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남 피디에게 지시를 내리던 윤 피디는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급하게 계단을 올라와 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비상구 문을 열어 보니 연습생 여럿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누가 잠깐 문을 열었던 걸까? 아니면 단순히 문밖에서 들려온 소리였을까? 찝찝했지만 별다른 특이점은 없어 보였다. 답지 않게 긴장했더니 별소리가 다 들리나 보네.
투표 결과를 확인해 보니 문승빈과 윤빈이 선발되었다. 하지만 문승빈은 정유현으로, 윤빈은 김병대로 바꿀 예정이었다.
‘골치 아프지만 어쩌겠어? 결과가 이렇다는데.’
리더로 적격인 정유현은 반드시 데뷔를 시켜야 하는데, 최근 순위가 너무 떨어져서 당황했다. 저렇게 영리하고 다루기 쉬운 애가 리더를 해야 앞으로가 편하니까 분량 좀 만들어 줘야지. 데뷔 조를 여기저기 써먹을 생각에 벌써 즐거운 그였다.
남 피디에게 조작된 결과로 발표를 하라고 전달하고 다시 촬영장으로 복귀하는 길에 마주한 김 작가가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어? 피디님, 센터 누가 됐어요? 승빈이? 지운이? 2절은 윤빈이가 압도적이라 윤빈이인 거 같구-”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네?”
순간 높아진 언성에 김 작가는 놀란 눈이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김 작가는 연습실에 남아 있던 인력이라 투표 결과를 알 리가 없었다. 그럼 어떤 멍청한 놈이 자기가 누굴 뽑았는지 나불거린 거지?
“아니, 연습생 애들 말하는 거 들어 보니까…….”
“한둘이 아니라는 거잖아?”
어떤 쥐새끼 같은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아까 그 대화를 들은 게 분명해졌다. 남 피디 저 멍청한 놈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굳어 있었다.
“윤 피디님, 저희 어떻게…….”
“어머! 남 피디님, 괜찮아요? 안색이-”
김 작가는 의아하다는 눈으로 남 피디를 걱정했다.
‘정말 쓸모라고는 먼지만큼도 없는 새끼.’
“남 피디가 어제 편집하느라 잠을 못 잤다고 하더라고.”
정신 못 차리는 놈을 대신해서 둘러대고, 김 작가를 촬영장으로 돌려보냈다.
* * *
윤 피디와 남 피디가 들어오고 윤승철에게 센터 후보가 담긴 종이를 건넸다.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워낙 독한 인물이니 끝까지 밀고 갔을 수도 있으니까.
“본 투 샤인 킬링 파트를 맡게 될 연습생은… 문승빈, 윤빈 연습생입니다!”
“역시!”
“둘은 인정할 수밖에 없지.”
긴장이 풀리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또 한고비 넘겼구나. 나도 모르는 사이 많이 긴장했는지 온몸의 근육이 살살 아파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애들 진짜 양심적이다.’
다 같이 말하게 하는 전략을 쓰면서도 분명 몇몇은 숨기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만약 나였다면? 다른 사람을 뽑았다고 했을 거 같다. 어쩔 수 없다. 의심도 직업병이지 뭐.
“나머지 파트 뽑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상위권 순위 연습생부터 뽑기에 참여해 주세요.”
연습생들은 순서대로 상자에서 종이를 뽑았다. 1절에는 나, 정유현, 박재봉, 지운이 형, 선우 형이, 2절에는 윤빈, 성재 형, 김병대, 강도현이 들어갔다.
“이제 본격적으로 파이널 경연을 위한 연습을 시작하겠습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최선을 다해 준비해 주시길 바랍니다!”
“네!”
단체 곡 킬링 파트로 선정되면서 오히려 유닛 곡은 랩 파트에 뽑힌 게 이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컬은 발라드 단체 곡과 본 투 샤인 무대에서 보여 주면 되고, 첫 번째가 유닛 무대일 테니 랩으로 색다른 매력을 보여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잘한다는 가정하에 가능한 얘기지만.
