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바쁜 현생으로 인해 그 어떤 스포도 보지 못했던 A는 지금 기절 직전이었다.
“야, 나 좀 한번 꼬집어 줘 봐.”
교복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클로즈업된 강도현의 얼굴을 보고 두 번째 충격을 받았다. 눈 밑에 붙인 반창고와 상처 분장. 이 무대가 반항아 컨셉이라는 걸 제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짓밟고 찢어 놔 전부 다
날 막는 그 무엇도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순 없을걸]
강도현의 빠른 래핑 뒤로 깔리는 김병대의 목소리가 예술이었다. 한 명은 노래를 하고, 다른 한 명은 랩을 하고 있음에도 화음이 쌓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ㅁㅊ 교복에 상처분장할 생각은 누가 한거임?ㅠ
┕진심 노벨평화상 줘야함ㅇㅇ
-와 교복도 다 디테일 다른 거 봐ㅠㅠㅠ
반항아 컨셉이지만 모두 똑같이 흐트러진 교복을 입고 있었다면 재미없었을 거다. 하지만 그중 몇몇은 비교적 단정하게 교복을 챙겨 입음으로써 반듯해 보이지만 반항심을 가진 느낌을 주었다. 김병대는 넥타이 없이 셔츠와 니트 조끼만 입었고, 강도현은 흰 와이셔츠의 단추를 두 개 정도 풀고 느슨하게 풀어진 넥타이를 하고 있었다. 격렬한 안무를 할 때면, 넥타이도 함께 춤을 추는 듯했다.
“VM 애들이 이번에 작정했네.”
“그니까, 소속사 평가 때 생각난다.”
1차, 2차 경연 모두 좋았지만, A가 아직까지 제일 아끼는 무대는 바로 대면식에서 한 소속사 평가 무대였다. 오직 둘이서만 채운 무대지만, 허전함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그 최애 무대가 오늘 깨질 거 같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다.
-강도현 이제 넥타이도 조종하네;;
┕그니까;; 머리카락만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줄 알았더니
-넥타이도 같이 춤추네ㅠㅠㅠ
-하,,, 진짜 뭐하는 놈이냐고ㅠㅠㅠㅠㅠㅠ
대면식 이후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강도현과 김병대의 무대라는 것도 많은 팔로워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오늘 무대로 확실해짐ㅋㅋㅋㅋ 뷔엠즈 무조건 같이 데뷔해야 함ㅠ
-메인래퍼 강도현, 메인보컬 김병대 갓벽하다ㄷㄷ
-투픽 투표 무조건 뷔엠즈다ㅠㅠㅠ
-둘이 이렇게 귀여운 애였음??
┕긍까ㅠㅠㅠㅠ 악편은 그동안 병대가 당했네ㅠㅠㅠ
-문승빈 떡락하고 그 자리에 병대가 떡상할 듯?
┕병프는 어쩜 이름도 병프냐;;
┕병프들 닉값 오지게 하네ㅋㅋㅋㅋㅋ
강렬한 비트에 걸맞게 안무도 파워풀했다. 반항아의 이미지와 독기 가득한 연습생들의 표정 연기도 무대의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너무 과해질 수 있는 컨셉이었고, 실제로 몇몇 연습생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강도현과 김병대의 적절한 컨트롤이 그 과함을 중화시켰고, 그걸 지켜보는 A와 K는 감탄했다.
“괜히 대기업이 아니다.”
“울 도현이 너무 잘해.”
“진심 강도현 쟤는 그냥… 그냥 다 잘해.”
“내가 처음부터 말했잖아. 우리 애는 못 하는 게 없어.”
[내 앞을 막아서는
장애물 따위 AY
시시하게만 느껴질 뿐
내 신발에 묻은
먼지만도 못하지]
노래의 클라이맥스는 강도현, 김병대가 서로 주고받는 파트였다. 무대 양 끝에서 마주 보고 서 있던 둘이 중앙으로 걸어왔고, 열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댄스 브레이크와 함께 강도현이 센터로 나왔다. 저러다 교복 셔츠 뜯어지는 거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파워가 느껴지는 안무였다. 거의 공중제비 하듯 반 바퀴를 도는 모습에는 K도 입을 틀어막았다.
-도현이 교복 단추 열일하네,,,
┕그럴 필요가 없는데....
