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3차 경연 팀끼리 모여서 촬영 장소로 이동했다. 강당 문을 여니 화려한 디자인의 현수막이 보였다.
[투마월 배 체육 대회]
“와, 디자인…….”
할 말을 잃게 하는 디자인이었다. 깨져 버린 폰트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색 조합에 모두 당황했다.
“우리 나중에 데뷔하면 저 팀에서 디자인하는 거 아니겠지?”
“유현, 선우 형이 무조건 데뷔해야겠다.”
“모모 님, 보보 님. 듣고 계시나요?”
충격적인 현수막에 대한 감상이 다 사라지기도 전에 윤승철이 등장했다.
“다들 점심 맛있게 먹었죠? 저희가 오늘은 특별히 고기반찬을 더 많이 준비했는데, 눈치채셨나요?”
“…….”
점심시간까지만 해도 오랜만의 포식이라며 좋아했던 연습생들은 배신감을 느낀 듯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그래도 방송이라고 형식적인 리액션은 했지만 순발식 바로 전날에 체육 대회라니. 끝까지 분량을 뽑아 먹겠다는 제작진의 강렬한 의지가 느껴졌다.
“하하, 오늘은 여러분의 체력과 팀 단합을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팀에게는 역시 상품이 있겠죠?”
“와!”
“상품은 운동회가 끝나고 발표하겠습니다! 첫 번째 게임은 바로, ‘이인삼각’입니다!”
“이인삼각?”
뜻밖의 종목에 연습생들이 웅성거렸다.
“팀마다 선발된 대표 선수 두 명이 참여합니다. 저기 보이는 깃발을 찍고 가장 먼저 돌아오는 팀이 이기는 게임입니다. 1등은 5점, 2등은 3점, 3등은 1점을 부여하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10분 동안 선발 선수를 뽑는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윤승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인삼각 해 본 사람?”
“나 체육 대회 때 한 번 해 봤어.”
“근데 키 차이가 얼마 안 나는 사람끼리 해야 유리하지 않을까?”
“그럼 지운이 형이랑 승빈이 형이 할래요? 그나마 형이 지운이 형이랑 비슷한 거 같은데.”
선발 멤버는 빠르게 정해졌다. 남은 시간 동안은 합을 맞춰 봤는데 걱정보다는 합이 꽤 잘 맞았다. 박재봉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와, 누가 보면 같은 팀으로 데뷔한 줄 알겠어요. 처음 하는데도 되게 잘 맞네요?”
그 말을 듣고 나니 나도 신기했다. 같은 팀 멤버였던 게 이렇게 팀워크로 티가 날 수도 있는 건가?
짧은 연습 시간을 끝으로 출발선 앞에 섰다. 상대 팀을 보니 섹시 팀은 선우 형과 정유현, 힙합은 강도현과 김병대, 청량은 김형석과 성재 형이었다.
“각 팀, 각오 한마디씩 들어 볼게요! 먼저 몽환 팀부터.”
“저희 위기 대처 영상 보셨죠? 팀워크 하나는 자신 있습니다!”
다음으로 선우 형이 정유현의 손을 치켜들고 외쳤다. 아직 친한 사이는 아닌 듯 정유현은 어색해 보였다.
“형아들의 카리스마를 보여 주겠습니다!”
강도현이 자신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VM즈의 단합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성재 형이 외쳤다.
“애들아, 살살하자!”
예상치 못한 한마디에 연습생들은 모두 웃음이 터졌다. 한 명씩 가까이서 찍던 카메라맨도 웃음을 참을 수 없는지, 카메라를 든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삑-!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경기가 시작됐다.
“와! 몽환팀 파이팅!”
“선우 형, 달려요!”
“강도현 잘한다!”
“성재 형, 벌써 지치면 안 돼요!”
나와 지운이 형은 빠르게 달리는 것보다 정확하게 발을 맞추는 것에 집중했다. 어차피 초반 속도를 내어도 뒤에 가서 스텝이 무너진다면, 더 오래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부터 선두를 달리던 강도현과 김병대의 스텝이 꼬이면서 반환점에서 넘어졌다.
“VM즈가 선두를 달리다가 넘어졌네요! 그 뒤로 섹시 팀이 빠르게 선두를 차지합니다!”
선우 형과 정유현은 내내 쫑알거리면서도 희한하게 한 번을 삐끗하지 않았다.
“오른발이 먼저라니까?”
