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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77화 (77/346)

77화

“이곳을 벗어나, 한 번 더 빛이나, 잠든 꿈이 깨어나. 내 앞을 비출 사람은, 그 누구도 없어. 스스로 빛을 내, 샤인 어게인.”

“오…….”

강도현이 한 말이 이해됐다. 분명 같은 멜로디에 같은 글자 수를 말하고 있는데 강약 조절, 박자, 플로우가 여유로웠다. 심지어 중간에는 엇박으로 들어가는 여유까지 보였다.

“벗어나, 빛이나, 깨어나 이 세 문장이 라임으로 연결되는 거잖아? 그럼 여기 부분 할 때 좀 더 강세를 넣어서 하면 돼.”

“벗!어나 빛이!나 깨어나!”

“……?”

“…아닌가?”

고개를 숙인 강도현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내가 들어도 절대음감 게임 하는 거 같았다. 서바이벌 시작하고 제일 민망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부끄러움쯤이야. 뻔뻔하게 녹음 버튼을 눌렀다.

“야, 다시 해 봐. 녹음 좀 하자.”

“녹음까지 한다고?”

“어, 이미 녹음 버튼 눌렀거든? 빨리해.”

다짜고짜 핸드폰을 들이밀자 당황스러운지 여러 핑계를 대던 강도현이 랩을 시작했다.

“이곳을 벗어나, 한 번 더 빛이나, 잠든 꿈이… 아이고, 까먹었네.”

“아, 장난치지 말고- 다시 녹음한다?”

“넵.”

장난치려고 드릉드릉하는 게 눈에 훤해서 걱정한 것과는 달리 다음은 완벽하게 해냈다.

“이곳을 벗어나, 한 번 더 빛이나, 잠든 꿈이 깨어나. 내 앞을 비출 사람은, 그 누구도 없어. 스스로 빛을 내, 샤인 어게인.”

그런데 이번엔 내가 문제였다.

“야, 근데… 녹음 버튼 안 누름.”

“내가 문승빈 때문에 몇 번을 녹음하는 거냐. 너 때문에 목 다 나가면 나는-”

“아, 휴가 나가면 치킨 사 줄게.”

“오케이, 빨리 녹음 버튼 눌러.”

“응.”

겨우 녹음을 다 마치고 무사히 저장까지 했다. 그런데 강도현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한다.

“야, 근데 이제 휴가가 있냐?”

“그야… 없지.”

강도현이 눈치채기 전에 급하게 짐을 챙겼다.

“그럼 아까 약속은-”

“고맙다, 도현아. 나 정말 훌륭한 래퍼가 될게.”

“야, 이 사기꾼아!”

답지 않게 소리 지르는 강도현을 뒤로하고 연습실을 빠져나왔다. 뭐, 데뷔하게 되면 그때 야식으로 한번 사 줘야겠다.

* * *

한바탕 추격전을 마치고 다시 강도현에게 랩 레슨을 받으면서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이 정도 되면 노래 상태창이 떠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연습하던 중에 노래 상태창이 등장했는데, 아직도 감감무소식이다. 안 그래도 처음 도전하는 랩이라서 상태창의 도움이 절실한데, 상태창도 도와주지 않는다니.

“야, 문승빈.”

“…….”

“집중 좀 하지?”

하여간 눈치 하나는 빠른 놈이다.

“미안, 다시 해 볼게.”

“이번에도 틀리면 치킨에서 안 끝난다?”

“그런 게 어디 있냐?”

“여기 있다, 왜.”

순간 너무 유치해서 온몸에 소름이 돋을 뻔했다. 머쓱하게 웃어 보이고 배운 부분을 다시 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큰 실수 없이 마쳤고, 강도현도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야, 전보다 훨씬 낫네!”

“진짜?”

“어, 물론 갈 길이 멀지만?”

“뭐야 이건, 잘했다는 거야 못 했다는 거야?”

“객관적으로 잘하는 건 아니지?”

‘쓸데없이 솔직한 X끼…….’

틀린 말도 아니어서 뭐라 반박할 것도 없었다. 빨리 노래 상태창이 나타나서 포인트를 확 올리고 싶다. 랩이라는 생소한 영역에서도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지만.

“연습하고 있어, 난 잠깐 화장실 좀.”

“어, 그래.”

강도현이 자리를 뜨고, 녹음 파일을 반복 재생했다.

“벗어나, 빛이나, 깨어나… 아, 뭔가 더 쫀득하게 발음해야 하는데.”

“되게 열심히 하네요, 형?”

