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귀를 찢을 듯한 함성과 함께 3차 경연, 컨셉 평가가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경연에 앞서, 투표 방식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제 앞에 계신 팔로워 여러분은 오늘 총 두 번의 투표를 하게 됩니다. 먼저 각 컨셉 무대 별로 가장 잘한 연습생에게 한 표를 투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경연이 모두 끝나고 퇴장하는 길에 위치한 상자에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컨셉의 팀에게 투표할 수 있습니다.”
“그럼 최다 득표를 한 컨셉 팀에서 1등 한 연습생이 전체 1등 하는 건가?”
“그렇게 컨셉 1위 팀에게는 총 베네핏 60,000표, 해당 팀 내 1위 연습생은 20,000표를 추가로 얻게 됩니다. 그리고 컨셉 팀 투표와는 별개로 전체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연습생에게도 20,000표의 베네핏이 부여됩니다.”
투표 방식과 베네핏이 공개되고 주변의 팔로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전략적으로 투표를 할 것인지 고민하는 거겠지.
“오, 대박. 그럼 컨셉 1위 못 한 팀 애들한테도 희망은 있는 거네?”
“그것보다 나는 재봉이 어느 팀에 있을지가 제일 궁금해. 섹시 팀에 계속 있을지 아니면 재조정됐을지.”
아직 순발식 이후 팀 재조정이 이루어진 장면이 방송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장 참여단이 가장 궁금해했던 이슈 중 하나였다. 다들 각자의 최애가 원하는 컨셉의 팀이 되었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이수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박재봉이 기왕이면 섹시가 아닌 다른 컨셉으로 재조정되었길 바랐다. 당연히 ‘큐트’가 1순위였고, 다음이 ‘청량’이었다. 섹시는 기존 이미지와도 어울리지 않았고, 섹시해 보이려는 노력이 자칫 잘못하면 오그라들거나 흑역사라는 반응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너는 윤빈이 무슨 팀이었으면 좋겠어?”
“무슨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당연히 섹시지!”
“하, 재봉이 어떡하지? 그 덩치 큰 애들 사이에서 울 애기가 섹시할 수 있겠냐고-”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건 아니고?”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제아무리 안 어울린다고 한들, 최애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은 당연한 거였으니까.
“컨셉 평가의 시작을 열어 줄 첫 번째 무대는 바로 ‘청량’ 컨셉의 ‘Surf.’입니다!”
김형석을 포함한 6명의 연습생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흰 티에 청바지를 입은 모습이 보기만 해도 청량 그 자체였다.
“일단 둘 다 청량은 아니네.”
“그러게, 뭔가 아쉽다.”
“흰 티에 청바지라니.”
“얼굴에 물감 칠한 거 봐. 메이크업도 찰떡이다.”
얼굴에 묻은 다채로운 색의 물감이 청량 컨셉을 더 돋보이게 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마지막에 합류했지만, 그냥 김형석을 위한 노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환하게 웃으며 무대를 하는데, 그 밝은 에너지가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것만 같았다.
“와, 형석이 진짜 많이 늘었네.”
“그니까. 그사이에 키도 더 큰 듯?”
오프닝 무대부터 반응이 뜨거웠다. 그리고 그 뜨거운 열기를 이어 갈 다음 팀은 등장도 전에 벌써 난리였다.
“다음 무대는 섹시 컨셉의 ‘다이너마이트’ 팀입니다. 연습생들은 무대 위로 올라와 주세요!”
“미친, 벌써 섹시 컨셉이라니.”
“윤빈아, 제발 섹시 팀에 남아 있어야 한다. 제발…….”
“너 수능 전날에도 그렇게 기도는 안 했던 거 같은데.”
“조용히 하세요, 이수정 씨.”
수진은 거의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2차 순발식 1위를 하고, 계속해서 인기가 상승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이번에 섹시 컨셉에서 제대로 터지길 바랐다… 는 건 두 번째 이유였고 그냥 윤빈의 섹시 컨셉이 보고 싶었다. 오직 그것뿐이었다.
“와아아아!!”
“선우야!!”
“유현이다!”
“윤빈이 있어?”
“있네!”
“윤빈아!! 됐다, 됐어!”
“와, 목소리 개 커.”