“넌 왼쪽, 오른쪽 구분도 못 하냐?”
“아 왼발이었네?”
“오른발이다, 바보야.”
“이 형이 장난하나?”
섹시 팀 다음으로는 우리 팀이 앞서고 있었다. 지운이 형이 물었다.
“우리도 좀 빨리 갈까?”
“그럴까요?”
스텝은 안정적으로 고정이 됐으니 속도를 조금 높여도 되겠다고 판단했다. 하나, 둘 구령을 맞추며 조금씩 달렸다. 휘청거리는 순간도 있었고, 속도가 맞지 않아 주춤하기도 했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어느새 섹시 팀과 엇비슷한 위치까지 왔다.
순간 욕심이 났다. 여기서 조금만 더 빨리 가면 1등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마음이 앞섰고, 형과의 스텝이 엇갈렸다. 형의 몸이 크게 기우뚱했고,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형, 미안해요. 급하게 가느라-”
잠깐 뒤를 보던 형이 씩 웃으며 말했다.
“다시 처음부터 맞춰 보자. 우리 아직 2등이야.”
“네!”
다시 타이밍을 맞춰 걸어갔다. 그리고 2등으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간발의 차이여서 더 아쉬웠다. 지운이 형에게 사과하자 형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안 넘어지고 완주한 것도 대단한 거야. 오히려 중간에 내가 멈춰서 미안해.”
형이 멈추고 자세를 다시 잡았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 티벡스 시절에도 그랬다. 난 눈앞의 성과가 더 중요해서 혼자 달려가곤 했다. 그러다 지치거나 넘어져서 그 자리에 있으면 항상 형은 형의 속도로 달려왔다. 그런 형이 처음으로 주저앉았을 때, 나는 또 혼자 살겠다고 달려갔었다. 비로소 같이 달릴 수 있는 지금, 다시는 오늘처럼 혼자 달려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3등은 청량 팀, 다음으로는 힙합 팀과 큐트 팀이 순서대로 들어왔다. 성재 형과 김형석은 뜻밖의 선전에 기뻐했다. 물론 다리가 아직 묶여 있다는 걸 까먹고 둘 다 방방 뛰다가 넘어졌지만.
1등은 아니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형, 완전 잘했어요!”
“중간에 엄청 놀랐었잖아요. 괜찮아요?”
“응, 괜찮아.”
“옆 팀은 분위기 살벌하네…….”
재봉의 말에 고개를 돌려 보니, 힙합 팀의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왜 거기서 혼자 자빠지고 그래요, 형.”
“내가 분명 오른발부터 가자고 했는데 무시하고 먼저 달려간 건 너였어.”
“형은 남 탓 안 하면 말을 못 하나 봐요?”
“병대야, 겨우 이런 일로 서로 기분 상하지 말자?”
“그래서 형이 안 되는 거예요.”
“내가? 병대 네가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어처구니없는 말에 강도현은 아예 자리를 떴다. 옆에서 듣는 나도 어이가 없었다. 아직도 자기가 VM의 총애를 받는 연습생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물론 여기서 떨어져도 VM에서 데뷔할 가능성이 높다고는 하지만, 강도현에게 ‘그래서 안 된다.’는 말은 주제를 한참 넘은 소리였다. 잠시 쉬는 시간이라 카메라가 멈춰 있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둘 중 하나는 11화의 먹잇감이 됐을 것이다. 강도현이 이쪽으로 걸어오더니 하소연을 했다.
“아오, 쟤랑 데뷔 안 하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꼭 데뷔해야겠어.”
VM즈 케미가 갑자기 많아진 것도 회사의 강한 압력 때문이었다고 그러더니 꽤 스트레스 받는 모양이었다. 둘을 내보낸 이상 둘 다 데뷔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을 거다. 거기다가 이번에 같은 팀에서 무대를 준비하게 되었으니, 최대한 둘이 같이 붙어 있으라는 말을 귀에 피가 나도록 들었다는 거다.
“형, 넘어진 데는 괜찮아요?”
“응, 살짝 부딪힌 게 다야.”
“다행이다.”
“그래, 사람이 다칠 뻔했는데 이렇게 반응해야 하는 게 맞는 거 아니야? 고맙다 재봉아.”
“김병대는… 아니다, 괜찮아 보이네.”
“촬영 다시 들어갑니다!”
“다시 가 볼게요.”
“그래.”
