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49화 (49/346)

49화

그 넓은 대강당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방송용 리액션마저 고장 날 정도로 충격적인 방식이었던 거다.

“와-”

“그럼 나머지 20명은 연습 다 하고 무대도 못 올라가는 거야?”

“너무해.”

“난 연습할 필요가 없을 거 같은데.”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너 탈락 안 할 거야. 벌써 그런 소리 하지 마.”

매 시즌 이 시스템 때문에 안타까운 연습생들이 발생했다. 노래와 너무 잘 어울려서 분명 무대를 했다면 큰 관심을 받고 팔로워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 2차 순발식에서 탈락해서 무대에 못 오르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3차 경연곡 선정 방식은, 색깔 고르기입니다!”

“저건 또 뭐야?”

이미 3차 경연 관련 통보로 충격을 받은 연습생들에게 더 어리둥절할 얘기가 나왔다.

그리고 바로 무대 위에 레드, 블루, 블랙, 화이트, 핑크색의 팻말이 올라왔다.

“아이돌의 덕목은 바로 컨셉 소화력이죠? 어떤 컨셉을 만나더라도 자신만의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 중요한 미션입니다. 색깔별로 섹시, 큐티, 청량, 힙합, 몽환 컨셉의 노래가 있습니다. 남자 아이돌이라면 모두 한 번씩 해 보게 될 컨셉들이죠. 여러분은 색을 보고 컨셉을 유추해서 곡을 선택하면 됩니다. 곡 선정은 하위권 연습생부터 시작되지만, 상위권 연습생들의 밀어내기가 가능합니다.”

누가 봐도 큐티가 핑크색인 것 같지만 이번 경연 곡 고르기는 윤 피디가 제대로 장난질을 쳐 놨다. 컨셉이랑 정반대의 색으로 배치를 해서, 기대하고 들어간 연습생들의 좌절을 웃음 포인트로 삼았었지.

시즌 2에서는 이렇게 장난질을 쳐 놓고, 시즌 3에서는 또 반대로 컨셉이랑 맞는 색을 묶어 놔서 반전의 반전을 만들어 냈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악마의 재능이었다.

‘몽환 컨셉이 블루였지. 나는 무조건 블루다.’

몽환을 선택한 이유는, 방영 당시 음원이 가장 흥하기도 했고 연기력을 보여 줄 수 있는 컨셉이기 때문이었다. 큐티나 청량 컨셉에서 무슨 연기를 할 수 있겠냐고. 그리고 보컬이 돋보이는 곡이어서 이번에 완전히 메인 보컬은 내 자리라는 것을 팔로워에게 각인시키기 제격인 곡이었다.

“아니, 색별로 노래가 뭔지는 알려 줘야지!”

“선택 잘못해서 진짜 안 맞는 컨셉 가면 망하는 거잖아?”

“그럼 컨셉별 노래를 지금 공개하겠습니다!”

[덤앤더머 : Checkmate]

어느새 마주한 시선이

아찔해 맞닿은 손끝이

내가 뭘 원하는지 알잖아

오직 너만이 채울 수 있잖아]

“대박!”

“덤앤더머면 완전 스타 작곡가잖아.”

“노래 진짜 좋다.”

첫 번째로 공개된 덤앤더머의 ‘Checkmate’는 딱 봐도 섹시 컨셉이었다. 끈적한 멜로디와 함께 공개된 안무 역시 섹시함을 강조하는 포인트들이 많았다.

[모노톤 : 야누스]

짓밟고 찢어 놔 전부 다

날 막는 그 무엇도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순 없을걸

“안무 엄청 빡세네-”

“이게 힙합 컨셉인 거 같지?”

“파워 장난 아니다.”

[캔디쿨 : 예쁘잖아]

날 보는 네 미소가 너무

예쁘잖아

내 손을 잡는 너의 손 너무

예쁘잖아

“이게 큐트네.”

“난 패쓰. 내가 하면 백퍼 욕먹을 듯?”

“안무 따기는 쉽겠다.”

[A.K : Surf.]

네 마음 속 파도 타고 놀래

오직 너만의 서퍼

변덕스러운 네 마음 속

바다를 내 멋대로 서핑

“듣기만 해도 벌써 시원하다.”

“무조건 청량이네.”

[스노우튠 : 기다릴게]

아직은 어려 보일지라도

난 더 이상 소년이 아닌 걸

시계 초침을 나침반 삼아

원형의 그 시간을 달려갈게

“이게 몽환 아니야?”

“가사 무슨 일이야.”

‘몽환’을 처음 들었을 땐 생각 못 했을 도발적인 가사 때문인지 연습생들도 놀란 기색이었다. 스노우튠은 아직 메가 히트곡을 가진 작곡 팀은 아니지만, 케이팝 고인물들에게는 소위 ‘배운 변태’로 알려진 팀이었다.

투마월 유명세와 함께 이 노래가 엄청난 인기를 얻으면서 스노우튠이 일약 스타덤에 올랐지. 그런 의미 있는 곡에 직접 참여하게 되는 것이 신기했다. 시즌 2 데뷔 팀 ‘투샤인’의 데뷔 곡도 스노우튠이 작곡했는데, 그 노래 역시 메가 히트를 기록했다. 저 곡이 우리 팀 데뷔 곡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수없이 생각하고 부러워했었는데 이제는 내가 그 곡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묘하게 소름이 돋았다.

“이번 3차 경연곡을 모두 만나 봤는데, 어떤가요?”

“최고예요!!”

