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촬영이 끝나자마자 강도현이 당황한 얼굴로 다가왔다.
“왜 그쪽으로 나왔어?”
“동선 왼쪽으로 바뀐 거 아니었어? 분명 네 앞쪽으로 나오면 된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강도현은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었다.
“동선은 그대로 오른쪽이야. 대신에 센터 마지막 동작에서 팔 돌리는 걸 왼쪽으로 바꾸기로 한 건데.”
“뭐?”
“아무래도 병대가 잘못 알려 준 거 같은데?”
“일단 그럼 동선은 그대로라는 거지? 나 마지막 동작만 좀 봐줘.”
“응.”
솔직히 말해서 고의로 그런 게 뻔했지만, 다른 연습생들의 촬영까지 망칠 수는 없었다. 일단 수정된 안무를 익히는 것이 우선이었다.
다행히 다른 연습생 안무 촬영은 문제없이 지나갔다. 촬영을 마치고 김병대에게 향했다.
“병대야 혹시 수정 안무 잘못 알려 준 거야?”
“네? 그게 무슨……?”
“동선은 그대로고 동작 방향만 달라지는 거였다는데.”
“네, 그렇게 알려 드렸잖아요.”
“뭐?”
사과라도 했으면 얘도 헷갈려서 동선이랑 방향을 바꿔서 얘기한 거였구나 하고 넘어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결백한 표정으로 자신은 제대로 알려 줬다고 거짓말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 형 아직 몸 상태 안 좋은가 봐. 분명 제대로 알려 드렸는데 헷갈리신 거 같네?”
“야, 김병대.”
“죄송해요, 제가 더 반복해서 알려 줘야 했는데 시간이 너무 없어서…….”
“그래, 승빈아. 설마 병대가 일부러 잘못 알려 줬겠어?”
성재 형은 분위기를 상쇄시키려고 한 말이었겠지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김병대가 더 뻔뻔하게 나왔으니까.
“제가 형이랑 도현이 형만큼 친하게 지내진 않았지만 그래도 같이 연습한 시간이 얼마인데……. 설마 진짜 제가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오히려 내가 사과를 하도록 상황을 만들고 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으로 의심받은 것이 충격이라는 듯 울먹이기까지 한다. 더 놔뒀다가는 카메라에 찍히는 건 시간문제고, 다른 연습생들의 오해를 받기 딱 좋았다.
결국 말없이 자리를 피했다. 잘못도 아닌 일에 고개 숙이고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22살의 문승빈이었다면, 그냥 뭐 밟았다고 생각하고 웃으며 넘어갔을 것이다. 일을 키우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럴 땐 18살처럼 굴고 싶었다. 그리고 김병대의 거짓말을 증명할 증거도 이미 존재했기에 내가 아쉬운 건 없었다.
“김병대랑 싸웠어?”
“그럴 뻔했지?”
“괜찮아?”
“응.”
“센터 영상 아까워서 어떻게 해?”
“단체 곡 센터 열심히 해야지 뭐.”
센터 영상을 망쳤다는 것보다도 아파서 부재한 걸 이용했다는 게 더 화가 났다. 만약 내가 처음으로 하지 않았다면? 욕먹는 건 둘째 치고, 다른 연습생한테 피해까지 줬을 거다.
“이제 센터 촬영 영상 다 같이 보면서 투표하자.”
연습생들이 한데 모여 영상 평가를 시작했다. 그런데 안무 잘못 알려 준 건 양반이었다.
“이거 승빈이 영상 맞지?”
“병대야, 너 너무 열심히 한 거 아니야?”
“병대 시강 무슨 일이야-”
“그냥 평소처럼 한 건데요? 제가 눈에 띄나 보죠.”
센터 평가 영상은 암묵적으로 센터에 있는 연습생에게 집중되도록 안무 강도를 낮춰서 춘다. 근데 김병대는 체감상 자기 영상 촬영 때보다 더 빡세게 춤을 추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하는데, 센터 킬링 파트에서 모두 안무만 하고 있을 때, 온갖 제스처를 한 것이다.
‘이건 진짜 아니지 않나?’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웠다. 4위를 했으면 굳혀 가기에 전념하기도 모자란 시간에 이런 어그로를 끌다니, 윤 피디가 어떤 방법으로든 쉴드를 쳐 줄게 분명하지만 이미 여러 번 대중에 의해 밝혀진 전적이 있는데. 미련하다. 지금의 기분에 취해서 미래는 생각도 안 하고 들떠 있는데, 어린 건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전체 영상에서 그랬다면 원래 그런 거라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는데 정말 내 영상에서만 그랬다.
