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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75화 (75/346)

75화

산 넘어 산이라고 했던가, 유닛 곡이 어느 정도 정리되니 다음은 단체 댄스곡 ‘본 투 샤인’이었다.

“단체 곡의 파트 선정 기준은 뽑기로 정해집니다.”

“밀어내기가 아니고?”

“그럼 하위권한테도 기회가 있는 거네?”

“다만, 1절 후렴과 2절 후렴의 센터이자 킬링 파트는 자체 연습생 투표를 통해 정해집니다.”

“자체 투표?”

“그래서 앞으로 1시간의 연습 이후 킬링 파트를 먼저 선발하겠습니다. 최종 파트 분배는 그 이후에 확정될 것입니다.”

‘연습생 자체 투표?’

문득 의문이 들었다. 분명 회귀 전 시즌 2의 킬링 파트는 팔로워 투표를 통해 공개적으로 선발한 거로 기억하는데? 회귀하고 지금까지 서바이벌을 진행하면서 투표 방식이 바뀐 경우는 없었다. 또 무슨 변수가 발생하려고 이러는 거지? 불안감이 들었다.

나는 1절 킬링 파트에 도전하기로 했다. 1절은 ‘본’에서 따온 파트가 많아서, 유닛 곡인 ‘샤인’과는 다른 매력을 보여 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긴 시간 잠들어 있던

내 속에 꿈틀거리던

꿈들을 이제는 깨울 시간이야

다시 깨어나 태어나 빛이나]

‘깨어나 태어나 빛이나’에 맞춰 텃팅 동작과 함께 센터 포즈를 하는 것이 킬링파트의 하이라이트였다. 얼굴을 강조하는 동작이어서 표정 연기가 중요한 파트였다.

‘얼굴 포인트를 높여 놔서 다행이다.’

내 얼굴을 보면서 만족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건 또 새로운 기분이었다. 원래 얼굴이 나빴던 건 아니었지만, 미묘하게 거슬렸던 부분이 다 사라진 느낌이랄까. 남은 1포인트를 그냥 얼굴에 써 버리고 싶은 욕구를 겨우 참고 연습을 이어 갔다.

* * *

1시간의 연습이 끝나고 연습생들이 다시 모였다. 1절 지원자는 8명, 2절 지원자는 10명이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경쟁률 적은 파트에 지원하게 됐다.

‘웬일로 이런 운이?’

하지만 지원자에는 정유현과 강도현, 지운이 형이 있어서 마냥 쉽지만은 않겠다고 생각했다. 예상한 대로 센터 선발은 치열했다. 정유현은 보컬과 안무 모두 깔끔하게 소화했고, 강도현은 특유의 밝은 에너지가 킬링 파트와 잘 어울렸다. 지운이 형은 춤 선을 살려서 텃팅 동작이 더욱 돋보였다. 만약 센터로 선발이 못 된다고 하더라도 누구 하나 아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실력이었다.

“1절이 진짜 쟁쟁하네-”

2절 킬링 파트 선발전에서는 윤빈이 눈에 띄었다. 선우 형과 재봉이도 잘했지만 윤빈의 압도적인 피지컬이 한몫했다.

“윤빈이랑 딱이다.”

“그니까, 더 볼 필요 없을 거 같은데.”

“윤빈 다리 길이 5cm만 뺏어 오고 싶네.”

마지막 지원자는 김병대였다. 모두 새롭게 급부상한 김병대가 어떤 무대를 준비했는지 기대했다.

[어두웠던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 사라져

무대 위 조명보다도

밝게 빛날 나니까 본 투 샤인]

“음…….”

“잘하기는 하는데…….”

“윤빈이가 너무 셌다, 그치?”

윤빈의 임팩트를 이기기엔 부족했다. 여론은 거의 윤빈으로 확정되는 분위기였다.

“자, 그럼 자체 투표를 시작하겠습니다. 호명하는 연습생은 한 명씩 투표 장소로 가서 1, 2절 킬링 파트 연습생을 투표하면 됩니다.”

한 명씩 비밀 투표로 진행한다는 소리였는데, 뭔가 찜찜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일단은 지켜보자는 마음으로 투표 장소로 이동하려는데, 뜬금없이 윤 피디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비밀 투표인 만큼, 누가 뽑혔는지는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알 수 없겠죠?”

무슨 저런 당연한 소리를 하는 거지? 삐딱한 생각이 들었다. 문어대가리와 만났다는 얘기를 듣고 나니 윤 피디의 모든 행동이 의심스러웠다.