두 번째 게임은 줄다리기였다. 하필이면 처음부터 피지컬 좋은 섹시 팀과 붙었다.
“기죽지 말자, 우린 지운이 형이 있다.”
“다들 길쭉해서 기죽어요…….”
“재봉아, 여기서 지면 선우 형 아마 서바이벌 끝나고 나서도 놀릴걸?”
풀 죽은 박재봉을 보면서 다시 기분이 이상했다. 그니까 저 왜소한 애가 그렇게 키가 큰다는 거잖아? 선우 형과 비슷한 신장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 놀릴 수 있을 때 많이 놀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진짜 목숨 걸고 할 거예요. 형들도 도와줘요.”
비장한 박재봉의 말에 모두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각 팀, 각오 한마디씩 들어 볼게요.”
“몽환 팀, 지더라도 잘 싸웠다고 생각하세요! 졌잘싸라는 말도 있잖아요?”
선우 형의 도발에 연습생들은 잠시 놀랐다가 환호했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이 뭔지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에 질세라 박재봉이 각오를 외쳤고, 현장 분위기는 뜨거워졌다.
“다들 다치지 말고 안전하게 하자!”
경기 시작 전에 모두 손을 모아 구호를 외쳤다.
삑-!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경기가 시작됐다. 역시 예상한 대로 피지컬만큼이나 파워도 엄청났다. 속절없이 끌려가는 건가 싶었는데, 점점 앞으로 가던 몸이 팽팽하게 멈췄다.
“뭐야?”
섹시 팀도 뜻밖의 경기 진행에 당황한 듯했다. 맨 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뒤쪽 상황을 알 수 없었다.
“재봉이 얼굴 터지겠다!”
“지운이 형 승부욕 무슨 일이야-”
잠시 숨 고를 틈에 힐끗 뒤를 봤다가 웃음이 터질 뻔했다. 박재봉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얼굴로 거의 드러누워 있었다. 그 앞의 지운이 형은 목이랑 얼굴 이마까지 핏발이 서 있었다. 저렇게 살기 가득한 눈은 처음이었다. 안 그래도 세게 생긴 사람이…….
“재봉군 얼굴이 토마토가 됐어요!”
“토마토가 문제가 아니라, 지금 터질까 봐 무섭습니다!”
언제 엠시 역할을 맡은 건지, 성재 형과 강도현의 만담이 시작됐다.
“윤빈 선수 당황했어요!”
“사실 섹시 팀은 쉬어 가는 게임으로 생각하고 나온 거였거든요- 근데 몽환 팀이 의외로 너무 잘하고 있으니 당황하는 게 당연하죠!”
“섹시 팀 기세가 꺾였어요!”
“깃발이 중앙에서 팽팽하게 멈춰 있습니다. 벌써 결승전 보는 기분인데요?”
“카운트다운 들어갔어요, 10, 9, 8!”
“어어, 섹시 팀 뒤쪽이 무너졌어요, 몽환 팀은 지금이 기회입니다!”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내서 몸을 뒤로 누였다. 응원하는 연습생들의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그 순간에 몰입했다.
“4, 3, 2, 1 게임 오버!”
“깃발이… 몽환 팀 쪽으로 향했습니다!”
“와!!!!”
분명 승리해서 기쁜데 팀은 초토화됐다. 다들 일렬로 도미노처럼 쓰러져 있었다. 특히 맨 뒤에 있던 박재봉은 거의 K.O 된 상태였다.
“몽환 팀 괜찮아요?”
“장렬하게 전사했어요!”
윤빈과 선우 형이 부축해 줘서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와중에도 박재봉은 다 꼬인 혀로 선우 형을 놀리고 있었다.
“하하……! 제가 이겼어요, 작은 고추가 맵다-”
“토마토가 고추 맵다고 하고 있으니까 되게 웃기네.”
“형은! 토마토한테도 진 거예여…….”
“똑바로 걷기나 해!”
술주정에 가까운 박재봉의 말은 마이크를 타고 꽤 큰 소리로 나왔고, 스태프들은 귀여워서 죽겠다는 듯 웃었다. 나와 지운이 형도 힘이 하나도 없었지만, 바람 빠진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다들 가지고 있던 체력을 다 써 버렸고, 결국 다음 청량 팀과의 대결에서 졌다. 그럼에도 다들 한 치의 아쉬움도 없어 보였다. 섹시 팀을 이겼다는 것은 이미 전체 1등보다도 중요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