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58화 (58/346)

58화

중간 평가를 마치고 다시 연습실에 모였다. 킬링 파트를 두고 다들 고민이 많아 보였지만, 선뜻 파트를 바꾸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먼저 말을 꺼낸 건 박재봉이었다.

“저는 킬링 파트… 다른 분이 하는 게 맞다 생각해요. 연습 기간도 얼마 안 남았고, 무대 퀄리티를 위해서라도.”

하지만 박재봉이 여기서 킬링 파트를 놓친다면 하트창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인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건 막아야 했다. 상태창과 관련해서는 최대한 파악을 해야 나에게도 유리할 테니까.

“난 반대. 우린 모두 네 실력을 알기 때문에 킬링 파트를 맡긴 거야. 오늘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았다고 개선의 여지도 없이 포기한다는 건 동의 못 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 재봉아. 오늘 들은 조언대로 연습을 더 해 보는 건 어떨까?”

박재봉의 마음을 돌려 놓으려고 평소보다 더 단호하게 얘기했지만, 순간 아차 싶긴 했다. 자칫하다가는 독단적으로 보일 위험이 있었다. 다행히 다른 팀원들도 바로 동의해 줘서 다행이었다. 소년에서 뱀파이어로 변하는 걸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 주는 게 바로 그 킬링 파트였기 때문에, 이미지상으로도 박재봉이 하는 게 제일 임팩트 있는 건 맞았으니까.

팀원 전체가 반대하니 박재봉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겠다고 판단했는지 한 걸음 물러섰다.

“최선을 다할게요. 하지만 제가 계속 제자리걸음이거나, 만족스러운 무대를 못 보여 주면 그때는 꼭 다른 분이 킬링 파트… 해 주세요.”

그렇게 논의를 마치고, 다시 연습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팀원들의 연습을 도우면서 나는 마침내 발견했다. 하트창이 발현되는 기준, 그건 바로 물리적인 접촉이었다. 어떤 형태로든 나와 물리적 접촉이 일어나는 순간, 상대의 하트창이 활성화되어 볼 수 있었다.

지쳐서 연습실 바닥에 드러누운 지운이 형을 일으켰을 때, 같은 조인 김수환 연습생의 복식 호흡을 돕기 위해 손을 댔을 때 각각 하트창이 나타났다.

그걸 발견한 후 바로 데뷔권 연습생들에게 접근했고, 손금을 봐 주겠다는 되도 않는 핑계를 대며 하트창을 확인했다. 윤빈과 강도현은 각각 [♡80%], [♡75%]였고 선우 형도 [♡77%]로 상당히 높았다. 그에 비하면 박재봉은 여전히 40%대였다.

‘데뷔권 7명 중에 박재봉만 저렇게 낮을 수가 있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중간 평가에서 안 좋은 평가를 받은 다른 연습생의 하트창도 확인해 봤다. 그리고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그들 모두 적어도 50%는 넘었다. 만약 자신감의 문제라면 박재봉보다 더 심하게 악평을 들었고, 떨어질 가능성도 높은 연습생들의 포인트가 더 낮아야 할 것이다.

‘자신감의 문제도 아니면 도대체 뭐지?’

뭔가 풀릴 듯 풀리지 않아 더 답답했다. 반짝이는 하트창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 * *

밤샘 연습의 연속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 기상 송을 연습실에서 듣는데, 뜻밖의 공지가 나왔다.

“연습생 30인 전원은 1층 본관에 부착된 안내문에 따라 장소를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뭐야?”

“또 뭘 시키려고?”

이제 의심부터 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직 3차 경연도 안 했는데 콘텐츠로 찍을 만한 게 있나? 싶기도 했다.

온갖 의심을 품은 채 본관에 도착하니 컨셉별로 모이는 장소가 달랐다.

“이번엔 뭘까요?”

“그러게 말이다.”

“또 이상한 게임 시키는 건 아니겠죠?”

“방을 서로 다르게 한 이유가 있을까요?”

이쯤에서 했던 이벤트가 뭐가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방송에 안 나왔던 이벤트인 건가?

지정된 장소에 팀원들과 가 보니 테이블 위에 각 연습생의 이름이 붙은 상자가 있었다. 투명한 플라스틱 상자여서 내부가 보였는데, 메모지로 가득했다.

“메모지?”

“뭔가 쓰여 있는 거 같은데?”

“가서 읽어 봐도 돼요?”

스태프들은 순서대로 메모지를 확인하게 했다. 첫 순서는 박재봉이었다.

“먼저 가 볼게요!”