“문승빈 연습생, 투표 용지 여기 카메라에다 한번 보여 주세요. 샷 하나 딸게요.”

‘방송을 통해서 공개하려나 보네.’

그럼 그렇지, 투표 방식이 바뀌었다고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구나 싶었다. 투표 방식이 바뀌었다고 해서 ‘뭐, 조작 같은 걸 하는 건 아니겠지-’라고 생각했다. 우연히 윤 피디의 전화를 듣기 전까지는.

투표를 마치고 나오니 누나한테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실시간으로 대중들의 반응을 신경 쓰게 하려고 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파이널 합숙이 시작되면서부터는 장소에 상관없이 핸드폰 사용이 자유로워졌다. 그래도 뭐가 됐건 카메라에 불필요한 장면이 잡힐 필요는 없겠지.

서바이벌 내내 연락 한번 없더니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싶어 급하게 카메라 사각지대인 비상계단으로 들어간 게 화근이었다.

“투표 결과 영상 찍고 있어?”

“네, 지금 10명 정도 땄습니다.”

“그거 그냥 다 지워 버려.”

“네?”

‘저건 윤 피디 목소리인데?’

윤 피디와 누군가의 대화 소리가 들렸는데,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어차피 센터 할 애들 정해 놨어.”

“누구로 정하셨습니까?”

“1절은 정유현, 2절은 김병대로 갈 거야.”

역시나 센터 선정 방식이 바뀐 건 윤 피디의 의도적인 개입이었다. 시즌 4 때도 이런 식으로 센터를 조작한 거구나. 시즌 4 촬영 당시, 시그널송 촬영 현장에서 의도치 않게 연습생들의 대화를 엿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도 연습생 자체 투표로 시그널송 센터를 정했는데, 연습생 대부분이 센터로 뽑힌 연습생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야, 넌 센터로 누구 뽑았냐?”

“나? 김형준.”

“나도. 아니 이거 뭔가 이상하다니까? 애들끼리도 김형준 얘기가 제일 많았는데, 다른 애가 뽑힌 게 이해가 안 돼. 쟤가 센터 할 만큼의 임팩트가 있었나?”

“야야, 말조심해. 안 그래도 조작 관련해서 민감한데 설마 투표 결과에 손을 댔겠어?”

“그렇겠지? 근데 겁나 찝찝하단 말이지.”

“막말로 조작이어도 우리가 뭘 할 수 있냐. 밉보이지 않게 조심하자.”

그때는 그냥 센터가 못 미더운 연습생의 불평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조작이 이루어졌던 거다.

‘아직 연습생 투표가 끝나지 않았으니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데.’

머리가 복잡해지던 찰나, 눈치 없이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도 누나였다. 급하게 종료 버튼을 눌렀지만, 윤 피디의 대화 소리는 이미 멈춘 상태였다. 심장이 이렇게까지 뛸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뛰기 시작했고,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다행히 투표를 마치고 돌아다니는 연습생들 사이에 껴서 자연스럽게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윤 피디가 비상구 문을 열고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보였지만, 이내 자취를 감췄다.

‘큰일 날 뻔했네.’

* * *

연습실로 돌아왔지만, 연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윤 피디의 의심 없이 조작을 막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연습실 곳곳에 놓인 거치 캠이 보였다. 연습생끼리 자체적으로 분량을 만들어 보라는 취지로 놓였지만, 선뜻 활용하는 연습생은 몇 없었다. 보통은 그 앞에서 애교를 부리거나, 출퇴근할 때 인사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조작을 못 하게 말해 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거치 캠 앞으로 가서 아무 말이나 시작했다. 아마 뒤에서 보기에는 내가 혼자 뭔가를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바로 주변에 연습생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상위권 연습생의 분량은 방송이나 비하인드에 나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한 컷이라도 더 잡히려는 하이에나들의 향연이었다.

바로 내가 노린 포인트가 이거였다.

“승빈이 형, 뭐 해요?”

“나? 그냥 누구 투표했는지 얘한테만 말하고 있었지.”

“비밀 투표 아니에요?”

“어차피 투표도 끝났는데 뭐- 그리고 나도 얘한테만 말할 거야.”

“와, 형, 진짜 아이디어 대박.”

다들 분량이나 뽑자는 생각이 들었는지 자연스레 경계를 풀었다.

“그럼 저도 할래요!”

“나도 나도!”

“다음은 나다, 무조건.”

주변이 시끌벅적해지니 다른 연습생들의 관심이 쏠린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뭐야, 거기 뭐 재밌는 거 해?”

