에요. 데뷔하면 무조건 예명으로 활동하고 싶다고 전부터 생각했어요.”

“아, 완전히 개명한다는 게 아니구나.”

“왜? 지금 이름이 별로야?”

“영어 이름으로 하고 싶어요.”

“뭐?”

대낮부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선우 형이 호들갑을 떨며 물었다.

“아니, 재봉이라는 이름 두고 왜?”

“저도 멋진 이름으로 활동하고 싶어요!”

“재봉이가 뭐 어때서!”

지운이 형도 내심 아쉬운 듯 말했다.

“그러게. 봉봉이라고 귀여운 별명도 있잖아.”

“그래도… 뭔가 촌스럽잖아요.”

시리얼에 우유를 붓던 정유현이 물었다.

“골라 둔 이름 있어?”

“맞아. 뭐, 작명소라도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다 생각해 뒀죠! 알렉산더, 세바스찬, 피닉스…….”

‘역시 팀명으로 울트라 제안했던 건 콘셉이 아니었구나.’

팀명으로 울트라를 제안했을 때, 일부지만 박재봉이 어리바리해 보이기 위해 콘셉충 짓을 한다며 여론 몰이를 하는 무리도 있었다. 하지만… 저 아이는 그저 자신이 멋있다고 생각하는 것의 기준이 독특할 뿐이었다.

마치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듯 끊임없이 예명 후보를 나열하는 모습을 보며 선우 형과 강도현은 자꾸 웃음이 삐져나오는 듯 그릇에 코를 박고 있었다. 윤빈 형만이 특유의 여유로운 바이브와 리액션으로 박재봉의 기를 살려 주고 있었다.

“와, 멋진 이름들인데?”

“그쵸!”

“어떤 이름으로 해도 잘 어울릴 거 같은데?”

지운이 형도 적극적인 반응은 아니었지만 진지하게 듣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조용히 듣고만 있던 정유현이 말했다.

“그래도 이미지에 어울리는 이름으로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들떠 있던 박재봉이 처음으로 조용해졌다. 하지만 나도 정유현의 의견에 백번 공감하는 바였다. 이미지에 안 맞는 이름은 팬들도 낯설어할 게 분명했다. 게다가 이미 ‘박재봉’이라는 이름이 너무 잘 알려진 상황에서 익숙하지 않은 이름으로 바꾸는 건 사실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기도 했다.

“그런가요.”

“하하, 그래도 피닉스는 조금 잘 어울리지-”

“않아.”

어깨가 축 처진 박재봉이 안타까운 듯 강도현이 나름대로 수습을 하려 했지만 정유현은 단호했다.

“아, 넵.”

뾰로통하던 박재봉이 한참을 말없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형 말이 맞아요. 그냥 제 이름 쓸게요…….”

“아니? 너 예명 써도 돼.”

“네?”

“다들 다음 주까지 재봉이한테 어울릴 법한 이름 생각해 오자.”

정유현이 던진 뜻밖의 미션에 모두들 일시 정지 됐다.

풍덩-

“아!”

“…헐, 미안.”

선우 형은 손에 쥐고 있던 숟가락을 놓쳤고, 옆에 있던 강도현이 봉변을 당했다. 조금 신경질적으로 옷을 닦던 강도현이 물었다.

“예명을 왜 우리가 생각해요?”

“우리 막내가 예명으로 활동하고 싶다고 하잖아.”

“그럼 자기가 정하면 되잖아요.”

“넌 방금 듣고도 그런 말이 나오니.”

박재봉이 생각한 이름을 떠올리는 듯 잠시 멈췄던 강도현이 곧 수긍했다. 그 사이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던 박재봉과 내가 동시에 말했다.

“…죄송합니다.”

“원하는 느낌이 있어? 이름 말이야.”

시무룩한 것도 잠시, 내 질문에 박재봉은 길게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멋있으면 다 좋아요!”

‘맞다, 잊고 있었는데 얘 아직 열여섯 살이지.’

웬일로 선우 형이 먼저 손을 들었다. 다들 의외라는 듯했지만, 곧 그럼 그렇지- 기대를 접었다.

“해피 어때? 소개할 때 ‘여러분에게 행복을 드려요, 해피입니다!’ 이러는 거지.”

“와, 진짜 강아지 이름 같다.”

“어떻게 알았어? 내 친구 강아지 이름인데.”

“아, 형!”

“왜에-”

“자기 이름 아니라고 완전!”

아직까지 다들 100%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거 같지는 않다. 또 저러다 얼마 지나면 그냥 본명으로 활동하겠거니 하는 마음이 아마 가장 컸을 거다.

“아무튼 다들 성심성의껏 고민해 보고, 1시간 후에 인터뷰 스케줄 있어서 매니저 형 오신다고 하니까 준비하고 있어.”

“넵.”

역시 리더는 정유현이 해야겠다. 이미 모두들 익숙하게 정유현의 통솔하에 움직이고 있었다.

“아, 다 눅눅해졌네!”

강도현의 말에 그릇을 내려다보니, 거의 죽이 되어 가고 있었다. 어이없게도 지운이 형과 정유현은 중간중간 먹으면서 들었는지 비워져 있었고, 윤빈 형은 아랑곳 않고 시리얼을 흡입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와 강도현, 선우 형의 시리얼만 죽이 된 것이다.

‘이상하게 뭔가 진 느낌인데?’

결국 셋만 죽상이 되어서 시리얼을 처리했다. 먹은 음식은 각자 설거지하는 것, 그게 바로 우리 숙소 규칙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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