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병대는 또 안 보이네.”
윤빈이 걱정 섞인 목소리였다. 단호한 모습을 보인 것이 내심 마음에 걸린 듯했다.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고 주제를 돌렸다.
“그럼, 센터 파트 연습 시작할까요?”
“아, 맞다. 그래.”
지난번 중간 평가에서 아쉬운 평가를 받은 만큼 안무에 좀 더 신경을 쓰기로 했다. 각이 중요한 안무인 만큼 온몸에 힘이 들어갔고, 쉽게 지쳤다. 게다가 카메라를 활용한 안무여서 배로 신경이 쓰였다.
[제목: 본 투 샤인]
-노래: ■■■■□
-안무: ■■□□□
‘확실히 안무가 부족하네.’
“디테일 잡는 게 너무 어려워요.”
“음…….”
내 안무를 가만히 보던 윤빈이 말했다.
“너무 모든 동작에 힘을 넣으려고 해서 그런 거 같아.”
“네?”
“텃팅은 관절이랑 근육 움직임이 부드럽게 이어져야 동작이 잘 나오거든. 그런데 너무 정확하게 하려다 보니까 힘이 과하게 들어가 있어. 그러면 오히려 동작이 뻣뻣해 보일 수 있어.”
확실히 안무에 대한 이해가 있는 사람이었다. 정확하게 문제점을 파악한 거다. 각을 살려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매 동작마다 지나치게 힘을 주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동작이 매끄럽지 않았다.
“물론 힘을 다 빼면 안 되지만, 포인트가 되는 동작에서 순간적으로 힘을 주고 정확도를 높이는 건 어때?”
“한번 해 볼게요.”
형의 조언대로 이전 동작을 할 때는 부드럽게 이어지는 것을 주로 하고, 센터의 하이라이트 동작에서는 손과 팔에 순간적으로 힘을 주었다. 얼굴 주변에 텃팅을 하여 프레임을 만드는 동작이라 작은 움직임도 큰 차이를 보였다.
“잘하네!”
“와-”
“어떤 거 같아?”
“느낌이 완전 다른데요? 훨씬 편해졌어요.”
[제목: 본 투 샤인]
-노래: ■■■■□
-안무: ■■■□□
기대에 부흥하듯 스텟창에도 변화가 생겼다. 기쁜 마음에 방금 잘됐던 동작을 여러 번 반복했다. 노래와 표정 연기는 이미 어느 정도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앞으로 동작에 더 익숙해지고, 갈고닦을 일만 남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형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쉬고 있는 건가- 하고 뒤돌아보니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뭐야, 어디 아파요?”
“응?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얼굴이 완전 하얗게 질렸는데. 뭐, 체했어요?”
“아냐, 너도 똑같은 거 물어보네…….”
“형, 저 따라 해 봐요.”
아니긴 뭐가 아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엄지와 검지 사이 마디를 누르는 시늉을 했고, 따라하던 윤빈이 움찔했다.
“체했네-”
“…근데 체했다는 게 뭐야?”
창백한 와중에도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에 입이 떡 벌어졌다. 맙소사. 그럼 체했다는 표현을 몰라서 그냥 아니라고만 말하고 다녔다는 거야?
다시 한번 영어로 질문을 던졌다. 익숙한 모국어를 들어서 그런 걸까, 핏기 없던 얼굴이 한결 나아졌다.
“아마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갔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와, 체했다가 그거야?”
“네.”
“승빈이 영어 잘하네-”
“아유, 아니에요.”
어렸을 때 잠깐 미국 생활을 한 경험이 있었다. 이후에도 미국에 거주하는 가족들과 연락하면서 종종 영어를 쓰곤 했는데, 이게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지.
“아무튼, 앞으로 한국어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는 거 생기면 꼭 얘기해요.”
내심 형도 마음고생이 심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와 달리 말을 할 때 영어에서 한국어로 번역을 해야 하는데, 방송이다 보니 적절한 표현인지 생각하는 단계가 더 필요했겠지. 그런데 이번에는 파이널 무대를 신경 쓰느라 에너지를 소진한 건지, 생각의 단계를 늘리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체했냐고 물어도 그냥 아니라고 했겠지.
형도 나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게 어색했는지 형은 다시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듯했다.
“근데 심한 건 아닌 거 같아. 엄청 아프진 않았거든.”
“세게 안 눌렀죠?”
성큼성큼 걸어가서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 마디를 힘주어 꾹 눌렀다.
“악!”
안 아프긴 개뿔. 연습실 가득 울리는 비명 소리에 모두들 연습을 멈추고 시선이 고정됐다. 아니, 이러다가 또 악편 당하면 안 된다고- 게다가 주저앉은 형이 한동안 일어서지 않았다.
