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마지막 날에도 기상송은 변함없었다. 선우 형은 평소와 다름없이 졸린 눈을 비비며 눈부셔 안무를 반사적으로 추고 있었다. 나도 별반 다를 거 없었다.
“이제 눈부셔 들으면서 일어날 일 없어서 너-무 행복해!”
“그건 그래요. 너무 많이 들어서 꿈에서도 눈부셔 추는 날도 있었어요.”
“너도? 난 맨날 꿔서 이제 악몽 같아. 야, 솔직히 여기 애들 다 한 번씩은 그런 꿈꿨을 듯?”
“이제 등급별 색깔 티 입을 일도 없겠고…”
“그것도 너무 좋아. 나 주황색 안 어울리는데 맨날 입고 다녔잖아.”
확실히 선우 형이 평소 입는 사복과는 어울리지 않은 색이었다. 하긴, 나도 처음에 A팀 핑크색이 낯간지러웠던 적이 있었지. 잠깐의 잡담을 마치고 짐을 챙겨 버스로 향했다.
파이널 촬영장에 가는 버스에는 평소와 다른 긴장감이 흘렀다. 몇 명은 잠을 설쳤는지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있었다. 다들 대화보다는 마지막으로 안무와 목 상태를 체크했다. 하지만 공연장에 다다르자 그 모든 정적이 깨졌다.
“와, 저기 봐!”
“대박, 공연장 다시 봐도 진짜 크다.”
“근데 촬영은 8시 시작 아닌가?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지?”
“설마 다 우리 보러 오신 분들인가?”
“벌써?”
“미쳤다, 진짜.”
긴가민가하던 것도 잠시, 주차장으로 들어서자 들리는 함성에 모두 확신했다. 진짜 우리를 보러 온 팬들이구나.
“승빈아!”
“야, 온다 온다!”
“아, 밀지 마시라고요!”
차에서 내리자마자 여기저기서 터지는 플래시 세례에 다들 놀란 토끼눈이었다. 에이라이브 촬영장은 철저하게 비공개로 진행되었던지라 연습생들도 오랜만에 마주하는 팬들의 반응이었던 거다.
눈이 부시고 귀가 멍멍해도 다들 마냥 즐거워 보였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자신의 슬로건을 찾아 인사하기도 하고, 방방 뛰며 뒤에 있는 팬들까지 눈에 담으려고 했다. 파이널 무대를 앞두고, 다들 자신이 왜 이 길을 선택했는지 다시 한번 확신하게 해 주는 순간이었다.
나도 열심히 내 슬로건을 찾아 인사했다.
“승빈아, 데뷔하자!”
“핑크 머리 예쁘다, 승빈아!”
수많은 외침 속에서도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들은 유독 크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아마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겠지.
수많은 인파를 헤치고 마침내 공연장에 들어가서도 다들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것 같았다. 최종 리허설을 시작하는데도 이제 다들 긴장보다는 설렘이 가득했다.
“동선 잘 확인하셔야 해요-!”
“네!”
“센터 파트 맡은 연습생들 따로 카메라 리허설 할게요!”
“네!”
센터 파트를 맡은 나, 윤빈 형, 지운이 형, 선우 형, 정유현은 배로 정신이 없었다.
카메라에 찍힌 모습을 확인하는데, 스스로도 놀랐다. 윤빈 형과의 특훈이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내가 1절에 먼저 나오기 때문에 뒤에 가서도 잊히지 않게 임팩트를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의외로 윤빈 형과 내 합이 좋았다. 때마침 의상과 무대 조명도 나는 푸른빛이고, 형은 하얀 계열이어서 청룡과 백호의 느낌이었다.
“역시 센터들은 다르네-”
“감사합니다!”
좀처럼 무대에 대한 코멘트를 하지 않던 카메라 감독님도 칭찬을 할 정도였으니 무대 퀄리티에 대한 걱정은 줄었다.
‘실수만 하지 말자’
전광판으로 센터 파트를 보던 연습생들의 환호성도 들렸다.
“멋있다!”
“잘생겼다-”
다음은 유닛 무대 리허설이었다. ‘본’ 팀의 무대는 예상한 대로 흠잡을 곳이 없었다. 지운이 형, 윤빈 형, 박재봉 세 사람이 가장 눈에 띄는 무대였다.
“수고하셨고, 다음으로 ‘샤인’ 무대 리허설 들어가겠습니다.”
“네!”