“윤빈 팬인가 봐-”
한 마리 익룡처럼 소리를 지르는 수진 때문에, 이수정은 경연 시작 이후 처음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다년간의 덕질로 다져진 그녀의 목청은 확실히 주변을 압도하는 데시벨이었다. 그나마 최근에는 투마월 덕질을 하면서 현장에서 응원할 일이 적어 목 상태가 많이 좋아진 거지, 예전에는 반쯤 쉰 목소리가 기본이었던 그녀였다.
“근데 이수진이 미칠 만하네.”
무대 위로 올라오는 연습생들의 모습을 보니, 수진과 주변 팔로워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언니,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맞아?”
“볼이라도 꼬집어 줄까?”
“어, 아무래도 이건 말이 안 됨.”
그녀는 수진의 볼을 힘껏 잡아당겼다. 적당히 잡아당겼다가는 이거 꿈이 맞다고 자신의 볼을 내리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와, 개아파. 미친, 꿈이 아니네?”
그녀의 동생이 이렇게까지 이성을 잃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윤빈이 전신레자에 크롭티를 입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자타 공인 투마월 최장신인 만큼 웬만한 거리에서는 카메라에 전신을 담기가 힘들 정도였다. 타이트한 전신레자 의상 때문에 몸 선이 드러났는데, 알맞게 자리 잡은 근육이 돋보였다. 피지컬로는 다들 유명한 연습생들만 모인 곳에서도 독보적이었다. 어넓골좁의 정석을 보는 듯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너무 짧지 않은 크롭 상의가 화룡점정이었다. 단순히 우락부락한 게 아니라, 선을 망치지 않을 정도로만 잡힌 복근이 보일 듯 말 듯 했다.
“크롭… 크롭이라니…….”
“야, 정신 좀 차려 봐.”
“윤빈아, 배앓이한다!!”
“아, 미친.”
현장에 있던 한 팬의 외침에 윤빈이 쑥스러운 듯 손사래를 치며 배를 가렸다.
“안 돼!!”
“가리지 마!”
“여며!!!!”
“여미지 마!!”
뚜렷하게 갈린 현장 반응에 나머지 연습생들도 웃음이 터졌다. 참고로 수진은 당연히 ‘여미지 마’파였다. 잠시라도 저 아름다운 복근을 못 보는 것이 열받았지만, 덕분에 수줍어하는 윤빈을 볼 수 있었다며 애써 화를 삭였다.
“이번 무대 준비하면서 어려운 점 없었나요?”
“선우 형이 엄청 고생했어요.”
“맞아요.”
“박선우 연습생이요?”
“저에게 섹시는… 정말 큰 도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잘 어울려요!”
윤빈이 특유의 쾌남 바이브로 박선우를 칭찬했다.
“근데 선우 팬들도 의견이 반으로 갈리더라?”
“아무래도 선우도 섹시 쪽보다는 귀염상이니까.”
“근데 그거 알지? 그런 애들이 의외로 섹시 컨셉 잘 어울릴 수도 있다?”
“그래?”
“아니. 그리고 박선우 목소리에 섹시? 이건 무조건 된다.”
* * *
모든 연습생이 자리를 잡자 무대가 어두워졌고, 수진은 혹시나 비명이 튀어나올까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Checkmate-]
고요한 현장에 박선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역시 사람들을 집중시키는 매력적인 저음이었다. 핑거 스냅 소리와 함께 조명이 켜졌고, 여기저기서 헉하고 숨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모든 멤버가 붉은 레이스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저거 지금 레이스 천으로 눈 가린 거임?”
“이거 방송 가능함?”
“누구 아이디어냐, X나 나보다 더한 변태 새끼들일 줄이야…….”
[둘만의 게임이 시작 돼
승자는 이미 정해져 있지]
도입부를 맡은 건 정유현이었다. 특유의 맑은 음색을 베이스로 긁는 듯한 창법이 더해졌다. 격하게 독무를 추면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라이브가 감탄을 자아냈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텐데도 모든 동작에 망설임이 없었다.
“라이브 맞지, 이거?”
“유현이 씨디 삼켰다, 진짜.”
[Open your eyes]
윤빈을 센터로 한 6명의 연습생이 가사에 맞춰 눈을 가린 천을 벗어 던지며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순식간에 무대가 런웨이가 되었다고 착각이 들 정도였다.
