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지난주에 우리 3차 경연 촬영했을 때, 이 실장님이 방송국에 왔었거든.”
“문어대가리가? 방송국에는 왜?”
“승빈이 너도 알 텐데 우리 회사 ‘루커스’ 선배님들이 컴백해서.”
“아-”
루커스. 명실상부 현재 대한민국 최고의 남자 아이돌이었다. 가끔 회사에서 마주칠 때면 저런 아이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지. 잘나가는 아이돌이었던 만큼, 문어대가리가 그렇게 애지중지할 수가 없었다.
“근데 중요한 건 그날 윤 피디랑 만난 거 같더라.”
“뭐라고?”
“그때 병대랑 무대 준비하는 데 이 실장님이 잠깐 들렀다 가셨거든. 근데 우리한테 걱정 말라고, 너네는 무대만 잘하면 된다고 하는데 뭔가 뉘앙스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대충 사이즈가 나왔다. 문어대가리 그 새끼가 기어코 내 앞길을 막는구나. 애초에 강도현이랑 김병대한테도 나에 대해 거짓말을 해서 서바이벌에 참여시킨 놈이었다. 지금까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서 방심하고 있던 게 잘못이었다. 실제 무대 순서는 힙합 팀이 먼저였는데, 우리 팀 다음으로 뺀 거부터 편집까지 윤 피디랑 모종의 거래를 한 게 분명했다.
‘문어대가리 새끼가 끝까지.’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극도의 분노를 느끼고 나니 오히려 머리가 좀 식었다. 자기 잘못도 아닌데 어쩔 줄 몰라 하는 강도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이 자리에는 강도현과 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지운이 형, 선우 형, 재봉이 모두가 데뷔권인 사람들이었다. 즉, 강도현이 방금 한 말은 굉장히 위험한 발언이었다. 자칫하면 VM에서 자기네 연습생들을 위해서 투마월 제작진과 뭔가 거래를 했다는 것처럼 들릴 수 있으니까. 그리고 아마 그게 사실이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을 연 게 강도현답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게 있었다. 그리고 의외로 그게 나를 진정시켰다.
“하차해야 할까?”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고, 장난스러운 말투로 넌지시 운을 띄워 보았다.
“하차? 그게 무슨 소리야?”
“이미지가 더 나빠지기 전에 하차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네.”
“문승빈, 정신 차려. 네가 지금 사람을 팼어, 아니면 무슨 범죄를 저질렀어? 이건 지금 하차할 거리도 아니고, 사과하거나 할 문제도 아니야. 근데 네가 여기서 왜 그만둬? 지금 욕먹은 거 때문에 그러는 거야? 지 혼자 성숙한 척은 다 하더니.”
“선우야, 승빈이한테 너무 그러지 마.”
숨도 안 쉬고 쏘아붙이지만, 그 모든 말이 나에 대한 옹호로 가득한 선우 형과 그 와중에 또 그걸 말리고 있는 지운이 형. 평소라면 바로 장난인 걸 알아차릴 거였는데, 그러지도 못할 만큼 흥분해 있었다. 오로지 나를 향한 걱정 때문에.
이 모든 장면이 나를 정신 차리게 했다. 이 소중한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다. 같이 데뷔하고, 함께 무대를 하고 싶다.
“와, 선우 형 랩 하는 줄.”
“뭐야, 문승빈 장난칠 힘도 남았어?”
이제야 장난인 걸 눈치챈 선우 형이었다.
“다들 일단 사진 좀 한 장 찍읍시다.”
“갑자기 사진?”
“우리는 여기서 다 같이 10화를 본 겁니다. 알겠죠?”
“응?”
“아- 형, 그럼 핸드폰은 제가 들고 찍는 게 낫겠죠?”
“역시 재봉이가 제일 눈치가 빠르네.”
재빨리 핸드폰 카메라를 켜서 구도를 잡는 박재봉과 영문도 모른 채 일단 브이부터 하는 나머지 셋. 그 가운데에 서서 강도현과 지운이 형에게 양손으로 어깨동무를 했다. 그리고 웃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밝고 상큼하게.
찰칵-
“이거 우리 회사 누나한테 보내서 바로 SNS 올려 달라고 할게요.”
“고맙다, 재봉아. 부탁 좀 할게.”
그렇게 박재봉이 잠깐 통화하겠다며 방으로 들어갔고, 아직 얼떨떨해하는 셋에게 설명했다.
“지금 제일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재봉이를 꼽 줘서 울렸다는 거잖아.”
“그건 그렇지.”
“일단은 같이 본방 사수할 정도로 친하다는 걸 올리는 거지.”
“아, 지금 당장 올려야 주작 소리가 안 나오겠네.”