“재봉아, 너 이름 있는 상자에서 메모지 몇 개 꺼내서 카메라 보고 읽어 주면 돼.”

“네!”

상자에 손을 넣고 몇 번 휘적이던 박재봉이 메모지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눈으로 빠르게 읽더니 복잡미묘한 얼굴이 되었다.

“어……?”

“왜 그래? 뭐라고 쓰여 있어?”

박재봉은 대답 없이 메모지 몇 개를 더 꺼내 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칭얼거렸다.

“아, 뭐예요! 저 이런 거 잘 못 하는데-”

“뭐야 궁금해!”

목을 가다듬더니 메모지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재봉아. 너는 키는 작지만, 무대 위에서 누구보다 큰 천재 아이돌이야.”

“키는 작지만? 풉!”

“아, 형 웃지 마요! 나도 겨우 참았는데-”

“누가 쓴 거야?”

“연습생들이 쓸 만한 내용은 아닌 거 같지?”

“아무래도 그렇죠?”

알고 보니 팬들이 적은 댓글과 응원 글을 모아 둔 상자였다. 투마월에서 이렇게 훈훈한 콘텐츠를 기획했을 줄이야. 악플 읽기 같은 게 더 어울릴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지난번 지운이 형 관련한 반응들이 이슈를 끌다 보니, 이런 컨텐츠를 새로 기획한 것 같았다. 감동 서사 맛이 달달하긴 했겠지.

“재봉아, 비록 네가 정체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와도 언제나 응원할게. 무대를 위한 네 노력과 열정은…….”

울컥했는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눈물을 참는 듯했다.

“네 노력과 열정은 우리가 알아. 그러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훌쩍, 꼭 데뷔하자!”

“아이고, 재봉이 또 우네.”

“이거 다 가져가도 돼요?”

벌써 상자를 양손으로 들었다 내려놨다 하던 박재봉이 스태프에게 물었고, 오케이 사인을 받자마자 상자를 품에 안았다.

며칠 만에 되찾은 웃음이었다. 어찌 보면 지금 박재봉에게 가장 필요한 선물이었을 지도 모른다.

“다음은 문승빈 연습생 가 주세요.”

“네.”

원래 잘 우는 성격이 아니지만, 대놓고 감동 받으라고 만든 콘텐츠니 약간의 눈물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

“투마월의 목소리 승빈아, 세상 제일 사랑스러운 와기… 아기 강쥐야, 꼭 데뷔하자.”

인터넷 용어는 알아서 교정해 주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필터링 없이 공개할 줄은 몰랐다.

“승빈아, 아이돌이라는 힘든 길을 선택해 줘서 고마워. 덕분에 너를 만날 수 있어서 늘 감사해.”

적당히 연출하려고 했는데 순간 감정이 올라왔다. 망돌 2년을 보내고 배우로 성공하면서 다시는 아이돌은 눈길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 순간이 있었다. 그런데 결국 돌고 돌아 또 아이돌의 길을 가고 있고, 분명 힘들지만 매 순간 후회는 없었다. 나는 그저 내가 포기하지 못한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고맙다고 말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큰 행운인가?

결국 6명 모두 울컥하는 시간이었다. 다들 이전과는 분위기나 각오가 달라졌고, 훈훈해진 마음을 품고 다시 연습실로 돌아왔다. 박재봉은 아직도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상자 속 메모지를 하나하나 꺼내 읽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

“저는 정말 몰랐어요, 이렇게 많은 분이 제 노력을 알아 주는지.”

“내가 말했잖아. 걱정하지 말라고.”

“사실 요즘 팬분들 반응을 거의 안 봤거든요.”

“너 혹시 악플 챙겨 보고 그런 거야?”

“그건 아니고…….”

문득 연습하다가 박재봉의 위튜브 시청 기록에 뜬 썸네일이 생각났다.

[벌써 센터빨 다 떨어진 투마월 박재봉]

까튜브라고 까빠들과 안티, 어그로들의 메카라고도 불리는 채널의 영상이었다. 그때는 어쩌다가 알고리즘을 잘못 눌러서 그랬거니 했는데, 자초지종 들어 보니 그게 아니었다.

“자꾸 등수가 떨어지니까 저한테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뭔가… 좋은 말보다는 쓴소리를 찾아다녔던 거 같아요. 그게 저를 객관적으로 보는 사람들의 의견이라고 생각했어요.”

“야, 무슨 그런 바보 같은!”

“…….”

박재봉을 혼내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다.

