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원래 ‘기다릴게’ 무대는 시간 여행자를 컨셉으로 했는데, 몰입할 수 있는 새로운 스토리를 잡기로 했다. 신곡 미션이라 다른 경연 때처럼 있던 가사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니, 기존의 가사에 어울릴 만한 스토리를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청춘예찬 무대에서는 무대 소스를 위한 정도였다면, 이번에는 무대의 큰 축을 담당하는 거다.
우선 다 같이 가사를 다시 분석해 봤다.
“가사를 보고 떠오르는 영화나, 드라마 아니면 책도 괜찮아.”
“뭐든지 던져 보자.”
[아직은 어려 보일지라도
난 더 이상 소년이 아닌 걸
이 시계 초침을 나침반 삼아
원형의 그 시간을 달려갈게]
“시계가 나온 거 보면 뭔가 시간이랑 관련된 걸 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다시 만나는 순간에
모든 걸 말해 줄게
설명하기엔 너무 벅찬
내가 달려온
네가 기다려 온 시간을]
“뭔가 오랜 시간 서로 기다린 거 같은데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같은 건 어때요?”
“이뤄질 수 없는 사랑? 로미오와 줄리엣이 먼저 떠오르네.”
“로미오와 줄리엣은 대중적인 스토리니까 무대 이해하는 데 쉽지 않을까요?”
“그러게. 그럼 로미오와 줄리엣은 일단 후보로 올려 두자.”
[붉게 피어나는 love
한 송이 꽃처럼
흩어지더라도]
“여기는-”
“뭐가 딱히 떠오르는 건 없는데.”
붉은색, 꽃, 흩어지는 모습. 이 세 가지와 잘 어울리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던 중에 박재봉이 핑거 스냅을 하며 외쳤다.
“뱀파이어!”
“뱀파이어?”
“네! 붉은색이랑 잘 어울리고, 햇빛을 받으면 흩날리듯이 사라지잖아요. 그리고 불멸의 존재니까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살아 있고요.”
“맞네!!”
박재봉이 뱀파이어로 물꼬를 트니 스토리 아이디어가 샘솟았다.
“그럼, 로미오와 줄리엣에 뱀파이어를 합치는 거 어때?”
“그 둘을요?”
“응, 로미오가 약을 먹고 쓰러지잖아. 그런데 그 순간 뱀파이어가 되어 살아나는 거지. 그리고 죽은 줄리엣이 환생할 때까지 기다린 거야.”
“형, 드라마 작가세요?”
“좋은데요? 로미오와 줄리엣이랑 뱀파이어를 엮을 거라고는 예상 못 할 테니까요.”
“소년 소녀이던 로미오와 줄리엣이 뱀파이어로 다시 만나는 것도 시간이랑 엮을 수 있을 거 같아.”
사실 박재봉이 ‘뱀파이어’를 말했을 때 속으로 유레카를 외쳤다. 왜냐? 나는 이미 뱀파이어 컨셉을 했었으니까. 비록 여름에 나와서 망하긴 했으나, 뱀파이어 스타일링만큼은 내게 아주 잘 어울렸었다. 은발에 버건디의 조합은 말해 뭐 하냐고. 여기에 연기적 요소까지 결합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인 셈이었다.
“그럼 기존 안무에다가 뱀파이어를 연상시킬 만한 제스처를 추가할까요?”
“그래, 안무 자체를 싹 다 바꾸는 건 어색할 테니까.”
“처음에 눕는 동작으로 시작하잖아요. 그때 다들 뱀파이어 자세를 하는 거 어때요?”
무대에 대한 컨셉과 스토리가 분명해지니 보컬에 대한 고민도 줄어들었다. 그리고 달리 생각하면 보컬 연습을 할 때, 더 자유로워진 셈이었다.
‘컨셉이 뱀파이어라서 섹시해야 하지만, 로미오의 소년다움도 가져가야 해.’
두 가지를 어떻게 같이 표현해야 할까 고민하던 중, 1절과 2절에 변화를 주기로 했다. 1절은 뱀파이어가 된 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로미오이니 소년스러움을 더 강조하고, 2절부터는 뱀파이어의 섹시함을 강조하는 거다.
원래 보컬 스타일은 소년스러움을 표현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섹시함 역시 킬러 경연 때 어느 정도 방법을 찾았다. 그때와 다르게 표현할 방법이 뭘까 고민을 하면서 참고가 될 만한 아이돌 보컬들의 무대를 분석했다.
그렇게 여러 보컬의 창법과 톤을 연구하면서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연습을 하니, 노래 스텟이 느리지만 한 단계씩 올라갔다.
