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진짜 강도현답다.”
미동도 없던 정유현은 보란 듯이 지우개를 들고 항목을 지웠다.
“아, 왜 지워요!?”
“규칙은 지키라고 있는 거야.”
“깨라고 있는 거죠.”
둘 다 웃고 있지만 묘한 긴장감이 오갔다. 앞으로 크고 작은 일로 꽤 부딪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하… 더 좋은 규칙이 있지 않을까? 그리고 아예 규칙 없이 지내는 거 말고 한두 개 정도는 풀어 주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아.”
윤빈 형의 중재에 정유현은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규칙 중 2개만 안 하는 걸로.”
“좋아요.”
방금 전까지 으르렁거리던 사람들이 맞나 싶었다. 숙소 생활에서 자기 의견만 강하게 밀고 나가다가는 파멸이라는 걸 둘 다 어느 정도 아는 거겠지. 이런 거 보면 참 다르면서도 비슷하단 날이야.
그 뒤는 다들 눈치껏 허무맹랑한 규칙은 내지 않았다. 선우 형까지 모든 규칙이 다 정해지고 박재봉이 슬레이트를 치며 멘트를 했다.
“잘 살아 봅시다!”
이후에도 촬영은 계속됐다. 야식도 내기로 정했는데 점심마저도 게임으로 정했다.
“저희가 아침에 여러분한테 메뉴를 받았잖아요. 지금 음식이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와!”
“안 그래도 배고팠는데!”
“하지만!”
‘내 이럴 줄 알았다. 쉽게 줄 씨넷이 아니지.’
“하지만?”
“아-”
“게임을 성공해야 먹을 수 있습니다! 실패할 때마다 메뉴가 하나씩 사라지게 됩니다.”
“네?”
“너무해…….”
첫 번째 게임은 초성 게임이었다.
[ㄷㅊ]
‘ㄷㅊ? 뭐 이렇게 어려운 조합을…….’
“도착!”
“대추!”
“대충!”
순조롭게 진행되다가 윤빈 형의 차례가 왔다. 모두 긴장하며 윤빈 형을 지켜봤다.
“…대출!”
“어!”
“대박!”
“성공 아니야?”
“성공!”
“우와아!!”
“형 최고예요!”
뜻밖의 고급 어휘 사용에 모두 놀랐다. 제작진들도 예상치 못한 듯했다.
“형이 나보다 한국어 잘할 거 같아요.”
“드라마 보면서 공부한 보람이 있네.”
‘대체 무슨 드라마를 봐야 대출이라는 단어를 배우지?’
윤빈 형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처음으로 지킨 메뉴는 박재봉의 강력한 요청으로 정한 마라탕이었다. 야식으로 못 먹은 걸 이렇게 먹는구나.
“다음 게임은 인물 맞추기입니다!”
“나 이거 진짜 못하는데…….”
지운이 형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나는 넌지시 말했다.
“형이 제 다음에 해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래? 알았어.”
아이돌 활동하면 한 번씩은 하게 되는 게임이라서 자신 있었다. 그런데 지운이 형 걱정은 괜한 걱정이었다. 왜냐? 내 순서가 오기도 전에 끝나 버렸으니까.
“윤승철! 배우님…….”
“아인슈타인 선배님!”
“선배님?”
그리고 정유현의 차례가 왔고 모두들 경악했다.
“…펭귄?”
“헐…….”
“진심이야?”
“어머…….”
오죽하면 스태프 쪽에서도 탄식이 나왔다. 노는 게 제일 좋다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모르다니. 제아무리 얌전한 유년 시절을 보냈을 거라 예상되는 정유현이라고 한들 이걸 모를 줄이야.
“형, 간첩 아니야?”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너무 충격이다…….”
말없이 눈알만 굴리던 정유현이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시킨 거 뺄게.”
두 번 정도 같은 게임을 했는데, 그때마다 정유현의 순서에서 끝이 났다. 정유현은 억울한 듯 외쳤다.
“왜, 저만 사람이 아닌 걸!”
“아니, 이 정도면 형 어렸을 때 한국 안 살았던 거 아니야?”
“티브이를 아예 안 보고 살았다고 해도 믿겠어.”
유난히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 캐릭터에 약했다. 어렸을 때 진짜 공부만 했나?