┕저쯤 되면 단추: 죽여줘... 아니냐고ㅠ
격한 안무에 숨을 몰아쉬는 연습생들의 모습이 클로즈업되면서 무대가 끝났다. 얼굴에는 땀이 비처럼 흐르고, 거친 숨소리가 마이크를 넘어 들릴 정도였지만 카메라를 뚫을 듯한 눈빛이 그 모든 걸 뛰어넘었다.
-엔딩 미쳤네;;;
-걍 강도현과 아이들이었음ㅋㅋㅋㅋㅋㅋㅋ
-도현이는 정말 1등이 하고 싶구나,,,,
윤승철의 마지막 멘트가 정확했다. 현장에서 보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로 강렬한 무대였다.
타이밍 좋게 들어온 문스트럭은 아직 무대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A와 K를 발견했다.
‘아씨, 한 대 더 피우고 왔어야 했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돛대까지 싹 비우고 온 참이었다. 마지못해 다시 자리에 합류하자 A는 속사포 랩처럼 감상을 쏟아 냈다.
“도현이는 걍 사람이 아니야. 그냥 쩌는데, 아니 랩을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잘하지?”
“야, 뭔 놈의 칭찬이 쩔어, 잘한다가 끝이냐?”
“아니, 진심 쩐다는 거 말고는 생각이 안 나.”
“개공감. 오늘은 강도현 쩌는 거 나도 인정.”
속이 쓰리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문스트럭이었다. 강도현에 별 감흥이 없던 K마저 저럴 정도면 무대를 오지게도 잘했나 보다. 물론 강도현 한정이다. 김병대는 대면식부터 승빈이랑 기 싸움 하는 꼴이 여간 재수가 없는 게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하필이면 이번 투표가 투 픽 투표라서 더 걱정이 됐다. 강도현은 승빈이랑 꽤 관계성이 좋은 연습생이었는데, 이 무대로 VM즈 팬들이 연합해서 투표할 것 같았다.
‘표가 꽤 깎일 수도 있겠는데.’
“윤 피디 새끼, 진짜 무슨 생각이지?”
“그러게, 오늘 좀 편집이 들쑥날쑥이야.”
“맞아, 갑자기 김병대 분량 늘어나고, 무대 순서 바뀐 것도 좀 이상하고.”
“VM 작정하고 밀어주려나 보네.”
게시판 반응도 비슷하게 흘러갔다.
-문승빈은 이제 단물 빠졌다 이거지ㅎ..
┕하긴 VM출신으로 여기까지 온 거지 뭐ㅋㅋㅋㅋㅋㅋ
-흙수저는 역시 금수저를 못 이기네ㅠ
-이제 김병대가 새로운 피디픽 되는 거임??
┕병대는 원래부터 피디픽이었어 알못들아;;
┕ㄹㅇ 초반에 VM이라고 성장서사 몰빵해준 거 기억 못하나 봄ㅎ
-문프들이 할 소리는 아니지ㅠ
┕문프 아니고 승프라고 ㅅㅂ
┕난 최애 따로 있는데?
┕최애 따로 있음 = 쟤가 내 최애 맞음 ㅇㅈ?
더 보고 있다가는 화병이 날 거 같아 그녀는 핸드폰 전원을 아예 꺼 버렸다.
* * *
‘이게 뭐지?’
그래, 10화를 보자마자 처음 든 생각이 딱 이거였다. 이게 뭐지? 이번에야말로 정말 무난하게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다. 팀 조정부터 컨셉 정하기, 그리고 본무대까지. 중간에 박재봉의 과거와 하트창이라는 변수가 있었지만 결국 큰 문제 없이 해결하지 않았는가.
만약 우리 팀 분량에서 문제가 될 여지가 있다면, 그건 당연히 박재봉의 중간 평가라고만 생각했다. 근데 사건은 맞았는데, 논란의 대상이 박재봉이 아닌 나라니. 악편을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 역시 팀 재조정에만 국한된 일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내가 생각한 모든 경우의 수를 벗어났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혼자서 10화를 봤다는 거, 그거 하나뿐이었다. 선우 형의 제안처럼 같이 모여서 봤다가는 중간에 그 자리를 뛰쳐나왔을 것만 같았다.
‘이걸 대체 어떻게 해결하지? 아니, 애초에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인가?’
윤 피디를 찾아가서 나한테 왜 그러냐고 따질 수도 없다. 이미 방송된 분량을 내가 어떻게 바꿀 수도 없고, 서바이벌에 참여한 연습생 신분이기에 함부로 인터넷에 글을 올릴 수도 없다. 그리고 글을 올려 봤자 뭐라고 올릴 건데?