‘나쁜 짓을 멍청하게 하니까 더 열받네?’
선우 형도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작게 귓속말했다.
“야, 김병대 이거 고의 아니야?”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할 뿐 별말 하지 않았다. 꼬리가 길면 잡히기 마련이다. 나는 상황을 관망하다가 원하는 방향으로 손을 보기만 하면 된다.
센터로는 지운이 형이 선발됐다. 짧은 시간 연습한 거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안무 습득력이었다. 이쯤 되면 한 번쯤은 센터가 될 법도 한데 김병대도 참 하늘이 안 도와준다.
* * *
사실 갑자기 김병대가 연습을 도와준다고 할 때부터 이상하긴 했다. 그래도 빨리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연습실 한쪽에 미니 카메라를 두고 녹화 버튼을 눌러놨다. 영상을 돌려 보면서 혼자 연습하기 위해 거울에 비친 모습을 찍으려고 둔 거였는데, 이렇게 쓰게 될 줄이야.
티벡스 시절에 스태프가 부족해 자체 콘텐츠나 안무 연습 영상도 우리가 알아서 촬영해서, 카메라 다루는 건 익숙했다. 오죽했으면 제2의 길로 카메라 쪽을 하려고 했을까. 연습을 마치고 쉬는 시간에 카메라에 찍힌 영상을 다시 확인했다. 먼저 도와주겠다고 하는 장면부터 틀린 안무를 알려 주는 것까지 모든 장면이 완벽하게 찍혀 있었다.
“거기서 원래 오른쪽으로 이동했잖아? 근데 이번에 왼쪽으로 동선을 이동하기로 했어.”
“그럼 내 기준으로 강도현 앞쪽으로 오면 된다는 거지?”
“응, 역시 형은 한 번에 이해하네.”
“고맙다, 병대야. 너도 연습하느라 바쁠 텐데.”
“뭘, 이 정도로.”
다시 보니 더 가증스럽네. 아마 나중에 본방송 편집 과정에서는 연습실 자체 카메라에 찍힌 김병대가 나를 도와준 분량은 아예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냥 내가 안무 숙지를 못 해서 틀린 거로 나오겠지. 더 재수 없으면 아파서 연습에 불참한 내용도 생략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비교적 윤 피디가 신경 쓰지 못하는 곳에 보내면 된다.
“김 작가님!”
“승빈 연습생,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아니요, 그건 아니고 미니 카메라에 애들하고 숙소에서랑, 연습실에서 모습 좀 찍었거든요. 이번에 비하인드 공개할 때 들어가면 재밌을 거 같아서요.”
“그래요? 팬들이 좋아하겠네-”
“네! 꼭 넣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알았어요. 이따가 콘텐츠 팀 담당자한테 전달할게요.”
“감사합니다!”
윤 피디는 계산적인 사람이니 아마 조작이나 밀어주기 같은 내용을 다른 스태프들에게는 공유하지 않았을 거다. 그 인간이 누굴 믿겠어. 아마 그때 계단에서 얘기하던 사람 정도가 윤 피디의 계획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겠지. 게다가 이제 파이널 준비로 정신이 없을 테니, 그 허점을 노리기로 했다.
전후 사정을 잘 모르는 곳에서는 김병대가 새롭게 인기 얻고 있는 연습생인 것만 알 테니 분명 그 장면을 포함시킬 것이다. 뭐, 아픈 형을 위해 자기 시간을 쪼개서 도와주는 착한 동생 이미지를 만들어 줄 수도 있는 거고.
* * *
“야, 나 구라 아니고 진짜 토할 거 같아.”
“나도 떨린다…….”
3차 순발식을 앞두고 문스트럭과 K는 온몸으로 긴장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A는 또 야근으로 오지 못해서 둘이서만 3차 순발식을 보게 됐다.
문스트럭과 K 모두 일주일 내내 오늘 순위 생각만 하고 살았다. 우선 문스트럭은 악편 때문에 승빈의 순위가 심하게 하락했을까 봐 걱정이었다. K에게 있어서 오늘 순위는 2차 순위가 반짝 인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지표였다.