“재봉아, 사람 미워하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인 줄 알아?”

“네?”

“너 지금 밖에 나가서 누구랑 부딪혔다고 생각해 봐. 바로 그 사람 짜증 나질걸? 근데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사람의 장점을 찾는 데에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해. 넌 지금 널 좋아하는 사람들의 노력은 뒤로하고, 쉽게 욕하는 사람들의 말에만 귀를 기울인 거잖아.”

내 말을 들은 박재봉은 한동안 멍한 얼굴이었다. 박재봉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맑은 물이 담긴 컵에 검정 물감이 단 한 방울만 떨어져도 전부 탁해지는 것처럼, 백 마디의 좋은 말보다 한 마디의 나쁜 말이 기억에 더 오래 남기 쉬우니까.

하지만 내가 티벡스 시절을 돌이켜 볼 때 가장 후회가 되는 것이 무관심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의 말에 휘둘려서 더 열정적으로 활동에 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보답하는 마음으로 무대에 올라야 했는데.

“맞아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저를 응원해 주고 있는데…….”

“모두의 기준을 충족할 수는 없어. 하지만 너를 조건 없이 좋아하는 사람은 있잖아? 그 사람들한테 보답하는 건 최선을 다하고,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거야.”

“고마워요, 형. 이제 좀 알겠어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2차 순발식이 끝나고 매일 어딘가 불안해 보였던 박재봉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렇게 한 번 각성의 순간을 거치면 누구보다도 똑똑하게 처신하는 걸 알기 때문에 안심했다.

그리고 드디어 하트창의 비밀도 풀렸다.

[♡60%]

대화에 집중하느라 뒤늦게 발견했는데, 박재봉의 하트창이 60%로 채워져 있었다. 아직 다른 데뷔권 연습생들에 비해서는 낮은 포인트지만, 앞으로 더 빠른 속도로 채워질 것이다.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하트창은 자신이 느끼는 대중의 관심도를 나타낸 지표였다. 실질적인 대중의 관심이 높더라도 스스로 알지 못한다면 낮은 포인트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과거의 박재봉처럼.

이후 연습에서는 하트창 포인트의 상승이 주는 효과를 느낄 수 있었다. 이전보다 확실히 실수도 줄어들었고, 무엇보다 킬링 파트에서 이전과 같이 시선을 끄는 힘이 생겼다.

“오, 재봉이 표정 봐.”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혔나 봐?”

“완전 딴 사람 같아!”

“형들이 많이 도와줘서 그런 거죠!”

이로써 지금까지 박재봉이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이유도 풀렸다. 다른 능력의 스텟치가 올라간 상태라도 하트창의 포인트가 떨어지면 제 효력을 다 하지 못하는 거였다. 게임에서의 스태미나, 즉 피로도와 같은 역할인 셈이다.

과연 이 하트창이 ‘100%가 다 차면 어떻게 될지’, ‘한 번에 얼마나 올라갈 수 있는지’와 같은 내용은 아직 모르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 파악한 것만 해도 충분했다.

비록 박재봉 눈에는 안 보일 하트창이었지만, 뭔가 답답했던 게 해소되는 걸 느꼈는지 훨씬 편해진 모습이었다. 한동안 억제되었다가 분출되어서 그런가, 전보다도 더 에너지가 넘쳤다. 핸드폰을 보는 시간은 줄어들고, 상자 속 메모지를 보는 시간이 늘었다.

이후 이뤄진 최종 점검에서 트레이너들도 박재봉의 변화를 바로 알아봤다.

“와, 재봉이 진짜 많이 좋아졌네?”

“이제 센터에서 끼도 잘 부리고.”

“감사합니다!!”

“재봉이 너는 팀원들한테 항상 고마워해야 해. 알지? 킬링 파트 하고 싶은 애들도 많았을 텐데 다 너 믿고 킬링 파트 맡긴 거니까.”

“당연하죠! 매일 고맙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 고마움 표현이 가끔 너무 과할 때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난 진짜 너희 팀 모두에게 감동이야. 지독한 경쟁의 순간에서 이런 모습을 보일 수가 있다니.”

서재인 트레이너의 마지막 말이 모두의 심금을 울렸다. 울컥하는 마음을 다잡고 서로 잡고 있던 손을 한 번 더 꽉 쥐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이 전달되는 것만 같았다.

“다들 수고 많았다. 경연 날까지 긴장 풀지 말고 더 완벽하게 준비해야 한다?”

“네!”

모두의 머리 위 하트창이 앞 다투어 반짝였고, 혼자 보는 게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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