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벌써 세 번째로 맞이하는 경연 무대.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촬영장에 도착해 먼저 리허설을 진행했다. 매번 느끼지만 리허설이라는 건 참 묘하다. 아무도 없는 관객석을 바라보면서 무대를 하다가, 실제 무대에서 자리를 가득 채운 관객을 마주하면 그 쾌감이 배가 된다. 그래서 나는 리허설이 좋았다. 리허설을 열심히 할수록, 곧 마주하게 될 무대가 더 짜릿해졌으니까.
“‘로즈’ 팀 스탠바이하겠습니다.”
의상만 차려입은 상태로 무대에 올라갔다. 시계탑에서 울리는 괘종 소리가 정적을 깼다. 이어서 낯선 여성의 목소리로 녹음된 인트로 음성이 들려오자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우리가 만든 이야기가 무대 위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리허설 무대가 끝난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이대로만 하면 된다. 본무대에서 딱 이 정도만 해도 무조건 일등이다.
“얘네 진짜 이번에 칼 갈았네.”
“미쳤다.”
“이 팀 오늘 사고 치겠는데?”
“얘들아, 이거 그냥 너희 노래야.”
“너희 이대로 데뷔해도 되겠다.”
그렇게 트레이너들의 쏟아지는 극찬과 함께 리허설을 마치고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지금까지의 무대에서는 헤어 메이크업 쌤들이 해 주는 대로 받았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핸드폰에 스타일링 시안을 준비해 갔다.
“오, 승빈이. 이제 완전 프론데?”
“아, 쌤. 그게 뭐예요~”
“이거 완전 너한테 찰떡일 거 같은데.”
“그니까. 언니, 이거 봐 봐.”
“뭐야, 이거 그냥 승빈이 아냐?”
“쌤들 지금 저 놀리시는 거죠?”
“좀 티나?”
시간이 많이 지나긴 했는지 헤메 쌤들과도 이제는 서로 농담도 던지는 사이가 되었다. 짧은 시간에 수십 명의 연습생을 다 케어 하면서도 항상 에너지 넘치는 모습에 나도 함께 힘을 얻었거든.
“그럼 베이스는 최대한 창백하게 한다?”
“네, 뱀파이언데 섹시해야 해요.”
“어휴, 승빈이가 이제 섹시 컨셉도 하고 다 컸네.”
“쌤, 저 1차 경연 때도 섹시했거든요?”
“미안, 그때 나 도현이밖에 안 봄.”
“쌤, 감사해요~”
“어머, 도현이 쟤는 귀도 좋다, 얘.”
큰소리도 아니었는데 진짜 어떻게 들은 걸까. 여기서 강도현의 얼굴도 안 보이는데 목소리만 들릴 정도였다.
“와~ 대박. 완전 배신이다 진짜.”
“자, 고객님. 입 좀 잠깐 다물어 주실게요. 베이스 바릅니다.”
장난 치면서도 닿는 손길이 분주했다. 역시 프로다 이건가. 창백할 정도로 하얀 얼굴에 붉은 눈화장, 입가에는 피를 흘린 듯 핏빛 버건디 색의 립을 살짝 번지듯이 발랐다. 세심한 손길에 잠깐 졸았다고 생각했는데, 눈떠 보니 이미 화장이 끝나 있었다.
“잘 잤니? 그럼 이제 눈 좀 떠 볼까?”
뱀파이어 메이크업의 화룡점정을 찍어 줄 렌즈. 푸른빛이 살짝 도는 회색 렌즈를 끼자 거울 속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와, 승빈이 이번 컨셉 대박인데?”
“하얀 줄은 알았지만, 너 진짜 하얗구나?”
“이번에 뿌염까지 해서 백발도 깔끔하고.”
“쌤, 이거 완전 연예인 머리잖아요-”
“잘 어울릴 거 같아서 쉼표 머리 한번 해 봤는데, 내 생각보다 더 잘 어울린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멤버들도 세팅을 마친 상태였다.
“재봉아! 우리 재봉이 어디 갔어!”
“와, 재봉이 완전 로미오 그 자첸데?”
“지운이 형은 걍 뱀파이어다.”
“아니, 같은 화장을 했는데도 다 이렇게 다를 일이야?”
극과 극은 오히려 통한다고 했던가. 제일 걱정했던 재봉이와 지운이 형의 합이 기대 이상이었다. 소년 로미오를 그대로 형상화한 것 같은 박재봉과, 퇴폐 그 자체의 뱀파이어인 지운이 형. 둘이 같이 서 있기만 해도 우리 팀의 무대 컨셉이 전부 설명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뱀파이어를 컨셉으로 잡은 게 신의 한 수였다. 다른 팀도 다 무대를 위한 헤어 메이크업이 끝난 상태였는데, 우리 팀이 가장 눈에 띄었다. 시각적인 비주얼의 강렬함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연습생들도 우리를 보면서 부러워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투마월에 참가한 이후 가장 자신 있는 무대가 시작되었다.