항상 연습실에서만 무대를 하다가, 어제 처음 올라본 큰 무대여서 그런지 동선 체크에 집중했다. 사용할 무대 넓이가 더 넓어졌기 때문에 팀원들끼리의 합이 중요했다. 김병대와의 페어 안무도 나름대로 잘 끝냈다. 한 가지 걱정되는 건 내가 아니라 김병대가 표정 연기를 제대로 못 한다는 거였다.
이 X끼는 진짜 이러다가 같이 데뷔라도 하게 되면 앞으로 4년 어떻게 보내려고 이러는 건가 싶었다. 그래도 꽤 순조롭게 리허설이 진행되던 중 문제가 발생했다.
“거기 두 명 간격 조심해요!”
무대 중에 현장 감독의 외침이 들렸다. 무슨 일인가 확인해 보니 김병대와 강도현이 충돌할 뻔한 거다. ‘본’ 무대와 ‘샤인’ 무대 그리고 ‘본 투 샤인’까지 준비하다 보니 동선이 꼬이는 경우가 발생했다.
김병대도 당황한 듯 자리에 멈췄고, 결국 1차 리허설이 중단되었다. 정유현이 모두를 모았다.
“중간에 돌출 무대로 나올 때 보폭 조금씩 더 크게 하자. 지금 보폭으로 하면 무대 앞까지 가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네!”
“그래.”
무대를 하면서 아쉬웠거나, 보완이 필요한 부분을 쏙쏙 골라 말하는 게 신기했다. 대부분 연습생들은 각자 맡은 역할을 소화하기도 벅차했는데, 회귀 전에도 느꼈지만 보통내기가 아니다.
“그리고 병대야.”
“…네.”
“센터 파트에 대한 미련이 남은 건지, 아니면 본투샤인이랑 무대가 헷갈린 건 지 모르겠지만 후렴구 들어가기 전에 동작 계속 틀리는 거 알고 있지.”
“네.”
“주의하고.”
“네.”
차라리 욕을 하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의 촌철살인이었다.
‘쟤는 밉보이는 게 두렵지도 않나?’
물론 실력이나 인기로 정유현이 김병대에게 눈치 볼 필요는 없다. 하지만 다들 VM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김병대와 강도현을 대할 때 조심스러워했다. 그런데 정유현은 언제나 ‘X까라’ 마인드였다. 뭐 쟤네 소속사도 크니까 그럴 수 있나 싶기도 했지만, 그러기에는 모두에게나 똑같은 걸 보면 그냥 쟤 성격이 저런 거였다.
“단순히 무대 망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러다가 너랑 강도현 둘 다 무대 밑으로 추락할 수 있어.”
방금까지 사람 뼈 부러뜨려 놓고 이 감동 멘트는 뭔데? 사람 다루는 게 보통이 아니었다. 당근과 채찍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점에서 정유현은 명확했다.
정유현의 말이 끝나고, 의기소침해 보이는 김병대에게 다가갔다.
“돌출로 이동할 때 앞에 사람 움직이는 거 확인하고 약간 느리게 옮겨 봐. 지금은 한 템포씩 빨라.”
“…”
“그리고 지운이 형이랑 동선 바꿀 때는 왼손은 살짝 내리고, 부딪히기 쉬우니까.”
“네.”
순간 경계하던 녀석이 내가 하는 말을 듣고는 멈칫했다. 방금 조언한 게 딱 자기가 잘못했던 부분이었거든. 옆에서 듣던 강도현도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와, 너 그건 어떻게 알아?”
“나? 그냥 다른 애들 동선도 다 외웠는데?”
내 대답에 둘 다 놀란 표정이었다.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지만, 김병대의 맹랑한 어그로 때문에 한 번 실수를 했더니 두 번은 실수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다른 연습생들의 동선도 여러 번 체크했고, 덕분에 모든 동선이 머릿속에 있었다.
도움을 받은 것도 떨떠름해 보였는데, 대놓고 고맙다고 하기에는 더 민망하겠지. 심지어 동선 관련이니까. 들릴까 말까 한 소리로 고맙다고 하더니 스태프의 목소리와 함께 후다닥 자리를 피했다.
“샤인 팀 리허설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네!”
다행히 2차 리허설은 큰 실수 없이 마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눈부셔 리허설 하고 끝낼게요!”
“네!”
촬영장 한 곳의 문이 열리고, 82명의 연습생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문득 투마월 시그널 송 촬영 날이 떠올랐다. 그때 이후로 이렇게 시끌벅적한 촬영장은 드물었지.
“형!”
익숙한 목소리에 뒤돌아보니 이수빈이 달려오고 있었다. 이수빈의 목소리에 다른 청춘예찬 팀 연습생들도 모였다.
“완전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요?”
