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그 후로는 어떻게 다음 무대를 봤는지 모르겠다. 강도현과 김병대의 조합을 앞세운 힙합 팀의 무대도 꽤나 임팩트 있었지만, 아직도 ‘다이너마이트’ 팀의 무대가 이수진의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이름값 한번 제대로 하는 팀이었다.
그렇게 그녀가 정신 못 차리는 사이, 다음 팀을 위한 무대 세팅이 끝났다. 고전적인 느낌의 시계탑이 세워진 걸 보니 이번 팀 역시 작정한 듯싶었다.
“그럼 다음으로 ‘기다릴게’ 무대를 준비한 몽환 팀 무대 위로 올라와 주세요!”
“와아아!!!!”
“승빈아!”
역시 문승빈을 응원하는 사람이 많았다. 아무래도 문승빈은 절대 팀이 재조정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 연습생들이 나오기도 전에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무대 위로 올라오는 뜻밖의 인영에 현장이 시끄러워졌다.
“헐, 지운아!!!!”
“지운이 몽환 팀으로 왔어?”
“큐트 아닌 게 다행이다.”
“나쁘지 않은데?”
“재봉아!!”
“아, 미친 재봉이 몽환 컨셉인가 봐.”
“몽환?”
이수정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몽환 컨셉이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기존의 재봉이가 가졌던 매력을 극대화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남은 팀이 몽환과 큐트 둘이라 당연히 큐트일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대에 올라온 재봉이의 모습을 보고는 금세 마음을 바꿨다.
“버건디 섀도 미쳤나.”
“재봉이 은근 잘 어울리는데?”
“당연하지, 재봉이인데!”
“단체로 버건디 화장에 실크 재질 의상이라니 완전 작정했네.”
“그니까.”
“문승빈 백발에 쉼표 머리 돌았다.”
“승빈이 진짜 이번 컨셉 찰떡이다.”
“어떻게 저런 머리색이 어울릴 수가 있지?”
주변에서는 이미 카메라 연사 소리가 가득했고, 제지하려는 경호원과 찍으려는 홈마들의 접전이 팽팽했다. 이수정도 소심하게 핸드폰을 꺼내 들고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한 번 찍고 숨기고, 찍고 숨기고를 반복했다. 물론 기다리면 홈마들의 기술과 애정이 담긴 고화질 사진을 볼 수 있지만, 처음 와 본 현장에서 직접 찍은 사진 하나쯤은 남기고 싶었다.
이제는 꽤 여유롭게 환호를 즐기는 연습생들이었다. 그렇게 모든 연습생이 무대에 자리하자, 윤승철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몽환 컨셉으로 무대를 하게 되었는데, 팀 소개부터 먼저 부탁드립니다.”
“네! 인사드리겠습니다. 둘 셋!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심장을 노리는 ‘로즈’입니다.”
문승빈의 멘트에 맞춰 모든 팀원이 숨겨 뒀던 장미를 꺼내 입에 물었다.
“미쳤다.”
“저 착장에 장미라고?”
“재봉아!”
“지운아! 입술 깨물지 마! 다쳐!”
뭐라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각양각색의 반응이었지만, 다들 제대로 흥분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로즈라니, 팀 이름부터 자극적인데요. 숨겨진 뜻이 있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저희는 장미의 ‘로즈’와 ‘로미오즈’의 줄임말,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오, 로미오즈? 여러분들이 다 지금 로미오인 거죠?”
“네, 로미오같이 소년소년했던 저희가 왜 장미를 물게 되었을까요?”
“글쎄요. 왜일까요, 박재봉 연습생?”
“그건 바로-”
마이크를 넘겨받은 박재봉이 비장한 표정으로 말끝을 늘였다. 숨 막히는 긴장감에 그 큰 녹화장이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그 긴장감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박재봉은 입을 열었다 닫기를 두어 번 반복하더니, 마침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최후의 마디를 내뱉었다.
“무대를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와, 박재봉 연습생, 아이돌이 아니라 배우를 준비해도 되겠어요. 저도 같이 숨을 참았네요.”
귀엽다는 듯 아빠 미소를 띈 윤승철이 멘트를 정리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지, 지금 바로 확인해 보시죠. ‘로즈’ 팀의 ‘기다릴게’ 무대가 지금 시작됩니다!”