* * *
“나 이런 데 처음 와 봐.”
“그 말, 벌써 백번은 더 한 거 같아.”
“너무 덕질 안 해 본 사람 같나?”
“틀린 말은 아니지?”
“근데 너무 오래 기다리는 거 아니야? 원래 다 이래?”
“새벽 사녹할 때는 거의 매번 이러는데?”
꼭두새벽부터 씨넷 일산 촬영장 앞에 줄선 이수정과 동생이었다. 2차 경연 현장 참여단에 광탈했지만, 3차 경연 참여단에는 둘 다 당첨됐다. 아이돌 덕질이 처음인 수정은 그 흔한 콘서트조차 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무한정 대기하는 현장이 적응이 안 됐다. 일찍 가서 줄을 서야 한다는 동생의 말에 제시간에 맞춰 가면 되는 거 아니냐는 소리를 했다가 경멸의 눈빛을 받았던 게 바로 어제 일이었다.
“이게 콘서트면 어차피 자리가 정해져 있으니까 시간 맞춰서 가지. 근데 이건 줄 선 순서대로 들어가는 거라고. 애들 명당에서 봐야 하는데 일찍 와야지.”
“아니, 그런 건 안 알려 주잖아.”
“하긴 현장 참여단 준비물 이런 거나 검색하고 있었으니-”
“가이드 같은 게 있을 줄 알았지!”
그동안 자신이 더 열심히 투마월 덕질을 해서 실감 못 했는데, 역시 아이돌 덕질 처음인 게 이런 데에서 티가 났다.
“그리고 일찍 오니까 여유롭게 슬로건이랑도 받아 갈 수 있었잖아.”
“그니까. 이거 너무 예쁘지 않아? 나 여기 홈 사진 너무 좋아하잖아.”
이미 가방 가득 박재봉 굿즈로 가득한 그녀였다.
“‘레빗드림’ 사진 잘 찍지. 만우절 날 윤빈이 찍은 사진 올렸는데 나 그거 아직도 배경 화면이잖아.”
“나 그날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재봉이 덕질 그만두신 줄 알고.”
“그래서 그날 온종일 저기압이었던 거야? 푸하하!”
“나도 흑역사인 거 아니까 조용히 해.”
기나긴 대기 시간에 벌써 여기저기서 주저앉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바닥에 방석을 까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다들 주섬주섬 간이 의자를 꺼내서 펼치는 모양새가 제법 자연스러웠다.
“와, 아예 의자도 들고 다니네?”
“왜, 언니 벌써 다리아파?”
“조금?”
“말하지, 이거 펼쳐서 앉아.”
“대박, 너도 가지고 다녀?”
“오프 뛸 때는 필수야. 바닥에 앉으면 엉덩이 배긴다.”
언제 이렇게 큰 건지. 오늘만큼은 네가 언니 하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능숙한 동생의 모습이 마냥 신기했다. 도라에몽 가방이라도 챙겨온 건지, 동생 수진의 가방에서는 뭐가 자꾸 나왔다. 얘랑 같이 와서 그나마 버텼지, 혼자였으면 시도조차 못 해 봤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진짜 열정적으로 사는구나. 이곳의 모든 것이 새로운 그녀였다.
“그래도 이제 삼십 분 후면 입장 시작이네.”
“헐, 벌써 그렇게 됐어?”
“내가 말했지. 투마월 얘기하면 시간 금방이라고.”
“아니, 근데 얼마나 됐다고 벌써 3차 경연이냐.”
“그니까. 이제 3회밖에 안 남음.”
“투마월 끝나면 매주 무슨 낙으로 사냐고.”
“재봉이랑 윤빈이 데뷔하면 신인 덕질해야지.”
“둘 다 데뷔하겠지?”
“응, 무조건임.”
“왜 그렇게 확신해? 재봉이 최근에 순위 떨어져서 쫄리는구만.”
“언니, 내가 좋아한 애 중에 안 뜬 애가 없어. 내기할래?”
“무슨 내기까지. 네네, 믿습니다. 이수진 씨-”
2차 순발식을 보다가 숨넘어갈 뻔한 수정이었다. 재봉이가 애써 덤덤한 척을 하면서 소감을 말하는데, 마이크를 잡은 손이 떨리는 걸 숨길 수는 없었다. 재봉이가 뭔가 실수를 하거나 한 것도 아니라 더 충격적이었다. 한결같이 잘하고 있는데도 순위가 하락한 거면, 뭘 더 해야 하는 거지? 지켜보는 그녀도 이렇게 막막할 지경이었는데, 당사자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하도 그녀가 충격을 받아서 그녀의 동생은 최애인 윤빈이 1위를 했는데도 기뻐하는 티도 낼 수가 없었다.
“두 줄로 입장하실게요. 뛰지 마세요. 다칩니다!”