먼저 3차 경연 결과가 방송됐다. 팀 1위는 몽환 콘셉의 ‘로즈’ 팀이었다. 그리고 팀 내 1위는 문승빈이었다. 일단 팀 베네핏 10,000표에 1위 20,000표까지 총 30,000표의 베네핏은 확보한 것이다.
-몽환팀은 킹정이지
-진짜 레전드 무대였음;;
-근데 문승빈이 왜 1위냐? 재봉이가 더 잘했는데 2등이네.
┕너... 뭐 돼?
“아, 진짜 다행이다.”
“지운이도 베네핏 받았으니까 데뷔권은 안정적으로 들어가겠다. 휴-”
전체 투표수 1위는 강도현이었다. 이견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지난번 1위를 놓친 것을 두고 조롱하는 사람은 빼고.
“강도현이 1위 하겠네.”
-무대는 몽환팀이었지만 개개인 능력치로는 도현이가 압도적이었음ㅇㅇ
-도현이 다시 1위하겠네ㅠㅜㅜ
┕근데 베네핏 받아서 1등 하는 것도 가오 떨어지지 않나요?
┕가세요. 지팡이도 부러뜨리기 전에.
“투마월 시즌 2, 대망의 세 번째 순위 발표식. 지금 시작합니다!”
3차 순발식 통과 인원도 시즌 1과 달랐다. 18명으로 줄어들었다.
문스트럭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10화 악편으로 대중 반응은 물론, 같이 몽환 팀을 했던 연습생의 팬덤 내에서도 고의적으로 문승빈을 빼고 투표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7위라도 좋으니 데뷔권에만 있어 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17위, 김형석 연습생!”
“와, 형석이 엄청 올랐네-”
-형석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형석이는 맨날 문 닫고 합격하넼ㅋㅋㅋㅋㅋㅋ
┕효자임ㅇㅇ
┕정신승리ㄷㄷ
-형석이 서사 미쳤다;; 데뷔까지 하면 완벽할 듯?
15위 정세찬까지 발표되고 문스트럭과 K는 같은 생각이었다.
“견제표…….”
“큰일이네.”
2차 순위 30위와 하위권이었던 연습생들의 순위가 대폭 상승하는 것을 보면서 둘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견제표 무슨 일이냐?
-형석이는 그렇다 치고, 정세찬은ㅋ...
┕세찬이가 뭐;;
┕청예즈 낙하산도 정도가 있짘ㅋㅋㅋㅋ
-ㅈㄴ견제한다고 지 최애랑 아무나 뽑은 것들아 속 시원하냐?
┕김형석, 정세찬 팬들 비가시화를 멈춰주세요;;
10위가 발표될 때까지 문승빈과 차지운이 나오지 않았다. 문스트럭은 최악의 경우는 피했다고 내심 안심했다.
쉬어가는 타임으로 [투마월 배 운동회] VCR이 나왔다.
“각자 팀 이름 소개해 주세요!”
“저희는 정유현, 박선우. 정박즈입니다!”
“몽환 팀입니다.”
“화이트 팀입니다!”
-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섹시팀만 따로 지어온거야?
┕유현이 표정 안 좋앜ㅋㅋㅋ
┕백퍼 박선우가 저렇게 짓자고 했을 듯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 게시판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바로 다음 장면으로 쉬는 시간 팀 이름으로 회의 중인 섹시 팀의 모습이 나왔다.
“정박즈 어때요?”
“그냥 핑크 팀이나 섹시 팀 하면 안 돼?”
“아, 형! 너무 지루하잖아요- 정유현, 박선우. 정박즈 얼마나 좋아요?”
“그닥-”
“다른 팀은 우리보다 더 이상한 거 가지고 올걸요?”
“이상한 건 아는구나?”
“그런 뜻이 아니라~ 우리 정도는 양반이다, 이거죠~”
[박선우 연습생이 원망스러운 정유현 연습생]
-정유현 표정 굳을만했넼ㅋㅋㅋㅋㅋㅋㅋㅋ
-하긴 청량팀에 이성재가 있는데 안 지어올 거라고 생각했겠냐곸ㅋㅋㅋ
-아니 근데 설득당한 정유현도 너무 웃겨
┕유현이 은근 웃수저임.
┕은은한 망신살 순간들 볼 때마다 너무 웃겨
경기가 시작되고 문스트럭과 K는 문승빈과 차지운이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앓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