“정답! 재봉이 똑똑하니까 멘트도 적당히 알아서 올려 줄 거야.”
“그리고 다들 고마워. 먼저 이렇게 찾아와 줘서 이런 해명도 가능해졌네.”
“뭘, 방송 보고 싸했는데 네가 전화도 안 받길래 얼마나 놀랐는데.”
“도저히 핸드폰을 볼 자신이 없더라고.”
사실이었다. 투마월을 본방 사수할 때면 원래 게시판 반응을 실시간으로 확인했는데, 중간 이후부터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필터링 없는 원색적인 비난을 직접 마주하는 기분이란.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지금도 조금 진정이 된 정도일 뿐, 내가 느꼈던 절망감이 완전히 회복된 상태는 아니었다. 박재봉이 사진을 올려도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질 수는 없겠지. 하지만 이들을 위해서라도 절대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다시 내 궤도를 찾아야만 했다.
* * *
10화가 방영되고 나서, 박재봉의 홈마 ‘레빗드림’은 지금 그 누구보다 열받은 상태였다. 그녀가 3차 경연 방청에서 느낀 그대로 몽환 팀의 무대가 가장 완벽했다. 하지만 그렇게 완벽한 무대가 며칠째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반응 난리 난 투마월 무대]
로미오랑 뱀파이어를 섞을 줄이야...
몽환 컨셉을 맡은 ‘로즈’ 팀의 ‘기다릴게’ 무대
진짜 오늘 이 팀이 무대 찢었다ㄷㄷ
평소였으면 다들 앓고 넘어갔을 평범한 무대 영업 글도 댓글이 만선이었다.
-무대를 찢은게 아니라 문승빈이 방송을 찢었는데요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쳤냐고ㅋㅋㅋㅋㅋㅋㅋㅋ
-이 팀 팀워크 망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삡-사실입니다.
-지 혼자 쉼표머리 한거봐;; 어떻게든 튀려고
-문승빈 독기 지린다 진짜
이런 상황에서는 현장 직캠이건 직찍이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처음에는 문승빈 개인에게만 집중된 비난이었지만, 수위가 점점 강해지더니 결국 몽환 팀 전부를 물고 늘어졌다. 재봉이 무대를 좀만 앓으려고 해도 죄다 문승빈 얘기였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제대로 악마로 만들려면 비교 대상이 필요했는지, 박재봉을 세상 둘도 없는 불쌍한 피해자로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몇몇 박재봉 팬들은 그게 좋은 건 줄 알고, 이것 보라고 우리 재봉이 착하다며 기름을 붓는 거 아닌가.
‘이 새끼들이 미쳤나.’
이래서 덕질 처음 해 보는 애들이 유입되면 안 되는 건데. 연예인 영업에 있어서 가장 기피해야 할 1순위는 바로 인성 영업이었다. 문승빈 악편 논란이 어느 쪽으로 사그라들건 다음 타깃은 바로 박재봉이 될 거다. 박재봉도 문제가 있으니까 문승빈이 저런 거 아냐? 이런 식으로 흘러갈 게 뻔했다. 근데 저 멍청한 놈들이 좋다고 인성 영업을 하고 있네.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녀가 다시 하드를 풀었다.
[20XXXX 투마월 몽환팀 모음.zip] @Rabbit_Dream
관종짓 그만 하려고 했는데
씨넷 때문에 빡쳐서 다 풉니다.
씨넷 악편 좀 정도껏;; 몽환팀 사이 겁나 좋은데 뭔ㅈㄹ임.
짹짹이에 먼저 글을 올린 그녀는 영상을 위튜브 쇼츠로 편집해서 링크를 달아 놨다. 요즘은 쇼츠가 알고리즘에 직빵이었다.
‘그리고 길면 사람들이 안 볼 테니까.’
아이돌 덕질 1N년 차, 인생의 절반 이상을 이 판에서 보냈다. 고인물을 넘어서 썩은 물 수준인 그녀는 이미 대중을 꿰뚫고 있었다.
[흔한 연습생들의 쩌는 팀워크]라는 흥미로운 제목으로 올라온 영상은 총 3개의 짧은 영상으로 이뤄져 있었다.
먼저 첫 번째 영상에서는 몽환 컨셉의 ‘로즈’ 팀이 무대에 등장해 첫인사를 하는 타이밍에, 문승빈이 상대적으로 등수가 낮은 두 멤버를 가운데로 세우면서 마이크를 주는 장면이 나왔다. 10화에서 문승빈이 무시한 것처럼 편집됐던 두 멤버였다. 그런데 하필 두 연습생 다 키가 커서 문승빈이 보일 듯 말 듯 가려졌고, 레빗드림은 그걸 놓치지 않고 까치발을 드는 문승빈의 발을 클로즈업하는 장면을 귀여운 비지엠과 함께 반복해서 넣었다. 해명과 더불어 씹덕 포인트까지 살린 거다.