1절 안무는 지운이 형, 2절은 강도현의 주도로 연습이 시작됐다. 파이널 무대인 만큼 안무 난이도도 상당했다. 그나마 댄스 크루 경험이 있는 지운이 형이어서 단체 안무 지도에 능숙했다. 분량도 제대로 챙겨 갈 거 같아서 다행이었다.
[제목: 본 투 샤인]
-노래: ■■□□□
-안무: ■■□□□
“안무 숙지는 거의 된 거 같은데, 디테일한 부분은 점심 먹고 이어서 할까? 다들 노래 연습도 해야 하잖아.”
“좋아요!”
“연습하다가 안 되는 부분 있으면 부담 갖지 말고 꼭 물어보고.”
“당연하죠-”
순조로운 우리 팀과 달리, 2절 팀은 냉랭한 분위기였다. 대부분 뽑기로 정해진 파트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특히 센터를 놓친 김병대의 목소리가 가장 컸다.
“단체 곡 어차피 마음에 드는 파트도 아닌데 힘 뺄 필요 있나? 유닛 무대 연습이나 하지.”
‘센터가 되게 내버려 뒀으면 평생 후회했겠는걸?’
“다들 집중 좀 하자!”
참다못한 강도현이 경고했고, 연습실 분위기는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강도현이 화를 낼 만했다. 쟤도 거의 추임새에 가까운 파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상위권이라고 하지만 워낙 변수가 많은 생방송 순발식이기 때문에 무대 하나하나가 중요했다. 한숨을 쉬던 강도현이 연습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눈치를 보는 연습생들에게 윤빈이 말했다.
“모두 다 마음에 드는 파트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래도-”
“형은 센터니까!”
“뭐?”
“센터니까 파트 불만이 없겠죠. 아니에요?”
예전 VM 연습생 시절 버릇 어디 안 간다고. 4위로 순위 상승을 하더니 다시 기고만장해졌다.
“야, 병대야-”
처음으로 보는 윤빈의 정색이었다. 순위가 폭락한 순간에도 저렇게 표정이 굳은 적이 없었다. 윤빈의 반응에 김병대도 멈칫했다. 윤빈이 평소에는 웃는 얼굴상이니 그렇지, 무대 위에서나 무표정이면 지운이 형 못지않게 서늘했다.
“병대야, 너보다 파트 없는 도현이는 바보라서 열심히 하는 거야?”
“둘 다 진정하고, 잠깐 쉬었다가 하자. 병대 너는 사과하고.”
“…죄송합니다.”
“나보다 도현이한테 제대로 사과해.”
보다 못한 박재봉과 지운이 형이 윤빈을 데려왔다.
“저, 형이 그렇게 화내는 거 처음 봐요.”
“병대가 나쁜 애가 아니란 건 알지만, 저건 아니지, cross the line이야.”
“오- 크로스 더 라인~ 근데 그게 뭔 소리예요?”
“오~ 알고 감탄한 건 줄?”
“그러는 선우 형은 알아요?”
“선 넘었다는 거잖아, 맞지?”
“맞아요.”
“아, 형은 왜 굳이 어렵게 영어로 말해요?”
선우 형은 아는데, 자신은 몰랐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박재봉이 윤빈에게 핀잔을 줬다. 윤빈은 다시 허허실실로 돌아와서 달랬다.
“알았어. 다음부터는 한 번 더 번역해서 말할게.”
‘여기는 좀 풀린 거 같고, 강도현은 언제 돌아오지?’
강도현을 찾으러 나섰다. 화장실에도 없고, 매점에도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게실에 가 보니 거기 있었다.
“야, 여기 있었어?”
“뭐야?”
“아무리 그래도 연습 중에 그렇게 나가 버리면 어떻게 하냐? 카메라 안 돌고 있었으니 다행이었지.”
“하…….”
서바이벌 시작하고 이렇게 고민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내 파트 마음에 안 들거든?”
“하긴, 누가 마음에 들겠냐.”
파트도 추임새가 전부고, 안무 동선도 한두 번 빼고는 다 뒤에 몰려 있는데 당연하다.
“위로냐, 조롱이냐?”
“조롱이겠냐? 나,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닌데.”
