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엄청 떨렸죠.”
“맞아.”
“난 온몸에 소름이 돋았어.”
말을 하면서 그때가 떠올랐는지 양팔을 쓰다듬는 윤빈 형이었다.
“안 믿겼지.”
강도현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제일 정답인 말이지. 과자를 우물거리던 박재봉이 거들었다.
“머리가 새하얘졌어요.”
“분명 귀로는 내 이름을 들었는데 이게 말이 되나? 싶어서 가만히 서 있었어.”
발표의 순간을 재연하듯 선우 형이 벌떡 일어섰다. 덕분에 이불 위에 있던 간식들이 우르르 쏟아졌고, 모두들 본능적으로 정유현을 쳐다봤다. 미동도 하지 않는 정유현의 등을 보면서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속닥이며 분주하게 바닥을 정리했다.
“야, 빨리 치우자!”
“유현이 형이 자고 있어서 십년감수했네요.”
정리를 마치고 다시 파이널 얘기를 이어 갔다.
“근데 너무 많이 울어서 눈 아파.”
“맞다, 승빈이 형. 왜 그렇게 운 거예요?”
“그, 그야 데뷔했으니까 기뻐서 운 거지.”
내가 운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하긴, 평생 흘릴 눈물은 이미 티벡스 때 다 흘린 것 같아서 본격적인 배우 활동 이후로는 우는 일이 거의 없었다. 감정이 무뎌질 때로 무뎌진 것이다. 청춘예찬 무대에서도 모두가 무대 위아래에서 울 때 나만 안 울었던 걸 생각하면… 신기해할 만도 하다.
“근데 솔직히 오늘 도현이 형이랑 승빈이 형 좀 멋있었어요.”
“오늘만?”
“네. 오늘만, 특별히.”
“왜?”
“둘 다 데뷔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는 게 멋있었어요.”
“내가?”
“내가?”
동시에 같은 반응이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누가 생방송에서 그런 말을 해요?”
“그러게. 강도현 너는 왜 그랬냐?”
“솔직히… 떨어질 거라곤 생각 안 했어.”
“와…….”
진짜 재수 없는 발언인데 강도현이 해서 납득이 갔다. 하긴 쟤가 데뷔 못 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지나친 겸손이지.
솔직히 말해서 나도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하고 싶은 말이나 다 해 보자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꼭 이뤄지길 바란 염원이기도 했고.
“나는 너무 고마웠는데 혹시 내가 데뷔 못 해서 네가 곤란해질까 봐 걱정했지.”
“말도 안 돼요. 전 형도 당연히 될 거라고 확신해서 한 말이었어요.”
지운이 형을 언급했던 마지막 인터뷰는 지난 회귀의 과정을 모두 설명해 줘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걸 말해 줄 수 없으니 이런 식으로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5위까지 불리고, 난 내가 당연히 데뷔 못 할 거라고 생각했어.”
윤빈 형의 말에 모두들 잠시 조용해졌다. 사실 정유현의 7위 다음으로 이번 순위 발표식의 가장 큰 서프라이즈 중 하나였으니까.
“만약 데뷔를 못 하면 어떡하지? 다시 미국으로 가야 하는 건가… 너무 많은 생각들이 있었고, 내가 아는 모든 신들한테 기도했어. 근데 그 순간 내 이름이 불리는 거야, 난 진짜 하늘에서 내려온 소리인 줄 알았다니까?”
형은 양손까지 동원해서 당시의 기분을 표현했다. 파이널로 갈수록 줄어든 생기가 다시 채워진 모습이었다. 쾌활했던 첫 무대 때로 돌아온 것 같았다.
“우리 데뷔하면 어떨까?”
“데뷔곡 너무 기대돼요.”
“이제 음악 방송도 돌고, 쇼케이스도 하겠죠?”
“난 뮤직비디오 촬영하는 것도 너무 기대돼!”
“어우, 그거 진짜 힘…….”
무의식적으로 삼 일 내내 뮤직비디오를 촬영했던 날이 떠올라 말이 튀어나왔다. 다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는 의아한 눈이었고, 나는 급하게 해명했다.
“힘들어 보이더라……. 그, 선배님들 메이킹! 메이킹 필름 보면 막 하루 종일 촬영하고 그러잖아. 하하.”
“맞아, 맞아. 막 밤샘 촬영 하는 경우도 있더라고.”