그리고 바로 이어진 두 번째 영상. ‘기다릴게’ 무대 중 2절로 넘어갈 때 재킷을 벗는 장면에서 마이크 팩에 걸려 제대로 못 벗는 다른 연습생을 도와주는 모습이었다. 바로 다음이 문승빈 파트라서 자칫하면 자기 파트에서 실수할 뻔했을 정도로 아슬한 순간이었는데, 안무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돕고 자기 파트까지 완벽하게 해내는 모습이 담겼다. 그리고 실수할 뻔한 멤버가 놀라서 표정이 굳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듯 오히려 그 멤버를 향해 윙크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그걸 보고 굳은 표정이 풀리는 상대의 모습까지, 완벽한 구성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 영상이 하이라이트였다. 공연이 다 끝나고 마지막 인사까지 한 연습생들이 무대를 내려가고 있는데, 문승빈이 마지막까지 무대를 확인하면서 남아 있는 장미꽃 잔해를 다 줍는 장면이었다. 그 모습을 눈치챈 재봉이가 뒤돌아 와서 같이 정리하는 것까지 레빗드림이 제일 아껴 둔 영상이었다.
‘이건 나중에 재봉이 포토북 내면 특전으로 풀려고 했는데-’
미래를 위해 킵해 두려던 영상이었는데, 이렇게 한꺼번에 풀게 될 줄이야. 아까워 죽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단은 재봉이가 데뷔해야 하니까. 쓸데없는 구설수는 최대한 빨리 제거하는 게 좋았다.
사실 첫 번째와 마지막 영상의 장면은 수많은 3차 방청 후기에도 여러 번 언급된 내용이었다. 하지만 글로 쓰여 있는 걸 읽는 것과 그 장면을 눈으로 보는 건 차원이 달랐다. 후기를 보고 구라니 주작이니 했던 여론이 싹 들어갔다.
-와 진짜 이분 레전드다;;
-저걸 어떻게 다 안들키고 찍을 수 있지??
-중간에 경호원 나타나는 거 봐;; 나였으면 카메라 떨궜음
┕와씨 경호 아저씨랑 아이컨택 제대로 했네
-승빈이도 키 큰 편인데 까치발 무슨 일이야ㅠ퓨ㅠㅠ
┕몽환 팀 진짜 비율 대박이다ㄷㄷ
-아니 나는 수환이가 자켓 못벗은지도 몰랐음;;
┕진심ㅇㅇ 저렇게 어두운데 저걸 어떻게 또 봤대
-누가 얘네 사이 나쁘대ㅠㅠㅠㅠ
┕아니 저렇게 친한 애들을 편집으로 보낼 뻔한 거임?
특히 그녀가 올린 영상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파급력이 상당했다. 먼저 그녀가 문승빈의 팬이 아닌 박재봉 팬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솔직히 지금 박재봉보다 높은 순위의 데뷔 조인 문승빈이 망하면, 박재봉의 데뷔 가능성이 높아지는 게 당연했다. 그러니 그녀가 일부러 이렇게까지 영상을 올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해명이고 뭐고 일단 영상이 재밌었다. 해명 영상이라고 구구절절 상황을 설명하거나 하는 게 아니라, 짧은 영상을 보여 줬을 뿐인데 무슨 상황인지가 다 보였다. 문승빈이 문제가 없다고 호소하는 게 아니라, 그냥 방송에서 나오지 않은 ‘로즈’ 팀의 훈훈한 모습을 보여 줬을 뿐인 거다. 사람들은 10화에서 방송된 분량과 비교를 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씨넷의 뚝뚝 끊기는 편집이 우스워졌다.
-재봉이가 승빈이한테서 떨어지지를 않네ㅋㅋㅋㅋㅋ
┕그니까ㅠㅠㅠ 강쥐랑 토끼조합 못 잃어ㅠㅠㅠ
-윙크하는 장면만 돌려보는 나, 정상인가요??
┕삡- 정상입니다.
┕아니 세상 치명적이게 자기 파트하고는 윙크를 한다고요?ㅠㅠㅠ
-수환이도 저거 보고 긴장 풀려서 웃는 거 봐ㅠㅠㅠㅠ
┕진짜 우리 애기 로미오들 넘 사랑스럽잖아ㅠㅠ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리짹 수와 쇼츠 조회 수가 빠른 속도로 올라가는 걸 보면서 ‘레빗드림’은 그제야 안심했다. 이제 남은 건 문승빈 팬들이 알아서 할 거다. 이 정도 떠먹여 줬으면 제대로 분위기 한번 반전시켜 봐야지.
그리고 역시나 그녀의 예상이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