피식 웃던 강도현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근데 파트랑 상관없이 후회 있는 무대를 남기는 게 싫어.”
마지막 월말 평가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그때도 강도현은 내가 ‘못했다’는 것에 화가 난 것이 아니라 ‘후회가 남을 무대를 한’ 것에 더 열받아했으니까.
“이 정도면 애들도 반성했을 거야. 너무 오래 나와 있어도 불편해지는 거 알지?”
“그래.”
연습실에 돌아와 보니, 연습이 한창이었다.
“어, 도현이 왔어?”
“네, 불쑥 나가서 죄송해요. 다들 미안해.”
먼저 사과하는 강도현의 모습에 도리어 뻘쭘해진 연습생들이었다.
“저희야말로 죄송해요. 앞으로 열심히 할게요.”
“고마워. 계속 연습하고 있었던 거 같은데…….”
“응! 우리 벌써 중간 부분 안무까지 했어-”
“그렇게나 많이요? 와, 남아서 연습해야 하는 건 나네.”
강도현의 농담에 분위기가 한결 나아졌다. 경쟁자이기도 하지만, 무대를 같이 꾸미는 사람끼리의 단합은 중요하다. 갈등을 그대로 뒀다면 1절을 하는 우리 팀이 더 돋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강도현의 말대로 후회가 남는 무대를 만드는 것은 싫었다. 저 팀도 최고의 무대를 준비해 주길 바랐다.
* * *
평화의 비둘기 역할 열심히 해 주고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파트 연습에 들어갔는데, 랩을 해 본 적이 있어야지.
“이곳을 벗어나, 한 번 더 빛이나. 어잠꾼으로-”
‘뭐 이렇게 비슷한 발음들이 많아?’
이렇게까지 입이 말을 듣지 않은 적이 있나 싶었다. 평소 그다지 웅냥냥거리는 말투도 아닌데, 짧은 박자 안에 가사는 왜 이리 많은지. 와중에 플로우에 딕션까지 챙겨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설상가상으로 몸 상태도 안 좋아지는 게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랩 파트 통보에 센터 조작 방지까지, 너무 많은 일이 순식간에 지나가서 긴장감에 온몸의 근육이 뭉친 느낌이었다.
“산 넘어 산이네.”
가이드랍시고 준 노래 샘플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니, 시그널송 때부터 느꼈지만, 도대체 가이드를 왜 이렇게 만드는 걸까? 스태프 중 하나가 불렀다고 해도 놀랍지 않은 퀄리티였다. 3차 경연처럼 나만의 스타일을 찾아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랩에 대한 경험치가 낮아도 너무 낮았다.
“야, 나 이 부분 좀 알려 줘.”
“오랜만이네? 네가 나한테 부탁하는 거.”
“요즘 도현 스쿨이 그렇게 용하다며.”
“어휴, 소문 듣고 오셨어요? 일단 한번 해 보세여.”
킬러 무대를 준비하던 날의 데자뷔를 느꼈다. 그때도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엉성한 모습이었는데.
“음…….”
랩을 들은 강도현의 표정이 복잡했다. 하긴, 총체적으로 문제면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지 막막할 거다.
“네가 어쨌든 노래를 좀 하잖아? 그래서 랩 할 때 톤이나 박자는 괜찮거든?”
“응.”
‘오, 웬일? 나 진짜 랩에 재능 있나?’
내심 기대감에 부풀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런데 느낌이 없어.”
“뭐?”
이게 무슨 개풀 뜯어 먹는 소리야? 라고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래, 랩 하는 사람들만의 ‘느낌’이라는 게 있나 보지?
“지금 가사를 박자에 끼워 맞추는 데 급급해서 노래 분위기랑도 전혀 안 맞거든? 솔직히 너도 부르면서 집중 안 되고 있지?”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강도현의 말대로 정해진 멜로디와 박자 안에 우다다 랩을 하다 보니, 숨 쉬는 구간은 까먹은 지 오래였다. 플로우? 그거까지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일단 내가 하는 거 들어 봐.”
얼마나 잘하는지 들어나 보자 싶었던 마음은, 강도현이 첫마디를 떼자마자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