아직 마라탕밖에 확보를 못 했는데 남은 메뉴가 고작 3개였다. 각자 1인분만 주문해서 일곱 명이 4인분을 먹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
“하하, 관리하고 좋네.”
윤빈 형이 애써 웃으며 말했다. 모두들 입은 웃지만 눈은 웃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은 음악 맞추기입니다! 1초 정도 듣고 어떤 노래인지 맞추면 됩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릴레이로 하는 게 아니라 누구라도 맞추기만 하면 됐다.
“정답!”
그리고 박재봉이 아주 날아다녔다. 모르는 곡이 없었다. 하다못해 자기가 태어나기 훨씬 전의 아이돌 노래도 다 알고 있었다. 열여섯 살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아니, 재봉 군 열여섯 아니에요?”
“하하, 이 정도는 기본이죠!”
박재봉의 활약으로 나머지 음식은 모두 지킬 수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순식간에 음식은 동이 났고, 채워지지 않는 배에 아쉬워하던 참에 투마월에서 함께했던 작가님들이 간식을 주셨다.
“우와, 작가님들, 너무 감사합니다!”
“봉봉이는 이거 먹을 거지?”
“헐, 작가님, 그런 것도 기억하세요?”
“당연하지, 재봉이는 완전 우리 친동생이잖아.”
“거의 아들이지?”
김 작가님을 포함한 작가진들과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면서 새삼 저들의 인연이 신기했다.
“잘 먹겠습니다!”
“저희도 뭐 드려야 할 텐데…….”
“됐어, 나중에 방송국에서 만나면 아는 척이나 해 줘.”
“당연하죠!”
티벡스 시절에도 느꼈지만 감독님과 작가님을 포함한 스태프들과의 인연은 정말 중요했다. 잠깐의 인연이라고 해도 좁은 방송계에서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 티벡스 시절 몇 안 되는 예능 프로그램과 라디오도 결국 지운이 형의 투마월 인연으로 가능했으니까.
“수고 많으셨습니다!”
야식 내기, 럽스타그램 해프닝, 룸메이트 선정까지… 정신없이 하루가 지났다. 모든 촬영이 끝나고 나서야 드디어 휴가를 얻을 수 있었다.
* * *
올해 가장 화제성이 높은 프로그램의 데뷔 그룹인 만큼 ‘크리드’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엄청났다. 지상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파이널 시청률이 10%를 넘어갔는데, 씨넷 개국 이후 최고 시청률이었다.
[투마월 유종의 미… 크리드, 괴물 신인의 탄생]
지난 6월 8일, To My World 시즌 2(이후 투마월)이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데뷔 멤버로는 문승빈, 강도현, 차지운, 윤빈, 박재봉, 박선우, 정유현 (왼쪽부터 순위 순서대로) 7인이 확정되었다. 데뷔조를 결정지은 파이널 방송은 최고 시청률 10.2%를 기록하면서 ‘투마월 열풍’을 증명했다. -중략- 씨넷은 “크리드는 8월 데뷔를 목표로 본격적인 데뷔 준비에 들어갈 예정이다.”는 입장을 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8월이면 한달 반 정도 남지 않았나?
┕빨리 나오는게 좋짘ㅋㅋㅋ
-크리드 벌써 1군임...
-지뢰멤 하나도 없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움ㅋㅋㅋㅋ
-하 컨셉 너무 기대되뮤ㅠㅠㅠㅠㅠㅠ
┕데뷔곡 기깔나게 뽑았으면 좋겠다ㅠㅠㅠ
┕최단기간1위 가보자고
각 나이대 인기 검색어 10위권 내에 크리드 멤버의 이름이 모두 들어가 있을 정도로 성별, 연령대를 불문한 인기였다.
게다가 문승빈의 럽스타그램 해프닝으로 마냥 좋은 방향은 아니지만 화제성까지 높아졌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의외의 팬덤 결집을 가져왔다.
럽스타그램 논란이 터지고, 관련된 대중 반응과 기사를 보던 수정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울분을 터뜨렸다.
-문승빈은 재수없이 걸린거짘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ㅇㅇ솔직히 뒤에서는 다들 여친이랑 놀러다니고 있을듯^^
-문승빈 터지고 다들 계정없애는 거 아니냐?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박재봉도 비하인드에서 여자랑 있던데ㅎ
┕누나야 ㅂㅅ아
-데뷔전부터 연애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잘못은 문승빈이 했는데 왜 우리 재봉이가 욕을 먹어?”
