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63화 (63/346)

63화

[깊은 잠에서 이제 깨어나

그대만의 소년이 될게

누가 뭐래도 One & Only]

“야, 내가 잘못 들은 거냐? 뭐? 소년이 돼?”

“나 정신 나갈 거 같아.”

이수진도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제복 입고 뱀파이어 컨셉을 한 미소년들이 ‘그대만의 소년이 될게.’라는 말을 하다니. 누가 봐도 노린 게 분명한 도발적인 가사였다. 하지만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얼굴이 개연성이다.’

그 말이 정답이었다. 저 비주얼로 그대만의 소년이 되겠다고 하는 건 솔직히 반칙이었다.

[다시 만나는 순간에

모든 걸 보여 줄게

설명하기엔 너무 벅찬

내가 달려온 시간

네가 기다려 온 순간을]

일렬로 모여 있던 멤버들이 한 명씩 잔상처럼 이동했다. 칼군무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가 한 눈에 보이는 안무였다. 뒷사람과 팔다리 각도까지 모두 맞춰야 하는 동작이었지만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칼각이다 진짜…….”

“저 정도로 각도기로 잰 거 아니냐고.”

“너무 잘해!”

잔상의 끝은 차지운의 독무였다. 마지막 순서여서 움직임이 가장 많았음에도 흔들림 없이 안무를 했다. 단체로 현대 무용을 어디서 속성 과외라도 하고 온 것인지, 턴을 할 때 특히 선이 아름다웠다.

[이제는 숨기지 않아

그대만의 소년이 되었어]

독무를 끝낸 차지운이 센터로 오고, 뒤돌아 있던 다섯 명이 정면을 향해 고개를 돌리면서 무대가 끝났다. 엔딩 요정 샷을 위한 표정과 제스처도 빠지지 않았다.

“와…….”

“아니-”

“와아아아악!!!!”

“앵콜!!”

연습생들이 숨을 고르고 대형을 맞추는 때까지도 앵콜 요청이 가득했다. 수정도 목이 터져라 앵콜을 외쳤다. 연습생들은 이에 화답하듯 제자리에서 제스처를 살짝씩 보여 주거나, 메인 안무를 재연했다.

“오늘 레전드 사진이랑 영상 많이 나오겠다.”

“아, 너무 기대돼. 레빗드림 님 사진 존버해야지.”

마지막 순서로 무대를 하게 된 ‘큐트’ 팀이 불쌍해질 정도였다. 순서를 뽑기로 뽑은 건가? 몽환 팀의 무대가 그냥 오늘의 엔딩인 것만 같았다.

* * *

회귀하고 상태창이 등장한 이후로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은 처음이었다. 무대를 마치고 다시 팔로워들 앞에 선 순간, 활성화시킨 팀원들의 머리 위 하트창이 경쟁이라도 하는 듯 반짝거렸다. 마치 지난번에 본 건 맛보기라는 듯 화려함이 남달랐다.

특히 박재봉의 하트창 수치가 급격하게 올라서인지, 마치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머리 위에 하트가 가득했다가 하트창으로 흡수되면서 퍼센트가 올라갔다. 게임의 한 장면을 보는 것만 같이 현실성이 없었다. 직접 마주한 팬들의 관심과 애정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겠지.

결과를 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대기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하나같이 가벼웠다.

아, 나만 빼고.

“승빈이 형, 피 묻은 거 찝찝하지 않아요?”

“그러게, 그거 물엿 섞인 거라며.”

“대박. 그래서 그렇게 끈적였구나.”

말도 마라, 사실 미친 듯이 찝찝했다. 이미 셔츠 안은 난리도 아니었다. 걸음마다 몸과 셔츠 사이에 묻은 가짜 피가 쩍쩍 들러붙었다가 떼어지는 게 반복이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피를 흘리는 장면에 대한 아이디어를 낸 건 나였으니 누굴 원망할 수도 없었다. 액션물을 찍으면서 온갖 종류의 특수 분장을 경험하고는 했다.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이 가짜 피였다. 실제 피의 그 찐득한 느낌을 위해서 흘러내리는 가짜 피에는 물엿을 섞게 되는데, 그 찝찝함은 경험해 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가 없다.