‘뭐야? 그렇게 아팠어?’
“미안해요, 형. 그렇게 아플 줄 몰랐어요.”
“…….”
“?”
심상치 않아서 확인해 보니 호두 턱이 돼 가지고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울어? 여기서? 갑자기?’
“뭐야, 형 울어요?”
“아파, 너무 아파서.”
우는 사람 앞에 두고 웃으면 안 되는데 참느라 너무 힘들었다. 이게 무슨 자기가 양파냐고 묻는 인터넷 소설도 아니고, 최대한 부정적인 감정은 숨겨야 하는 이곳에서 이렇게나마 감정을 치환해야 한다는 게 조금 안쓰럽기도 했다.
“문승빈, 왜 형 울리냐?”
“아니, 아니야. 끅, 승빈이 잘못, 후, 없어…….”
와중에 윤빈도 방송 걱정을 했는지 온몸으로 손사래를 치고 엑스자를 그으며 내 잘못이 없다고 해명했다.
“아, 알겠어요, 형.”
울음이나 그치고 해 주면 좋으련만.
다행히 형이 소속사 엔스타그램에 글을 올려서 나중에라도 오해가 생길 일은 원천 차단했다.
(손가락 마디 누르면서 익살스럽게 아파하는 모습 사진)
[오늘은 승빈이에게 ‘체했다.’는 표현을 배웠습니다!
영어도 잘하는 승빈이^^
체 했을 때 여기를 누르면 좋다는 것도 배웠어요.
ps. 세게 누르면 눈물 날 만큼 아파요ㅠㅠ]
-승빈스쿨 이제 어학으로 세계관 확장하는거임?ㅋㅋㅋㅋㅋㅋㅋㅋ
-둘이 데뷔해서 승빈이가 윤빈이 한글 알려줄 생각하니까 벌써부터 재밌다…
-눈물날만큼 아프댘ㅋㅋㅋㅋㅋㅋㅋ큐ㅠㅠㅠ
┕윤빈이 직접 눌러봤나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윤빈이 사진 진짜 쾌남그자쳌ㅋㅋㅋㅋㅋ
-윤빈이 한국어실력 점점 늘어나는거 보는재미가 쏠쏠함ㅇㅇ
어쩐지 승빈 스쿨이 투마월 한정이 아니게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연습생들이 이렇게 연습에 열중하는 동안, 팬들은 그보다 더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문승빈 팬 연합 투표 이벤트 총공]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한 노력은 분야와 방법을 막론하고 이뤄졌다. 기존에 투마월을 보지 않았거나, 투표까지는 하지 않던 대중들의 표를 얼마나 끌어오느냐가 쟁점이었다. 파이널은 생방송으로 진행되고, 문자 투표의 점수 비중이 크기 때문이었다.
기본적으로는 다들 투표 이벤트를 기획하고 있었다. 팬들의 모금을 받아 문자 투표를 인증한 사람들에게 상품을 제공하는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모모와 보보였다.
[정유현 연습생에게 당신의 소중한 한 표 부탁드립니다.]
To My World 시즌 2 파이널에서 정유현 연습생에게 투표한 인증을 올려 주세요.
추첨을 통해 원하는 연예인의 캘리그라피 포스터를 제작해 드립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유현아 데뷔하자!
[박선우 연습생에게 당신의 소중한 한 표를!]
To My World 시즌 2 파이널에서 박선우 연습생에게 투표한 인증을 올려 주세요.
여러분의 최애를 그려 드립니다.
연예인, 강아지, 고양이, 본인 자신 전부 다 가능합니다~
많관부~ 박선우 연습생을 기억해 주세요!
-아니ㅋㅋㅋㅋㅋㅋㅋ 모모 앤 보보 게시글 봄??
┕눈을 의심함ㅋㅋㅋㅋㅋ 재능낭비 무슨 일이냐고.... 아 재능기부인가;;
-모모님 포스터가 그 전광판 광고같은 느낌인거지??ㅁㅊ
┕(사진) ㅇㅇ 이런 느낌이라고 인스타에 시안 올려주셨더라
-와... 나 홈만데 진심 탐난다ㅠㅠㅠ
┕22 저걸로 광고걸면 대박일 듯ㅠㅠㅠㅠㅠ
-진짜 모모앤보보니까 할 수 있는 투표이벤트다ㅋㅋㅋㅋ
┕정유현이랑 박선우는 진심 무슨 복이냐....
-내 최애 눈감아ㅠㅠㅠㅠㅠ
┕22 누나가 미안하다.,....
┕33 투표라도 열심히 해볼게....