무대 세팅이 완료되었고, 연습생들이 준비 자세를 잡았다. 시끄럽던 현장 분위기도 일순간 고요해졌다.
조명이 꺼지면서 본격적으로 사람들의 기대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수정은 물론이고 수진 역시 자신의 최애가 없음에도 가장 기대한 무대이기도 했다. 괜히 세트가 화려한 게 아니겠지. 경연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져오는 문승빈과 엄청난 끼를 가진 박재봉, 청춘예찬 무대를 기점으로 완전히 각성한 차지운 이 셋이 어떤 무대를 준비했을까 하는 기대감이었다.
정적을 깨고 나타난 건 예상 밖의 VCR이었다.
[로미오, 왜 당신의 이름은 로미오인가요?]
‘로미오와 줄리엣’의 유명한 대사가 자막으로 뜨면서, 주변의 팔로워들은 호기심과 흥분으로 가득한 반응이었다.
“로미오?”
“진짜 로미오와 줄리엣 컨셉이야?”
“헐, 그래서 약간 중세 시대 느낌의 의상이었나 봐!”
“돌았다.”
[모두가 우리의 사랑을 방해할지라도]
무대 중앙으로 핀 조명이 들어오고, 노래가 아닌 대사를 읊으며 박재봉이 걸어 나왔다.
댕-
타이밍에 맞춰 괘종시계가 울렸고, 알 수 없는 스산함이 느껴졌다.
“뭔가 으스스한데?”
“그냥 로미오와 줄리엣 컨셉이 아닌 건가?”
“미친, 나 지금 떠오르는 게 하나 있는데, 언니 기절할 거 같은데?”
“뭔데?”
“설마 뱀파이어 같은 건 아니겠지?”
“야, 119 부를 준비해라.”
뱀파이어라니. 아이돌 덕질은 안 했어도, 급식 시절 로맨스 판타지 소설에 푹 빠졌던 적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뱀파이어와의 사랑을 담은 소설은 그녀가 가장 애정하는 작품이었다. 다양한 실사화가 나왔지만, 그녀를 만족시킨 캐스팅은 없었다. 그런데 그런 뱀파이어 컨셉을 최애인 재봉이가 한다니. 정말 뱀파이어가 맞다면 수정의 꿈이 이뤄지는 역사적인 순간인 거다.
하얀 실크 셔츠에 달린 빨간 리본이 포인트가 되어, 박재봉이 한 걸음씩 걸어 나올 때마다 흩날리고 있었다. 게다가 눈가가 붉은 버건디 메이크업은 하얀 재봉의 피부톤과 찰떡이었다. 조명이 비춘 그의 손에는 작은 병이 있었다. 처연한 표정으로 비틀거리며 걸어오던 박재봉이 병에 담긴 붉은빛 물을 삼키더니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미친…….”
“재봉이도 연기 수업 받아? 뭐야?”
“언니, 재봉이 완전 칼 갈았나 봐-”
“문승빈한테 속성 과외라도 받은 거냐고.”
[네가 있는 시간에서 기다릴게]
“이거 재봉이 목소리잖아!”
“대박, 박재봉 저런 컨셉도 소화할 줄은 몰랐어.”
수정은 벅차오르는 감격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안 그래도 귀여운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데뷔하면 한정적인 컨셉밖에 소화 못 할 거라는, 그녀 입장에서는 헛소리인 여론이 강했다. 거기다가 등수까지 6위로 떨어졌으니 새로운 매력을 보여 줘야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팬들의 걱정은 어떻게 알고 찰떡같이 이미지 변신을 해낸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재봉이는 천재 아이돌이야.’
마음으로 낳았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원래도 완벽했지만, 슬럼프를 극복하고 한 단계 성장한 최애를 볼 때마다 느끼는 만족감은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절대 모르는 기분이었다.
다시 한번 불이 꺼진 무대에 조명이 들어오고, 여섯 명이 원형으로 누워 있었다. 그런데 모두 양손을 가슴팍에 교차시키고 있었다. 컨셉이 뱀파이어임을 확정하는 순간이었다. 이곳저곳에서 탄성이 터졌고, 수정은 동생의 팔을 부여잡고 발을 동동 굴렀다.
“미쳤나 봐!”
“얘네 작정했네.”
반주가 흘러나왔고 차지운의 첫 소절로 무대가 시작됐다.
[짙게 배인 네 향기에
천천히 눈을 뜬 이 순간
혼자 남은 내 곁엔]
“와씨, 재킷은 언제 입고 나온 거야?”