연기할 때는 필요한 장면에만 잠깐 사용하고, 바로 닦아 내고는 했다. 특히 이 정도의 질감은 죽거나 크게 다칠 때만 사용하는 거라 피를 바른 상태로 가만히 있기만 했다. 그런데 이게 바르고 나서 춤을 추니까 그 찝찝함의 차원이 달랐다. 아마 이 셔츠는 회생 불가능하겠지.

그래도 얇은 비닐에 담긴 피를 손으로 쥐면서 터트릴 때의 모습이 아주 드라마틱해서 뱀파이어로 컨셉이 정해지자마자 가장 먼저 떠올린 소품이었다. 다행히도 메이크업 담당 쌤이 특수 분장도 하셨던 분이라 원하는 모습 그대로를 구현해 주시기도 했고 여러모로 상황이 잘 맞았다.

“진심 세상 찝찝해.”

“그래도 임팩트 장난 아니었어요.”

“맞아, 알고 있는데도 순간 진짜 피인 줄 알았어.”

“아니, 안 그래도 지운이 형 흠칫하는 게 뒤에서 보였어.”

“형, 솔직히 아까 피 보고 깜짝 놀랐죠?”

신나 가지고 고새 또 지운이 형을 놀리는 박재봉이었다. 저 정도면 완전히 다 회복한 거 같네. 지운이 형도 그게 느껴졌는지 장단을 맞춰 주고 있었다.

“왜, 재봉아. 너도 피 한번 보고 싶어?”

“와, 지운이 형. 형은 진짜 그 얼굴로 정색하고 그러지 마요.”

“내가 다 쫄았다, 진심.”

지운이 형의 정색하는 표정에 박재봉보다도 옆에 있던 김수환이 더 깜짝 놀랐다. 항상 기본값이 허허 실실 웃고 있던 형이라, 아마 처음 봤을 수도 있겠네. 형의 얼굴을 몇 년이나 보고 지낸 나도 형이 저런 표정을 지으면 흠칫하는데, 다른 애들은 어떻겠는가.

“정신이 확 드네.”

“얼른 대기실 들어갑시다.”

“이제 한 팀 남았나?”

“맞아, 큐트 컨셉만 남음.”

“큐트 팀 무대 봐야지.”

“맞다, 우리 귀여운 민호 형 봐야 한다구여.”

새벽부터 시작된 강행군에 지칠 법했는데도, 아직 다들 쌩쌩했다. 만족스러운 무대의 여파겠지. 나도 다를 건 없었다. 아직 마지막 팀의 무대가 남았기에 이 찝찝함을 조금 더 견뎌야 했지만, 얼마든지 괜찮았다. 이런 무대라면 몇 번이고 다시 할 수 있었다.

* * *

한편 3차 경연을 지켜보던 윤 피디는 경연장을 나와 편집실로 향했다. 급하게 스페셜 방송을 껴 넣으면서까지 경연을 일주일 미룬 보람이 있었다. 서바이벌에서 나오기 힘든 화려한 무대 세트도, 각 팀이 준비한 무대도 전부 기대 이상이었다. 이대로라면 이번 주 방송도 화제성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10화의 편집 방향을 생각하며 걸어가던 그의 앞을 막은 것은 예상외의 인물이었다.

“윤 피디님, 오랜만입니다.”

VM 엔터테인먼트 이 실장. 투마월 시작 직전에 만난 이후로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새 머리가 더 빠졌네.’

“아니, 이 실장님이 방송국까지는 어쩐 일로.”

“오늘 저희 ‘루커스’ 애들 컴백하는 날이라 사전 녹화 뜨는 거 볼 겸 겸사겸사 나왔네요.”

“그러셨구나. 이번에도 성적 좋은 거 같던데 축하드립니다.”

적당히 웃으며 자리를 피하려던 그였지만, 답지 않게 이 실장이 한발 빨랐다.

“근데 윤 피디님, 얘기한 거랑 좀 다르지 않나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문승빈 그 새끼랑 비교해서 저희 애들 밀어주겠다면서요. 근데 지금 꼴을 보아하니 이건 뭐, 문승빈이 데뷔라도 할 거 같던데요?”

“실장님, 무슨 그런 섭한 말씀을. 도현이 계속 상위권이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도현이는 자기 실력으로도 충분히 그랬을 애예요.”