-와 나 울집 강쥐 그려달라고 하고싶다ㅠㅠㅠㅠ
-(사진) 이거봐ㅠ 보보님 초반에 외주작업 받을 때 그린 동물그림임
┕와,,,,,,,, 지금은 일반 외주는 따로 안받는거지??
┕ㅇㅇ 비즈니스로만 작업하시는 듯ㅠ
-와 색감 미쳤다.,,, 나 왜 저때 보보님 몰랐냐고ㅠㅠㅠㅠ
-치즈야 언니가 꼭 당첨되고 만다.
┕아키야 누나가 울 아키 인생샷 얻고 만다...
-이거 완전 전국 견주집사들 결집시키는 거 아니냐고ㅋㅋㅋㅋㅋㅋ
-투디 쓰리디 반려동물 주인들... 경쟁률 오질 듯ㄷㄷ
문스트럭 역시 파이널을 위한 준비에 한창이었다. 먼저 자체적으로 진동벨 이벤트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생방송 날은 일반인들의 참여도 무시할 수 없으니, 카페 진동 벨에 영상을 넣어 투표를 독려하는 것이었다. 최대한 공들여서 뽑은 영상과 사진으로 만들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잘생긴 사람을 마다할 일은 없을 테니까.
그것만으로 아쉬웠던 그녀는 SNS에서 올라온 여러 투표 이벤트들을 확인했다. 개중에는 투표를 해 준다면 최애를 그려 주겠다는 소위 ‘금손’ 팬아터들이 많았다.
“아, 그림 잘 그리면 나도 저렇게 할 텐데…….”
하지만 그녀는 학창 시절에도 미술 대신 음악을 선택하는 지독한 똥손이었다. 사진 촬영과 보정을 보면 예술적 감각이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유독 그림에 약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예전에 좋아하던 아이돌 팬싸 포스트잇에 강아지를 그려 갔는데 지금은 구오빠가 된 그가 도마뱀이냐고 물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무릎을 치며 말했다.
“내가 괜히 홈마 하나?”
그녀는 오랫동안 드라이브 한 곳에 묻혀 뒀던 사진들을 하나둘 꺼냈다. 그리고 자신의 홈마 계정에 글을 올렸다.
문스트럭 빈 @Moonstruck_Bean 1분 전.
[문승빈 투표 독려 이벤트]
투마월 시즌 2 문승빈 연습생 온라인 투표& 문자 투표에 참여한 분들 중 추첨을 통해
최애의 고화질 보정 사진을 드리겠습니다!
(샘플 사진 1-4)
*온라인 투표 : 투표 전과 투표 완료 인증 사진을 문승빈 연습생의 얼굴이 나오게 워터마크 이미지로 보내 주세요.
*문자 투표 : 온라인 투표와 동일하게 투표 시간, 날짜, 아이디가 나오게 캡처해 주세요.
생방송 투표 시작을 알리는 시간(20시 40분) 이후부터 보낸 문자만 인정합니다. 중복 투표, 혹은 타 연습생 투표를 통한 무효표를 막기 위해 방송이 끝난 후(24시)의 투표 캡처도 따로 인증받을 예정입니다.
-헐 나 여기 보정 좋아하는데;;
-근데 사진은 어디서 가져오는거지?
-타래 쭉 읽어보셈 당첨되면 해당아이돌 참여하는 행사나 콘서트 참여해서 따로 찍어준대
-완전 대리찍사 해준다는거네;;
-헐 이분 전판에서도 유명했었잖아
-가좍들한테도 내아이디로 참여해달라고 부탁해야겠음
-나 이런 투표이벤트는 처음봤음ㅋㅋㅋㅋㅋㅋㅋ
“이러다가 구오빠 사진 찍어 달라는 부탁 들어오면 개웃길 듯?”
“K야, 말이 씨가 된다는 말 모르냐?”
“부디 안 그러길 바랄게.”
문스트럭은 구오빠도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애매하게 2군 언저리에서 머물던 오빠 1군으로 만든 거 제 사진 덕분이잖아요.’
평범한 홈마였다면 그냥 묻혔을 수도 있는 이벤트 글이었다. 하지만 문스트럭은 이미 전판에서도 전전판에서도 별명이 1군 메이커였다. 올리는 사진마다 족족 인생샷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겨우 사진으로 입덕하는 사람이 있냐고 묻겠지만, 그건 정말 모르는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고도화된 피사체를 향한 애정은 사진 이상의 작품을 만들어 내는데, 문스트럭이 딱 그런 타입이었다.
물론 이런 거 없이도 데뷔할 승빈이지만, 그녀 역시도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그녀의 아이돌이 그러고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