고개를 들어 보니 김병대가 서 있었다. 시비 걸려고 드릉거리는 모양새가 진짜 꼴 보기 싫었다. 지금 당장 회귀할 기회를 준다면 김병대 얼굴에 주먹을 한 번 꽂고 10분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 열심히 해야지.”

솔직히 이때 멈췄으면 나도 그냥 지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언제나 그랬듯 선을 넘는 건 김병대였다.

“근데 형은… 제대로 하는 게 없네요?”

“뭐?”

‘이 X끼가 뭘 잘못 먹었나?’

어이가 없어 빤히 쳐다보자 어깨를 으쓱한다. 강도현이랑 연습하면서는 컨디션이 나쁜 걸 느낄 새 없이 집중해서 몰랐는데, 갑자기 두통이 밀려왔다. 어쩜 이런 때만 놓치지 않고 사람 성질을 긁는 거지? 저것도 재주다 진짜.

“이번에도 도현이 형이 도와주고, 형은 혼자서 할 줄 아는 게 없나 봐요? 연습생 때도 그러더니.”

“허…….”

뻔뻔한 태도에 할 말을 잃었다. 지금 누구 덕분에 이 생고생을 하고 있는데? 연습생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다 정해진 파트를 갑자기 하루아침에 김병대에게 뺏긴 적이 있었다. 그때도 김병대가 더 잘 어울린다, 너는 새로운 파트를 해 봐야 한다는 이유였지만 허울 좋은 거짓말이었다. 갑자기 바뀐 파트로 인해 강도현을 비롯한 다른 연습생의 도움을 받았는데, 얘 그때도 똑같이 말했었지?

“형은… 제대로 하는 게 없네요?”

찌릿한 느낌과 함께 데자뷔를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노래 상태창이 등장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UPDATE : 상태창 재부팅을 시작합니다. (1%…….)]

‘업데이트? 재부팅?’

[UPDATE : 상태창 재부팅을 시작합니다. (58%…….)]

앞에서 김병대가 뭐라고 지껄이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충 연습생 때도 강도현빨 받았다는 얘기인 거 같은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다.

[UPDATE : 상태창 재부팅을 시작합니다. (…100%)]

[재부팅 완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노 게이지가 최대치를 찍고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오히려 김병대에게 고마워졌다. 생각해 보니 상태창은 과거와 관련된 인물과의 사건이 발생할 때면 변화가 생겼다. 그런데 지금까지 김병대와 관련해서 상태창 변화나, 새로운 상태창의 등장이 없던 게 의아하긴 했다. 이게 여기서 나올 줄이야.

“어, 그래, 병대야. 응, 너도 수고해!”

“네?”

김병대의 어깨를 두드리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타격 하나 입지 않았다는 내 태도에 김병대는 당황스러워 보였다.

“왜, 뭐 문제 있어?”

얼빠진 얼굴을 보니 속이 다 시원했다. 고맙다고까지 했으면 공포스러워했을지도 모르겠다.

“뭐야…….”

김병대는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김병대가 떠나고 상태창을 제대로 확인했다.

[제목: 샤인(Shine)]

-랩: ■□□□□

-안무: ■■■□□

‘뭐야?’

상태창이 바뀌어 있었다. 그동안 떴던 팝업 창은 분명 ‘노래’ 포인트였는데 ‘랩’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도 한 칸은 채워져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나도 안 채워져 있으면 정말 막막했을 텐데, 도현 스쿨의 효과가 꽤 먹혔나 보다. 때마침 강도현이 돌아왔고, 나는 신줏단지 모시듯 강도현을 깍듯이 대했다.

“도현아, 넌 정말 천재다.”

“뭔 소리야, 갑자기?”

“정말 너 같은 애가 내 친구라니…….”

“뭐야, 또 뭐가 필요한데-”

“정말 넌 랩의 신이야.”

“오버한다.”

더 오버하다간 벌써 뒷걸음칠 준비하는 강도현이 무서워서 랩 코치를 안 해 줄지도. 이쯤하고 나중에 매점 순회공연이라도 시켜 줘야겠다.

“네 꺼 녹음본 한 백 번 따라 하니까 좀 잡히더라고.”

“그렇다고 너무 녹음에만 의존하지는 말고.”

“당연하지. 야, 근데 발음을 좀 더 쫀득하게 하는 방법은 없냐?”

강도현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물었다.

“너 근데 진짜 많이 뻔뻔해졌다?”

“욕이냐?”