[피하려 할수록 더 가까워져
부정해 봐야 이미 game over]
둘씩 짝을 맞춰서 시작된 페어 안무는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정확하게 동작이 일치했다. 섹시 컨셉의 특성상 웨이브처럼 박자를 맞추기 어려운 동작이 대다수였음에도, 얼마나 연습을 많이 했는지가 느껴지는 합이었다.
[어느새 마주한 시선이
아찔해 맞닿은 손끝이
내가 뭘 원하는지 알잖아
오직 너만이 채울 수 있잖아]
그동안 보여 줬던 빠른 비트의 래핑과는 다른 느긋한 템포의 래핑이 이어졌다. 끈적한 멜로디와 가사에 박선우의 트레이드마크인 동굴 목소리가 더해지니, 위험할 정도로 아찔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쟤는 목소리가 걍 사기야.”
“실제로 들으니까 더 장난 아니다.”
“그니까, 진짜 무대가 울린다는 게 뭔지 알겠음. 발성 대박이다.”
얼마 지난 거 같지도 않은데, 벌써 무대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흐르는 시간이 야속하기만 한 이 자매였다.
[마침내 다가온 이 순간]
박선우의 나지막한 목소리 위에,
[예정된 승리를 외쳐]
정유현의 깔끔한 음색이 더해졌다.
[Checkmate-]
그리고 그걸 이어받는 윤빈의 폭발적인 고음. 처음 보여 준 강렬한 목소리였기에 놀람 반 감탄 반의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하지만 진정한 하이라이트는 그다음이었다. 센터에 서서 고음을 지르는 윤빈을 제외한 5명의 멤버가 단체로 바닥을 쓰는 듯한 웨이브를 한 거다.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웨이브를 하는 모습에 팔로워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선우야, 네가 어떻게 그런 안무를-”
“정유현 미쳤냐고.”
“유현이 골반을 왜 저리 잘 쓰는 건데?”
“안무가 누구냐, 진심.”
“안무가님 카고 바지 입고 다니시라 그래, 주머니마다 현금 찔러드리게.”
바닥 쓸기 안무 후에는 아예 드러누운 연습생들이 오직 허리의 힘만으로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일련의 모든 동작이 충격적일 정도로 자극의 연속이었다.
“아니, 대체 왜 윤빈이만 저 안무 안 하는 건데.”
“윤빈이 저거 했으면 너 실려 갔을 듯.”
[피할 수 없이 가까워져
부정할 수 없는 game over]
무대가 끝났지만, 팔로워들의 함성은 끝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앵콜 소리가 이 무대에 대한 모든 감상을 대신하는 것만 같았다.
격렬한 안무에 연습생들이 호흡을 정리하는 사이, 윤승철이 다시 무대 위로 올라왔다.
“아니, 정유현 연습생.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네?”
“중간에 ‘그 안무’ 뭔가요?”
“저희는 안무가님이 짜 주신 안무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한 게 역시 정유현다웠다. 오히려 옆에 선 윤빈의 귓가가 시뻘게지고 있었고, 그걸 놓칠 윤승철이 아니었다.
“윤빈 연습생은 왜 하지도 않았는데 귀가 빨개지는 건가요?”
“어휴, 제가 했으면 큰일 났을 거 같아서요.”
“그래서 윤빈 연습생만 안 한 건가요? 많은 분들이 아쉬워하실 거 같은데-”
“윤빈이 지켜 줘야 합니다. 저희 팀의 유일한 미성년자인걸요. 그치, 울 애기?”
박선우가 장난스럽게 멘트를 이었다.
“얼굴만 보면 박선우를 지켜 줘야 할 거 같구만.”
“그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둘이 나이 바뀐 듯.”
“언니,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윤빈이 저렇게 보여도 아직 아가라고.”
“너도 진짜 콩깍지 제대로다.”
“하하, 막내를 생각하는 형들의 따스한 마음 잘 알겠습니다. 지금 보니까 의상도 윤빈 연습생이 제일 얌전한 거 같네요.”
“맞아요. 저 지켜 주실 거죠, 여러분?”
주먹 쥔 양손을 턱에 가져다 대면서, 수줍은 척 애교를 부리는 윤빈의 모습에 장내가 초토화되었다. 아직 자기가 다 자란 줄 모르는 대형견을 보는 기분이었다.
“윤빈이 절대 지켜!”
여미지 말라고 했던 몇 분 전의 자신은 이미 잊고도 남은 그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