* * *
어느덧 중반을 넘어간 투마월의 인기는 일반인뿐만 아니라, 유명인들 사이에서도 뜨거웠다. 하지만 덕밍아웃을 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부부가 나타나기 전까진.
[투마월 덕밍아웃한 모모N보보] 조회수 340876
방금 모모 앤 보보 스튜디오 계정에 글 올라온 거 봤음?ㅋㅋㅋㅋㅋㅋ 여기 부부가 운영하는 디자인 스튜디오인데 서로 다른 연습생이 최애인가 봄ㅋㅋㅋㅋㅋㅋㅋ
(박선우, 정유현 사진)
[안녕하세요. 모모입니다. 저희 부부의 경쟁심에 불을 지펴 준 뮤즈들. 이렇게 창작 욕구가 불타오른 건 오랜만입니다. 서로 더 좋은 광고를 걸어 주겠다고 열심히 작업한 결과가 내일 합정역에 게시됩니다. 보고 더 좋은 광고에 투표해 주세요. 일주일 화장실 청소 당번을 걸고 한 대결인 만큼 신중하고 공정(유현)한 투표 부탁드립니다.
#정유현 #박선우 #투마월]
그리고 이건 남편분인 보보님이 작성한 댓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안녕하세요, 보보입니다! 공정한 투표하자고 해 놓고 모모 님이 대놓고 홍보를 하고 갔네요ㅡㅡ 화장실 청소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박선우 연습생 투표 꼭 부탁드립니다! 매일 씨넷 홈페이지에서 투표 가능하고, 씨더스타를 통해서도 투표권 얻을 수 있습니다^^]
-모모N보보 스튜디오 미쳤네;;
┕나 저기 작업물 ㅈㄴ 좋아하는데ㅠㅠㅠ
┕유명 드라마랑 영화 포스터는 거의 여기서 제작했잖아
┕팔로워가 150만인 거만 봐도ㄷㄷ
-박선우 정유현 역대급 금손수저네...
┕지광 투어하면서 보러 가야징
-두분 투닥거리는 거 너무 재밌음ㅋㅋㅋㅋㅋㅋㅋ
┕아니 누가 지광으로 대결을 하냐곸ㅋㅋㅋㅋㅋㅋㅋ
┕ㅈㄴ능력 있고 돈 있는 금손이라서 가능한 거 아니냐
-투마월 안 보는데 모모앤보보는 못 참지
┕ㅇㅇ 나도 디자이너님들 팬이라서 보러갈랰ㅋㅋ
흥행한 영화와 드라마 포스터는 죄다 이들의 손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인지도와 인기를 가진 부부였기 때문에 큰 화제가 됐다. 소식이 빠른 선우 형이 이 일을 모를 리 없었고, 형의 반응도 굉장했다.
“미친, 내가 꿈을 꾸나?”
“저 디자이너분들 팬이에요?”
“당연하지!! 이분들이 작업한 영화 드라마 포스터는 다 봤는데!!”
“대박이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연신 볼을 꼬집어 대는 걸 말리느라 애를 먹었다. 내심 부러운 마음도 있었다. 확실히 유명인의 픽이 되면 홍보 효과는 엄청나니까.
“나도 가서 보고 싶다.”
“이번 경연 끝나고 한번 보러 가요.”
“지난번 약속 안 잊었지?”
“기억력도 좋아.”
“당연하지~ 광고 보러 처음 가는 거고, 거기다가 내 존잘님이 걸어 준 광고인데.”
그렇게 모모N보보 스튜디오 공식 계정에는 투표 글이 올라왔고,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지만, 참여자가 2천 명을 넘어가고 있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확실히 SNS의 특성을 잘 활용하는 사람들이었다. 지정 해시태그를 만들어서 한눈에 사람들의 참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인증 사진을 통해 광고 디자인을 봤는데 퀄리티가 남달랐다. 전문가의 손에 최애를 향한 애정까지 들어가 있으니 일반 팬들이 제작한 광고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었다.
[빛을 담은 소년, 정유현 연습생을 응원합니다.]
모모 디자이너의 디자인은 블랙 앤 화이트가 주가 되어 모던하면서도 깔끔한 느낌을 줬다. 문구처럼 오직 정유현만 빛을 받은 듯 컬러로 되어 있었고, 그 외의 모든 게 흑백 처리 되어 있었다. 폰트도 정갈하고 딱 인물에게 집중할 수 있으면서도 세련된 디자인이었다.