다시금 그날의 충격에 빠질 때쯤, 드디어 입장이 시작됐다.
“미친, 무대 넓은 거 봐.”
“대박이다.”
“언니, 이 정도면 우리 펜스도 잡겠는데?”
“펜스? 펜스가 뭐야?”
“저기 제일 앞에 막아 둔 거 있잖아. 무대 바로 앞에.”
내부로 들어오니 저 멀리 무대가 보였다. 그녀들의 순서는 2n번 대. 수진의 말처럼 잘하면 중간은 아니더라도 사이드 1열은 넘볼 수 있을 번호였다. 당첨 문자와 신분증을 대조한 후 마침내 그녀의 손목에는 입장 손목띠가 둘러졌다.
“대박, 이거 핑크 완전 재봉이 색깔 아니냐.”
“어휴, 핑크색만 보면 그냥 다 재봉이지?”
“그러는 지는. 늑대, 호랑이 뭐, 다 윤빈으로 모에화 하면서.”
쫑알거리면서도 두 줄은 맞춰 서는 그녀들이었다. 마침내 입장이 시작되고, 수진의 예상대로 둘은 중앙에서 약간 벗어난 왼쪽 사이드 펜스를 잡았다.
“미쳤다. 진짜 저기서 애들이 무대 하는 거야?”
“응, 언니 그리고 애들 입장 왼쪽에서 할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
“나 여기 전에 다른 애 덕질할 때 와 봤어.”
“일산까지?”
“어, 그때 거의 매주 온 듯.”
“체력 무슨 일이냐며.”
“암튼 그래서 저쪽에 문 보이지? 저기가 대기실이랑 연결된 문이야.”
“헐, 대박. 저기서 애들 나오는 거임?”
“응, 그니까 이따가 잘 봐 봐. 운 좋으면 대기할 때 인사받을 수도 있어.”
안 다녀 본 방송국이 없는 수진이었다. 여유롭게 자리를 잡고는 펜스 앞으로 슬로건을 걸어 두기까지 했다. 집에서 미리 작업해 온 슬로건은 3개가 옷핀으로 연결되어 있어 얼핏 보면 담요처럼 보일 정도였다.
“언니, 이거 언니 꺼.”
“이거 마스크 아냐?”
“응, 언니 일코 한다며. 펜스라 방송에 얼굴 잡힐 수도 있음.”
“와, 생각지도 못했다. 고마워.”
안 그래도 최근에 인턴을 시작한 그녀였기에, 여기 오면서도 온갖 걱정을 다 하기는 했다. 아는 사람 만나면 어떡하지, 회사 사람 마주치는 거 아닌가. 10화가 한 주 미뤄지고 스페셜 방송을 하면서 촬영이 주말로 미뤄져서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인턴 주제에 휴가 쓰고 나와야 할 뻔했다.
“얼른 펼쳐 봐.”
“왜? 촬영 시작하면 껴도 되는 거 아냐?”
“아, 얼른 봐 봐.”
“그냥 마스크 아냐?”
“…미친.”
넘겨받은 마스크를 펼치자 보이는 화려한 글씨.
‘♥봉봉♥’
큰 글씨는 아니었지만, 슬로건에 적힌 것처럼 반사되는 재질로 적혀 있어서 빛을 받을 때마다 번쩍거렸다.
“이런 것도 팔아?”
“응, 내꺼 슬로건 제작 맡기면서 같이 주문해 봤음.”
“와, 진짜 덕질의 세계는 끝이 없다. 끝이 없어.”
“그거 돈 더 추가하면 캐릭터도 넣을 수 있던데 나중에 한번 봐 봐.”
“대박. 나중에 토끼도 하나 박아야겠다.”
“씨넷 진짜 방청객 반응 얼빡으로 잡잖아.”
사회적 지위도 지킬 수 있으면서 재봉이 팬인 거까지 보여 줄 수 있다니. 그녀에게는 둘도 없는 최고의 아이디어 상품이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To My World’ 시즌 2 엠시 윤승철입니다.”
“아니, 윤승철 듬직한 이미지 아니었음?”
“왜?”
“겁나 말랐는데? 티비가 진짜 부하게 나오나 봐.”
“맞아. 연예인들 실제로 보면 겁나 말랐음.”
티비로만 보던 윤승철이 등장하니 이제야 투마월 방청에 온 게 실감이 났다. 연예인은 연예인인지, 별로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한 얼굴이었는데도 그냥 빛이 났다.
“어느덧 중반을 넘어간 투마월, 다들 재밌게 보고 계신가요?”
“오늘은 세상에서 가장 먼저, 여러분께 신곡 무대를 보여 드리게 되는데요.”
“처음 듣는 노래인 만큼, 각 연습생이 어떻게 무대를 만들었을지 기대되시죠?”
“각양각색의 무대로 채워진 3차 경연, 지금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