“당연하지, 너는?”
“저도 열심히 연습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보는 연습생도 있었다. 우리 방 룸메이트였고, 1차 순발식에서 탈락했던 정승훈이다.
“승빈아!”
“승훈이구나!”
“나 기억해?”
“당연하지-”
“헐, 승훈아 이게 얼마 만이냐?”
“선우 형도 잘 지내셨죠?”
“응! 야, 그러고 보니까 너 데뷔한다며!”
“네, 이번에 데뷔 조 확정 나서 뮤비도 찍었어요.”
“내가 먼저 데뷔할 수도 있다? 꼭 데뷔해. 나중에 방송국에서 보자.”
1차 순발식에서 떨어지던 날, 서로 우스갯소리라고 생각한 대화가 현실이 됐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서로 오랜만에 만난 그리움과 반가움을 나누고 100명의 ‘눈부셔’ 리허설이 시작됐다.
* * *
밤샘 후 확정된 번호표를 받은 문스트럭도 바로 주차장 쪽으로 뛰어왔었다. 다행히 몇 번 와 봤던 공연장이라, 연습생들이 어디서 내릴지가 뻔했다. 그래서 그녀가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여러 사람이 모여 연습생들의 출근길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름 괜찮은 자리를 잡아 무사히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아, 기자들 포토 존 왜 이번에는 안쪽이냐고,”
“그니까, 야외여야 멀리서라도 찍는데.”
“그래도 출근길 안 놓친 게 어디냐. 난 진심 번호표 기다리다가 뛰쳐나올 뻔.”
“그건 그래. 출근길 뜨나 하고 짹짹이 계속 새로 고침 했잖아.”
K와 얘기하면서도 그 자리에서 바로 프리뷰를 셀렉하고 있는 문스트럭이었다.
“아니, 근데 승빈이 핑크 머리 미친 거 아니냐?”
“나도 아까 깜짝 놀람.”
“완전 복숭아인 줄.”
“인정. 부끄러운지 얼굴 빨개진 게 너무 귀엽더라.”
“그치. 하얘 가지고 빨개진 게 너무 잘 보이더라. 귀여워.”
“머리색도 딱 예쁘게 잘 뽑혔어.”
“이걸 프리뷰를 올려 말아? 스포긴 한데.”
“무조건 올려야지. 하나라도 더 떡밥 던져야 함.”
“아무래도 그렇지?”
문스트럭 빈 @Moonstruck_Bean 10초 전
[20XX06XX 문승빈 파이널 출근 프리뷰]
승빈이 머리에 봄이 왔어요.
핑머 최고야ㅠㅠㅠㅠ 복숭아 아니냐구ㅠㅠㅠ
-미쳤다..... 승빈이 그냥 핑머로 태어난거 아님?ㅠㅠㅠ
-제가 지금 보고있는게 실화인가여.........
-문승빈 핑머단 존버 성공이다ㅠㅠㅠㅠㅠㅠ
-백발도 찰떡이었는데 핑크가 찐이다......
-애기 완전 복숭아쟈나ㅠㅠㅠㅠㅠ
-제발 핑머에 블러셔 소취.....
승빈이의 핑크 머리 사진에 다들 난리였다. 백발이 베스트인 줄 알았는데, 핑크도 이렇게 잘 어울리다니. 역시 천재 아이돌이 따로 없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A가 차로 갔다고 그랬지?”
“어. 거기도 이 근처 주차장임. 얼른 가자.”
“그래. 차에서 눈이라도 붙여야겠다.”
원래도 출퇴근길에는 관심 없던 A는 번호표를 받자마자 바로 주차해 놓은 차로 이동했다. 마지막으로 밤샘했을 때만 해도 학생이었는데, 이제는 자차를 끄는 직장인이라니.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아, 승빈이 놀란 거 너무 귀여워.”
“맞아. 그리고 난 지운이도 눈이 그렇게 커진 거 처음 봄.”
“인정, 지운이도 프리뷰 지금 올릴래? 이거 잘 나옴.”
“대박. 야, 이거 진짜 잘 찍었다.”
열 발짝도 안 갔는데, 이번에는 지운이 프리뷰 찍으러 잠시 멈췄다.
“역시 출근길이 재밌어. 애들 다 사복인 거 같던데.”
“그니까. 승빈이 흰 티에 청바지 잘 어울리더라.”
“애가 뭘 좀 안다니까?”
그렇게 멈췄다가 다시 이동했다 또 멈췄다가- 피곤하고 졸리던 건 다 어디 갔는지 이동하면서도 쉴 새 없이 최애 얘기를 하는 그녀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