“그리고 병대도 제가 편집 잘해 줘서 지금 이 정도지, 그대로 방송 나가면 이미 나가리예요. 애가 하는 짓이 꽤 어리던데요.”

“뭐라고요?”

제가 서 있는 장소가 어딘지 잊기라도 한 듯, 이 실장의 목소리가 커졌다. 지나가는 스태프들이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 진짜 이 답답한 새끼. 이런 놈이 어떻게 VM 같은 대형 기획사에서 일하고 있는 건지.

“자, 흥분하지 마시고 들어 보세요. 서바이벌은 지금부터가 시작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아시겠지만 병대랑 도현이 이번에 같은 팀이잖아요. 제대로 서사 쌓아 드릴 겁니다.”

“하지만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적당히 둘러대고 자리를 뜰 생각이었는데, 이 실장의 반응이 영 탐탁지 않아 보였다. 가뜩이나 시간 없어 죽겠는데 이런 놈한테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그럼 포인트를 바꿔야지. 말로 사람 다루는 일에는 이미 도가 튼 윤 피디였다.

“실장님, 어차피 데뷔할 애들은 이제부터의 분량이 중요해요. 데뷔조가 7명밖에 안 되잖아요.”

“문승빈이 어느 정도 관심을 받아야 VM 애들이랑도 비교할 맛이 나는 거죠.”

“생각해 보세요. 아무도 관심 없는 듣보인 애랑 도현이를 비교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이 실장을 향해 질문을 던지고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 말하면 너도 알아듣겠지? 하는 눈빛과 함께.

“…너무하다고 생각하겠죠?”

“맞아요. 비교도 어느 정도 급이 맞아야 하는 거지. 체급 차이가 너무 나면 재미가 없잖아요. 그리고 그렇게 허접한 애가 VM 연생이었다는 것도 가오 떨어지는 거고.”

“흠.”

“VM은 비교 대상도 없는 대한민국 최고의 아이돌 기획사 아닙니까?”

“그건 그렇죠.”

참 쉬운 인간. 누가 봐도 점점 설득되고 있는 이 실장의 표정이 같잖았다. 입만 좀 털어도 넘어올 걸 뭘 그리 떽떽거렸던 건지.

“그래서 지금까지 문승빈을 살려둔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본격적으로 시작해야죠. 왜 문승빈은 더 이상 VM이 아니고, 강도현이랑 김병대는 여전히 VM인지. 대중이 그 차이를 확실하게 느끼도록 할 겁니다.”

“미안합니다. 내가 우리 윤 피디를 못 믿은 건 아니지만, 다 계획이 있었군요.”

“아닙니다. 어차피 이번 주 분량부터 들어갈 거라 따로 말씀 안 드린 건데요 뭐. 답답하셨을 만하죠.”

“그럼 윤 피디만 믿겠습니다.”

“네, 걱정 마세요. 제가 또 편집 하나로 먹고사는 사람 아닙니까.”

VM이랑 척지면 좋을 게 없으니까 적당히 둘러댄 말이었지만, 생각해 보니 맞는 얘기였다. 생각보다 문승빈을 너무 오래 살려 두기는 했으니까.

이 실장과의 약속을 까먹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문승빈이 너무 기대 이상으로 잘했고, 인기나 화제성도 좋으니까 얘를 딱히 죽일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이용하면 이용했지. 봐라, 지난번 스페셜 방송도 결국 제일 화제가 된 건 30위 합류 연습생이 아니라 문승빈의 골 때리는 투마월 지원 영상이었다.

‘역시 내 감이 맞았어.’

처음 지원 영상을 보고 느낀 것처럼 문승빈은 난놈이 맞았다. 자신을 제대로 셀링할 줄 알았고, 18살이 맞나 싶을 정도로 철저했다. 사실 윤 피디도 문승빈을 이렇게까지 놔둘 생각은 없었다. 중간중간 기회를 봤지만, 뭐 하나 빌미 잡을 게 없었다. 그 긴 녹화 시간에도 조는 모습 한 번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 봐야 내 밑인데, 뭘.’

하지만 빌미가 없으면 만들면 되는 법.

‘오랜만에 실력 좀 발휘해 볼까.’

이번에도 결과가 벌써 뻔했다, 그의 손끝에서 살아남은 연습생은 그 누구도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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