[앞으로도 함께할 선우와 우리의 사계절]
반대로 보보 디자이너의 디자인은 색감부터 밝은 톤이었고, 여러 효과가 들어가서 귀여우면서도 동화 같은 느낌을 줬다. 가운데에 위치한 사진 주위로 박선우와 관련된 키워드들이 마치 문양처럼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두 분 작업 스타일 다른 거 너무 잘 보옄ㅋㅋㅋㅋㅋㅋ
┕진짜네 그동안은 중간지점으로 작업하신건갘ㅋㅋㅋㅋㅋ
-모모님은 딱 톤앤매너 지키면서 깔끔한 스타일이고 보보님은 아기자기하고, 동화 같은 분위기 잘 내는 거로 유명하잖아.
-난 모모님 작품이 더 마음에 들어
┕맞아 그리고 유현이의 단정한 이미지하고 찰떡인 듯.
┕모모언니 진짜 센스 미쳤음ㅠ 유현이 캐해 제대로인듯
-보보님 디자인 너무 취향이뮤ㅠㅠㅠ
┕어린왕자 느낌 나고 존예ㅠㅠ
┕아니 같은 남자가 봐도 선우는 요정인가 봄;;
-두 분 최애도 극명하게 정반대 이미지인 애들인 것도 웃김ㅋㅋㅋㅋㅋㅋㅋ
┕긍까ㅋㅋㅋㅋㅋㅋ 누가 누구픽인지 말안해도 알거같음ㅇㅇ
* * *
‘모모N보보 스튜디오’의 주인장 부부는 투마월 9화를 기다리며 SNS에 올린 투표 현황을 확인하고 있었다. 49% 대 51%로 막상막하였지만 모연이 근소하게 지고 있었다. 모연은 점점 목이 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막상막하인데?”
“그래도 아직은 내가 이기고 있어.”
“너무 조잡하게 만들었어.”
“누나는 너무 심심하게 만들었어.”
“심플 이즈 더 베스트 모르니?”
“선우는 통통 튀는 매력이 크니까 그렇게 한 거지.”
“말이 짧다?”
“…요.”
“선배한테 말이 많다?”
“졸업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선배 노릇 하고 있어요?”
“그야 난 10년이 넘었고 너는 겨우 5년 됐잖아.”
“와, 그럼 그렇게 새파랗게 어린 후배 이겨 보겠다고 퇴근하고 나서도 맨날 새벽까지 디자인했던 거예요? 무슨 선배가 그래.”
“지는 작업 시간에 몰래 하다가 걸려 놓고는?”
모연의 말을 듣던 보현은 머쓱한 듯 안주나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승부욕이 강한 모연은 지게 된다면 화장실 청소를 하게 된다는 것보다도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갈 것을 더 걱정했다. 그리고 최애인 유현에게 다른 광고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선물을 해 주고 싶었기 때문에 꼭 이기고 싶었다.
“시작한다, 빨리 와!”
“응!”
벌써 3주째 함께 본방 사수하고 있는 부부였다.
그나마 모연은 해외 배우를 덕질한 경험은 있었다. 그래서 덕질 문화에 어느 정도 정보를 가지고 있지만, 아이돌 덕질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보현은 디자인 이외의 덕질은 아예 처음이었다. 심지어 처음 덕질하게 된 대상이 남자 아이돌이라니. 아직도 가끔 이게 맞나 싶은 보현이었다.
뭐라도 먹어 본 사람이 맛을 안다고, 입덕의 순간은 모연이 조금 더 빨랐다. 그녀는 정유현의 시그널 송 원샷 장면을 보고 바로 입덕했고, 보현은 위튜브 알고리즘에 이끌려 박선우의 1분 PR 영상 랩을 보고 입덕했다.
처음에 둘은 서로의 입덕 사실을 숨겼다. 이 나이 먹고 10살은 어린 애들을 덕질해도 되는가에 대한 고민과 서로가 아이돌 덕질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한 가지 놀림거리가 생기면 뇌절에 뇌절을 하는 서로를 너무 잘 알았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것이 재채기와 사랑 아니겠는가? 모연이 작업 중 몰래 듀얼 모드로 유현의 경연 영상 스트리밍하는 것을 들킨 이후부터는 보현도 완전히 덕밍아웃을 했다.
“이번에 30명 올라가는 거지?”
“응.”
“유현이랑 선우는 떨어질 일은 없겠고.”
“이번엔 유현이가 1등 해야지.”
“선우도 데뷔조 갔으면 좋겠다.”
“떨어지는 애들 너무 아쉽겠다…….”
“그니까. 이젠 다들 정들어서.”
모연과 보현은 이제 사실상 부모의 마음으로 투마월을 보고 있었다. 박선우가 지난 2차 경연으로 완전히 떡상해서 가능해진 평화였다.
사실 이 부부, 처음 서로의 입덕 사실을 알았을 때는 한차례 전쟁이 일어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