앞으로 잘하면 된다? 그것도 무의미했다. 팀 재조정 때는 지운이 형을 데려오기 위해 내가 잠깐 무리했던 게 맞았다. 하지만 다른 악편 장면들은 내 의사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편집되어 나간 장면들이었다. 새로 합류한 두 연습생을 따로 시간 내서 돕는 장면은 다른 연생을 배제하는 것처럼 편집되었고, 멘탈이 털린 박재봉을 달래던 상황은 내가 박재봉을 혼낸 것처럼 나갔다.
스스로가 이렇게 무능력하게 느껴지기도 처음이었다.
‘조금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끝도 없는 자괴감이 온몸을 뒤덮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형은 데뷔할 수 있으려나. 이번 무대만 방송되고 나면, 형도 나도 안정적으로 데뷔할 거라고 확신했다. 그만큼 자신 있었으니까. 그리고 실제로 방송된 무대는 예상 그대로였다. 객관적으로 봐도 정말 멋진 무대였다.
하지만 다 무의미한 일이었다. 아무도 우리 팀의 무대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우리 팀의 불화설만이 사람들의 관심사였다. 그렇게 열심히 연습하고 준비했던 무대가 나 때문에 묻히고 있었고, 그게 나를 가장 괴롭게 만들었다. 미안하고, 또 허망했다.
띵동-
‘뭐야, 누구지?’
누가 잘못 눌렀나 싶었다. 지금 나를 찾아올 사람은 없었으니까. 혹시 어린애의 장난이라면 뭐라고 화낼 에너지도 없었다.
띵동. 띵동띵동.
“아씨, 누구야.”
실수가 아니라는 듯 끝없이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결국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향했다. 이 늦은 시간에 대체 누구란 말인가.
“누구세요-”
“야, 문승빈! 너 왜 전화도 안 받고.”
시뻘게진 얼굴을 하고 문을 연 선우 형 뒤에는 박재봉과 지운이 형, 그리고 강도현이 서 있었다.
“형, 불은 다 꺼 놓고 이게 무슨 청승이야.”
“승빈아.”
“뭐냐, 문승빈답지 않게 왜 이러고 있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던지는 한마디가 너무나도 본인들 그 자체라서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이 시간에 다들 무슨 일이야.”
“왜겠냐?”
“형, 진짜 몰라서 물어보는 건 아니죠?”
“걱정되니까 왔지. 급하게 오느라 택시비 오지게 나왔다.”
“일단 좀 들어간다.”
맨 뒤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지운이 형을 마지막으로 모든 인원이 거실로 들어왔다. 정신 차려 보니 이미 난 소파 한가운데 앉아 있었고, 어디서 찾아왔는지 강도현은 따뜻한 물에 티백을 타서 들고 왔다.
“야, 일단 좀 마셔라.”
“넷이 어떻게 같이 온 거야?”
“아, 누가 튕기시는 바람에 내가 도현이한테 같이 보자고 불렀지-”
“헐. 형, 제가 문승빈 대타였어요?”
“어머, 내가 그 얘기는 안 해 줬나?”
“와- 배신감 오진다.”
“암튼 그래서 우리 집에서 다 같이 보다가 좀 이상해서.”
만담하는 듯 티격태격하는 둘의 모습에 상황을 잊은 채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너 진짜 윤 피디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그럴 리가요.”
대놓고 직구를 날리는 선우 형과,
“내가 형을 울렸으면 울렸지, 무슨 형이 날 울렸대-”
아무렇지 않은 척 농담을 던지려는 박재봉.
“형, 순발식 때 내가 형 한 대 때릴까여? 그럼 형이 그냥 대놓고 울어 버릴래요?”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알 수 있었다. 왜 네가 울먹이려는 건데. 하여간 애는 애였다.
그리고 그 옆에서 어쩔 줄 모르고 왔다 갔다 하다가 대뜸 내 손을 꽉 쥐는 지운이 형.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형만의 위로 방식이었다. 이걸 이렇게 다시 마주하게 될 줄이야. 예상치 못한 포인트에서 울컥할 뻔했다.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여기서 그만두더라도 사람은 얻겠네.
“이건 그냥 내가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그리고 마지막으로 몇 번이고 입을 떼려다 말던 강도현이 뭔가 다짐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