“그래도 신날 거 같아요!”
박재봉이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역시 뭘 모르는 때가 좋은 거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 역시 설렜다. 망돌이 아니라 정말 제대로 된 서포트를 받은 데뷔는 이번이 처음이니까. 그때를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르겠다.
모두들 그렇게 저마다의 기대감에 가득 차던 때, 의문의 소리가 들렸다.
꼬르륵-
“응?”
“뭐야?”
“하하…….”
어디서 난 소리인가 했는데… 나였다. 배가 고플 만도 하지. 전날 안 붓겠다고 과자 말고는 먹은 게 없었으니까. 당일에도 최대한 붓기 없어 보이려고 샐러드만 겨우 먹었다.
“야, 근데 슬슬 배고프지 않냐?”
“맞아요, 우리 사실 아침만 먹고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요.”
“야식 먹을까?”
“좋아요!”
“그럼 게임으로 야식 내기할래?”
“씨더스타로 정하자!”
선우 형이 패기 있게 ‘씨더스타’ 게임으로 정하자는 의견을 냈다. 사실 투마월 연습생들 사이에서는 이미 익숙한 패턴이었다. 하도 PPL로 ‘씨더스타’를 시키다 보니까 다들 진짜로 중독됐었거든. 그래서 숙소에서 무슨 내기만 하면 가위바위보보다도 ‘씨더스타’가 먼저 나왔던 거다.
그렇게 대결 종목이 정해지자 윤빈 형은 걱정이 없어 보였고, 지운이 형의 얼굴에는 순간 긴장감이 몰려왔다.
“승빈이 형, 괜찮겠어요?”
“이거 그냥 승빈이가 사라는 거 아니야?”
“상관없어요.”
다들 ‘투마월 배 씨더스타’를 기억하고 있겠지. 하지만 다들 모를 것이다. 내가 그날 이후로 투표권을 얻기 위해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했는지. 공평한 대결을 위해 극상의 난이도인 ‘킬러’를 모두 플레이하기로 했다. 예전의 실력이었다면 인트로 반주에서 FAIL이 떴겠지만, 끝까지 해냈다. 저리는 손가락을 탁탁 털어 내는데 모두 놀란 눈이었다.
“뭐야?”
“승빈이 왜 이렇게 잘해?”
“뭐야, 너 문승빈 아니지?”
거의 클리어에 가까운 점수에 강도현은 믿기지 않는 듯 내 얼굴을 이리저리 뭉갰다.
“흐즈므르…….”
“너 어디서 수련하고 왔냐?”
“투표권 받으려다 보니…….”
“아, 그거면 인정. 나도 엄청 했었어.”
나를 포함한 미성년자 멤버들은 겨우 한두 시간 자고 나서도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역시 어려서 그런가. 그래서 새벽 늦은 시간이 되어도 집중력이 크게 흩어지지 않았고, 덕분에 게임 결과도 무난하게 나왔다.
반면 지운이 형은 정말 악으로 깡으로 버텼다. 원체 게임에 관심이 없는 형이어서 ‘씨더스타’는 여전히 못했다. 그래서 선우 형 이전까지는 지운이 형이 가장 낮은 점수였다. 모두들 지운이 형이 야식을 시키겠거니 기정사실화했지만, 형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안 그래 보이지만 승부욕이 강해서 선우 형이 ‘킬러’를 두 손으로 하는 동안 옆에서 방해하겠다고 ‘달려갈게’를 부르기까지 하는데, 선우 형의 마지막 말이 잊히지 않는다.
“너 진짜 무서운 사람이다…….”
그렇게나 치열한 접전 끝에 결국 오늘 야식은 선우 형의 카드에서 나가게 됐다. 1등은 이변 없이 윤빈 형이었다.
하지만 게임까지 끝내니 꽤나 늦은 시간이어서 그런지 배달이 안 되는 곳이 많았다. 여러 번 주문에 실패하자 선우 형은 내심 기쁜 마음인 듯했다.
“야, 너무 늦어서 그래. 시킬 곳 없으면 그냥 잠이나 자자.”
하지만 굶주린 6명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모두들 정보력을 총동원해서 배달이 가능한 곳을 찾아냈다.
“지독한 놈들…….”
배달 앱이 켜진 선우 형의 핸드폰이 6명의 손을 거쳐 가는 동안, 형은 반쯤 해탈한 얼굴이었다.