“미친.”
“아니, 지운이 얼굴이-”
“차지운 피지컬 돌았어.”
여우상인 차지운에게 특히나 어울리는 컨셉이었다. 쌍꺼풀 없이 옆으로 길게 뻗은 눈을 강조한 눈화장과 은은한 그레이색의 컬러 렌즈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했다.
“진짜 로판 소설 남주 같다.”
“X나 잘생겼어!”
“컬러 렌즈가 저렇게 잘 어울릴 일임?”
이수진이 특히나 감탄한 부분이었다. 새하얀 피부 화장에 짙은 버건디 아이 메이크업, 컬러 렌즈까지. 남자 아이돌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스타일링을 다 모아 놔 투머치할 수 있음에도,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그냥 얼굴이 서사였다.
“안무 너무 좋은데?”
“다들 무용 배운 적 있나?”
‘기다릴게’의 안무는 강약 조절이 특히 눈에 띄었다. 힘이 있으면서도 부드러운 선을 강조하는 안무였다. 웬만한 춤 실력으로는 제대로 살리기 어려운 안무일 텐데, 모두 제 몸에 딱 맞는 안무처럼 잘 어울렸다.
[붉게 피어나는 love
한 송이 꽃처럼
흩어지더라도]
특히 가사에 맞춰 제복 주머니에 꽂혀 있던 장미를 꺼내서 추는데, 붉은 장미 꽃잎이 흩날리면서 ‘뱀파이어’ 컨셉을 돋보이게 했다. 게다가 1절이 끝나고 간주 부분에서는 모두 장미를 입에 물고, 안무를 이어 갔다. 잠시 환호성을 잊을 정도로 충격적인 비주얼 쇼크였다.
간주의 댄스 브레이크가 끝나갈 무렵, 센터에 선 문승빈이 물고 있던 장미를 다시 손으로 옮기더니 가시가 가득한 줄기 부분을 꽉 쥐었다. 그러자 그의 오른손에서 붉은 피가 흘렀다.
천천히 고개를 한 바퀴 돌리며 피가 흐르는 손으로 자신의 목을 틀어쥐는 문승빈의 모습은 정도를 넘어서는 자극이었다.
“미친 거 아님? 쟤 표정 봐.”
“와, 약간 청순하게 생겨서 더 자극적인 듯”
“그니까. 다른 사람이 했으면 섹시했을 거 같은데, 쟨 뭔가 좀 그래.”
“야, 뭐가 그렇긴 뭐가 그래.”
“내가 지금 생각하는 걸 내뱉으면 나 청주 교도소 갈 듯.”
“몽환적이라는 거지?”
“그래, 그런 거로 하자.”
팔로워들의 충격을 뒤로하고 본격적으로 2절이 시작되자 ‘로즈’ 팀 연습생들이 전부 재킷을 벗어 던졌다. 소년에서 뱀파이어가 된 걸 보여 주려는 듯 안무도 한층 더 강렬해졌다. 하늘거리는 흰색 실크 셔츠가 그 춤 선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해 주는 것 같았다.
[아직은 어려 보일지라도
난 더 이상 소년이 아닌 걸
시계 초침을 나침반 삼아
원형의 그 시간을 달려갈게]
재킷을 벗자마자 이어진 솔로 파트가 문승빈인 것도 임팩트를 주기 충분했다. 목덜미부터 흐른 피가 셔츠를 살짝 적신 모습이 팔로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마지막 후렴부로 들어가기 전 킬링 파트는 박재봉이었다.
[기다릴게]
두 명의 연습생에게 이끌려 가는 것에 저항하듯 팔로워를 향해 손을 내미는 제스쳐와 함께한 킬링 파트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전광판에 박재봉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는데, 현장에 있는 모두가 순간 감탄했다. 소위 ‘글리터신이 도왔다.’는 말처럼, 무대 조명이 눈 밑의 글리터에 반사되면서 반짝이기까지 했다.
안무와 가사 자체도 킬링 파트인데, 그걸 백 퍼센트 살리는 박재봉의 역량이 더 눈에 띄는 장면이었다.
“재봉아!!!!”
“미친놈아…….”
“욕 나오게 하네, 진짜.”
손끝까지 디테일이 살아 있는 움직임에 수정은 홀린 듯 손을 뻗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