“뭔데?”

“제가 먼저 해 볼게요.”

“재봉아, 대신 마이크에 소리는 안 들어가게 조심해야 한다.”

“에이, 형. 그건 기본이죠.”

“설마 우리 재봉이가 형 뽑았을까 봐 그러지.”

“어? 형 지금 저 떠보는 거예요?”

“티 났냐? 아, 나 연기 잘하는데.”

박재봉에게 적당히 장난까지 쳐 주니 완전히 분위기가 이쪽으로 흘러왔다. 그렇게 한 명씩 카메라 앞에 자신의 선택을 속삭이고, 마침내 다가온 내 차례.

“저는 정유… 잠깐만!”

있는 힘껏 속삭였지만, 마이크를 막지는 않았다. 당연히 내가 정유현을 뽑았다는 게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순간 정적이 오갔고, 선우 형의 박장대소를 시작으로 현장의 있던 모두의 웃음이 터졌다.

“아, 뭐예요, 형! 비밀 투표라면서요!”

“아니, 아까 나한테는 그렇게 신신당부를 하더니.”

“문승빈 표정 봤냐고, 풉. 아 나 눈물 나-”

민망하다는 듯 얼굴을 가린 손을 살짝 내리고 반응을 살펴보니 잭팟이었다. 연습생은 물론이고 대기하던 작가들이며 카메라 감독까지 다들 난리가 났다. 특히 작가들은 대박인 장면 건졌다면서 카메라 감독에게 얼른 내 반응 클로즈업 따라고 재촉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럴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역시 센터 조작은 윤 피디의 독단적인 선택이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 다들 웃지 마요!”

“아니 근데 형, 유현이 형 뽑았어요? 완전 실망이다. 난 형 뽑았는데.”

“야, 뻥치지 마. 네가 날 뽑았다고?”

“와, 이 형 봐라. 저 형이랑 윤빈이 형 뽑았거든요?”

“오, 재봉이. 형 뽑아 준 거야?”

됐다. 윤빈까지 이 흐름에 자연스럽게 합세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얘기해도 되지 않나? 어차피 비밀 투표는 물 건너간 거 같은데.”

“그만 놀려요, 선우 형. 저 나머지 한 명은 누군지 말 안 할 거거든요!”

말은 이렇게 해도 속으로는 더 바람 잡아 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계획한 대로 흘러가고 있다. 다른 연습생들도 누굴 뽑았는지 자연스럽게 공개하는 분위기가 됐고, 아예 작가들이 신나서 고백의 판을 깔아 줬다. 친한 연습생을 뽑아 줬지만, 그 연습생은 자신을 안 뽑았다는 걸 알고 좌절한 연습생, 예상치 못한 상대에게 선택을 받은 연습생 등 다양한 반응에 다들 재미있어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정말 김병대를 많이 뽑았다면 조작 없이도 센터를 할 운명인 거고, 아니라면 연습생들이 모두 패를 깐 상황에서 쉽게 조작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대충 얘기를 들어 보니 1절 센터는 나와 지운이 형의 이름이 많았고, 2절 센터는 압도적으로 윤빈이었다. 이렇게 된 상황에서 뜬금없이 김병대가 센터가 된다면 다들 의문을 가질 거다. 이제 겨우 18명 남은 상태에서 센터 표가 갈려 봐야 얼마나 갈리겠는가.

게다가 최근 투마월의 아류작인 다른 서바이벌에서 여러 조작 논란이 터질 때도, 투마월은 절대 조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해 왔다. 원조의 자부심을 지키겠다는 거였다. 그렇기에 이런 상황에서까지 조작하는 건 제아무리 윤 피디라 해도 쉽지 않을 것이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뒤늦게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나, 무슨 일로 전화함?”

“죽을래? 누가 내 전화 씹으래.”

“아, 나 촬영 중이라.”

“너 진짜로 투마월인가 그거 나갔냐?”

“그거 때문에 전화한 거임?”

“아무리 우리 집이 자유분방해도 그렇지, 말도 없이 나가냐?”

“엄마 아빠도 아셔?”

“아니? 딱 봐도 데뷔 못 할 거 같아서 아직 얘기 안 했는데?”

“다음 주가 파이널인데, 그것 참 고맙다, 이 인간아.”

“이게 누나한테!”

지금 누구는 자기 전화 때문에 생사가 오갈 뻔했는데, 이런 덕담까지 해 주시다니. 역시 문해빈다웠다. 4년 전도 후도 정말 한결같은 우리 누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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