“다들 체력이 왜 이렇게… 좋은 거냐?”
“윤빈 형이 치킨 시킨다고 했죠? 그럼 전 족발.”
“아, 도현아, 지운이 형이 족발 시켰어. 다른 거 해.”
“즉등히 시키르…….”
“하, 마라탕 먹고 싶었는데.”
대부분 먹고 싶은 메뉴를 얻었지만 박재봉만 실패했다. 이 야심한 시간에 마라탕을 먹겠다고 한 게 무리긴 했지. 점점 올라가는 금액에 선우 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와중에 정유현도 야무지게 메뉴를 골랐다. 선우 형은 주문이 다 끝난 후에야 발견했다.
“뭐야, 형은 왜요?”
“몰랐어? 나 안 자고 있었는데.”
“와, 와… 진짜 무서운 사람이네? 안 잤다고요?”
형은 억울해했지만 정말이었다. 저 치밀한 인간은 선우 형이 내기를 시작하자마자 기지개를 켜고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심지어 혼자 조용히 킬러를 플레이해서 점수까지 보여 줬는데, 놀랍게도 윤빈 형 다음이었다. 선우 형은 자기 게임에 집중하느라 정유현을 등지고 있어서 몰랐겠지만 말이다.
‘앞으로 그룹 생활 쉽지 않겠군…….’
* * *
우여곡절 끝에 주문한 야식이 도착하는 동안 씻을 순서를 정했다.
“누가 먼저 씻을래?”
“이건 그냥 가위바위보로 하자.”
정유현의 간단명료한 제안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치열한 가위바위보가 끝나고 지운이 형이 1등이 됐고, 다들 피곤함이 우선이었는지 신속하게 씻고 나왔다. 혹시나 화장실에도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을까 봐 얼마나 꼼꼼하게 화장실을 살펴봤는지 모른다. 투마월 숙소에서 싸 온 짐이 그대로였던지라 다들 잠옷도 똑같이 투마월에서 내내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어느덧 종류별로 시킨 음식이 모두 도착하고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그래도 좀 씻고 나왔다고 아까보다는 멀쩡해진 얼굴들이었다. 이번에는 정유현도 함께 자리를 지켰다.
“와, 진짜 맛있겠다.”
“배달 음식으로 야식 먹는 거 얼마 만이냐.”
“그니까요. 오늘만큼은 진짜 원 없이 먹어야지.”
“일단 먹자.”
서바이벌 내내 관리의 늪에 빠져 있던 지라 다들 눈이 돌아갔다. 치킨과 피자, 족발과 막국수까지 환상의 조합 그 자체에 다들 한동안 말을 잃고 먹는 데 집중했다.
“맞다, 유현이 형.”
“응.”
“형은 마지막에 이름 불렸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역시 요즘 애들은 달라도 뭔가 다르다. 이런 걸 MZ 세대라고 부르는 건가. 모두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못했을 내용인데, 역시 박재봉이었다. 바로 훅을 날려 버리네.
조용히 치킨을 씹던 정유현이 간단명료하게 답했다. 하지만 상상도 못 한 답이었다.
“…무서웠어.”
“네?”
예상치 못한 발언에 모두 젓가락질을 멈출 정도로 놀랐다. 박재봉도 저런 답은 예상 못 했는지 물어봐 놓고 더 당황한 얼굴이었다. 정유현도 무서움이라는 걸 느끼는구나. 정유현이라면 세상에 무서울 것 하나 없는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데뷔에 진심인 줄 나도 몰랐거든.”
“…….”
“그토록 바라던 걸 갖지 못할 뻔하다, 포기하기 직전에 얻게 되니까-”
“너무 행복해서 무서운 기분?”
이어지는 윤빈 형의 말에 정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처음 들어 보는 정유현의 진심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벙 찐 우리의 얼굴을 둘러보던 정유현이 마저 치킨을 먹더니 젓가락을 내려놓고 자리를 정리했다. 다시 너무나도 익숙한 정유현의 모습이었다.
“늦었다. 먹고 잘 치워 둬.”
그러곤 양치와 잠잘 준비를 마치고 돌아왔다. 몇 시간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안대와 이어폰을 장착하고 똑같은 자세로 소파 위에서 잠을 청했다. 모두들 목소리를 한 단계 낮춰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렇게 예상치 못했던 숙소에서의 첫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