“아니? 연습생 할 때나, 서바이벌 초반에는 모르는 거 물어보는 거 되게 자존심 상해했잖아.”

“그게 밥 먹여 주냐? 그리고 원래 배움엔 자존심이 없는 거란다.”

“이럴 때 보면 동갑 아닌 거 같다니까?”

순간 흠칫했다. 물론 내가 강도현과 동갑이긴 하지만, 다른 의미로는 동갑이 아니니까.

“너 혹시…….”

강도현이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뭐야,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요즘 책 읽냐?”

“풉!”

너무 어이없어서 사레가 들렸다. 정신없이 기침을 했다. 그럼 그렇지. 아니, 근데 아무리 그래도 저런 말 했다고 책 읽냐니, 그동안 나를 어떻게 생각한 거야? 물론 책을 안 읽긴 했다. 하지만 그건 다 똑같지 않겠는가? 누가 서바이벌에 책을 가지고 와?

“되게 지운이 형이 할 법한 말을 하길래- 그 형 책 엄청 읽잖아.”

“아…….”

그걸 지운이 형이 해내네.

“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알려 줘. 나 오늘 도현 스쿨 뽕 뽑고 갈 거니까.”

“일단 네가 발음을 뭉개면서 말하는 스타일은 아니니까 전달력은 좋은데, 너무 정직하단 말이지?”

‘노래랑 똑같네.’

저 말을 들었을 땐 살짝 소름이 돋았다. 몸에 밴 습관이 보컬에서만 해당하는 게 아니었다. 좋게 말하면 정석 스타일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지루하다는 것인데, 보컬이나 춤 역시 같은 지적을 받았던 것이 떠올랐다.

“발음을 좀 씹어야 할 필요가 있어.”

“발음을 씹어?”

“응, 입이랑 혀가 일정하게만 움직이면 랩이 단조롭게 들려. 너 나름대로 여러 방향으로 움직이고, 튕겨 보면서 소리를 씹어 보는 거야.”

“아, 노래 부를 때 발음 강조하는 것처럼?”

“쉽게 생각하면 그런 셈이지?”

강도현이 가사지에 포인트가 되고, 씹어야 할 부분을 체크해 줬다. 이 정도까지 도와줄 줄은 몰랐는데.

“됐다. 다 알려 준 거 같으니까 이제 알아서 연습하거라-”

“예, 감사합니다. 스승님!”

말도 안 되는 상황극을 하는데, 진짜 연습생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새삼 VM에서 데뷔하지 못한 회귀 전 과거가 아까웠다. 같이 데뷔했다면 지금처럼 좋은 동료가 되어 행복한 아이돌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랬다면 지운이 형을 만날 수 없었겠지.

상태창을 확인해 보니 그새 랩 포인트가 하나 더 채워져 있었다.

[제목: 샤인(Shine)]

-랩: ■■□□□

-안무: ■■■□□

이제 겨우 첫날인데 두 칸까지 채워졌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중간에 미션창이 떠 준다면 받은 포인트를 랩에 분배시키는 방법도 있으니까. 고비 하나를 넘기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 * *

파이널에 준비할 무대가 3개인 만큼, 연습 시간도 정말 촘촘하게 구성됐다. 팀 선정과 파트 선정을 끝내자마자 안무 연습 시간을 가지고, 잠시 개인 연습을 하고, 다시 단체 무대 연습 시간이 됐다. 파이널 날 무대를 헛갈리는 불상사를 저지르는 연습생이 한 명쯤은 나오지 않을까. 그게 내가 되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단체 곡 센터가 윤빈이랑 승빈이네?”

“삔이들이네!”

“삔이? 그게 뭐야?”

“윤빈, 승빈 빈이 겹치잖아요, 그래서 팔로워분들이 삔이들이라고 해요-”

연습생들 사이에서도 팔로워들이 정한 조합명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인터넷 반응을 잘 찾아 보지 않는 윤빈만 여전히 ‘삔이’의 뜻을 모르는 눈치였다. 경기장에서 눈부셔 무대를 한 이후로는 좀처럼 한 무대에서 보기 힘들었던 조합이긴 했다.

“그럼, 1절부터 봐 볼까?”

“네!”

“어유, 여기엔 데뷔권 애들이 4명이나 있네? 유현이도 있고.”

일사불란하게 대형을 잡았다. 노래가 시작됐고, 큰 문제 없이 무대를 마쳤다. 최성재 트레이너의 표정도 나쁘진 않았지만, 최고의 반응은 아니었다.

“음… 뭔가 조금 아쉬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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