수진은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대답했다.
“이제 더 이상 서바이벌이 아니니까?”
“응?”
“이제 한 명이 병크가 터진다고 개인만 X되는 게 아니라, 그룹 전체 이미지가 추락한다는 뜻이지.”
“아…….”
그룹 활동의 양면성이었다. 여럿이 함께 활동하기 때문에 이들의 관계성을 보는 재미가 있지만, 달리 말하면 누구 하나가 일이 터지면 싸잡혀서 욕을 먹는 게 당연해진다. 직접적으로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대중들의 의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이수진은 이미 구최애를 통해 이 진리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네 구본진처럼?”
“…응.”
다행히 수진의 최애가 병크를 터뜨린 건 아니었다. 수진의 구최애는 지극히 바른 생활 청년이었다. 흔한 태도 논란도 하나 없었다. 그룹 자체는 2.5군 정도의 애매한 인지도였지만 팬 사랑도 지극했고, 비주얼이나 실력도 꽤 준수해서 최애의 팬덤은 어느 정도 규모가 있었다.
하지만 항상 불안불안했던 멤버가 역대급 럽스타그램 병크를 터트렸다. 팬이 준 선물을 그대로 애인에게 준 것도 모자라, 애인과 함께 그 선물 하나하나 급을 나누는 것이 들키면서 희대의 ‘기만돌’로 돌판 내 공공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 개X끼 평생 안 잊을 거야.”
해당 멤버가 ‘선물 감별사남’이라는 멸칭을 얻은 후로, 그룹의 이름보다 감별사남이 속한 그룹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연관 검색어는 오염된 지 오래였고, 그나마 있던 광고와 고정 스케줄도 ‘병크돌’이라는 이미지를 의식했는지 끊겼다. 새로운 팬이 유입되려고 해도 병크를 일으킨 멤버가 입덕 장벽이 되어 팬덤 크기가 더 이상 커지는 것도 불가능했다.
빠르게 손절이라도 하고 내보냈다면 남은 멤버들만이라도 살았겠지만,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중소 기획사가 그러하듯 구최애의 소속사는 노답이었다. 기 싸움 하는 것도 아니고 그 병크멤을 계속 센터로 유지시켜서 논란에 더 불을 지폈다.
그렇게 팬덤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나고 탈덕을 선언하는 이들이 우후죽순 생겼다. 그중에는 최애만을 덕질하겠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룹 활동 특성상 문제 멤버를 계속 봐야 한다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떠난 이들이 열에 아홉이었다. 심지어 걔가 센터였다니까?
황폐화된 덕질 속에서 수진은 뼈저리게 느꼈다. 일단 그룹을 지켜야 한다. 저 새끼가 X되는 순간 내 최애도 X될 테니까.
서바이벌 때야 개인의 생존이 중요했기 때문에 악개가 판을 쳐도 문제가 될 게 없었다. 내 새끼가 올라가기 위해선 남의 새끼가 추락해야 하는 게 당연했으니까. 그런데 이제 ‘크리드’라는 하나의 팀이 되었고, 좋은 일이건 싫은 일이건 세트로 묶이게 된 거다.
“빨리 해명해서 팀에 피해 안 가게 해야 할 텐데…….”
그녀의 바람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해명이 빠르게 진행됐다.
[저희 남매입니다… 해프닝으로 끝난 럽스타그램]
-우리 애들 벌써부터 견제를;;
-크리드 ㅈㄴ잘되려나보다 벌써부터 이러는거보면;;
-우리애들이 ㅈㄴ견제되긴하나봐
┕ㅇㅇ저렇게 치졸하게 어그로끌 줄은 몰랐지만
덕분에 수정은 이번 일로 솔로 덕질과 그룹 덕질의 차이점을 배웠다. 크리드 팬덤 내부에서도 ‘외부에서 처맞을 때는 내부에서 결집해야 한다.’는 의견이 오갔다. 올팬 기조가 항상 정답은 아니었지만 앞으로 인기만큼이나 어그로가 들끓을 ‘크리드’에게는 꼭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