“너무 좋아요!”

“자, 그럼 1차 순발식 50위 연습생부터 색을 선택하겠습니다.”

색깔 선정은 철저히 비밀로 진행됐다. 아예 세트장을 나와서 색을 뽑게 했다. 형에게는 파란색을 좋아한다고 은근히 티를 내긴 했지만, 의도를 이해했을지도 미지수고 1차 순발식 순위가 24위라서 잘못하다간 밀려날 위험이 있었다. 2차 순발식 이후에 재조정이 있으니 일단 여기서는 힘 빼지 말아야지.

“24위, 차지운 연습생. 색깔을 결정했나요?”

“네.”

“그럼 이동해 주세요.”

순서대로 팀을 선택하고, 마침내 내 차례가 다가왔다.

“7위 문승빈 연습생, 결정한 색깔 방으로 이동해 주세요.”

“네.”

블루 방으로 향하는 내내 긴장됐다. 문을 열었을 때 지운이 형이 있을까? 힘 빼지 말자고는 했지만, 그냥 쉽게 갈 수 있으면 좋긴 할 텐데.

덜컥-

“누구야?”

“어? 승빈이다!”

들어오자마자 누가 있는지 스캔을 했고, 지운이 형을 발견했다.

‘지운이 형이다!’

맨날 시련만 주더니 이번엔 조금 쉽게 쉽게 가는구나- 환호하던 찰나, 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겨 주려고 일어나는 건가? 하는 순간 머리에서 피가 식는 기분을 느꼈다.

“지운이 형, 잘 가요-”

배웅 인사를 하는 연습생의 목소리에 숫자를 세 보니 10명이었다. 너무 가혹해서 경우의 수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내가 지운이 형을 밀어내 버렸다.

‘이런 망할…….’

* * *

연습 내내 몸으로는 안무를 연습하면서도, 속이 말이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지운이 형이 파란색을 선택하게 해 달라고 그렇게 빌었는데 이런 식으로 이뤄 주다니, 누군지 모를 신이 장난을 친 게 분명했다.

팀 배정이 끝나고 점심을 먹는데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미안해할 필요 없다고는 했지만, 바로 앞에 지운이 형을 두고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진짜 괜찮다니까? 난 오히려 힙합 하고 싶었어.”

“진짜 타이밍이 어떻게 그렇게 된 걸까요.”

그때 이쪽으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밀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뭔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선우 형과 박재봉이 터덜터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둘 다 표정이 죽상이었다. 보아하니 저기도 색깔 선정을 아주 기가 막히게 한 거 같다.

“내가 섹시?”

“형, 정신 좀 차려 봐요.”

“나 섹시 컨셉에 알레르기 있는데…….”

“핑크에 섹시가 있는 건 좀 의외긴 했어요.”

“급해서 화장실 가는 사이에 성민호가 검은색 방에 들어가는 거 봤는데, 들어가자마자 애가 울상이 돼서 나오더라고? 거기서 눈치채긴 했지만.”

“블랙이 큐트였죠? 그럴 만도…….”

“그래서 아, 이거 색이랑 컨셉이랑 정반대일 수 있구나. 그래서 상큼한 건 절대 하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핑크 고른 건데? 웬걸, 섹시네.”

“근데 한번 들어가면 번복 못 하지 않아요?”

“응, 그래서 성민호도 결국 다시 그 방 들어갔어. 차라리 큐트를 따라 들어갈걸.”

테이블에 엎드려 녹아 버린 선우 형을 보며 박재봉이 해탈한 듯 위로했다.

“형, 큐트하려고 핑크 골랐다가 섹시하게 된 사람도 있으니까 힘내세요.”

“역시 재봉이밖에 없다!”

“형!”

“재봉아!”

갑자기 일어나서 껴안는데 눈물의 상봉 쇼도 아니고-

“형, 재봉이, 윤빈 형 셋이서 섹시 컨셉 한다고 생각하니 흥미롭긴 하네요.”

난리 부르스를 치던 둘이 자리에 앉고 이제 좀 잠잠해지나 싶었는데 윤빈이 폭탄 발언을 했다.

“나도 큐트 해 보고 싶어서 핑크 간 거였는데.”

“네?”

“응?”

“푸웁!”

“악! 형!!”

“아, 미안. 미안.”

아니, 저 형은 무슨 저런 말을 감자탕 먹을 때 하냐고. 박재봉이 질색이라는 듯 화장실로 향했고, 윤빈은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냐며 조금 상처받았다는 표정이었다.

“왜? 나 잘할 거 같지 않아?”

“아오, 밥이나 먹어! 쌍으로 열받게 하네.”

“궁금하긴 하네요… 하하.”

“나 어렸을 때 큐트하다는 말 많이 들었는데.”

얼굴 때문이 아니라 몸 때문에 그런 거라고 말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다.

“지운이 형은 화이트 팀이라고 했죠?”

“응.”

“그래도 힙합이면 형한테 어울리는 노래 골랐네요.”

“응, 근데 상위권 애들이 많아서 조금 불안하긴 해.”

“맞다. 거기에 도현이 형이랑, 김병대 형 있죠?”

“응.”

미안함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나 때문이었을까, 형은 자신이 직접 화이트를 고른 것처럼 말했다. 양가감정이 오갔다. 힙합 팀에 잔류하게 된다면 형이 가장 어울리는 컨셉의 무대를 할 수 있겠지만, 팀 재조정 시간에 무조건 같은 팀으로 영입할 거다. 3차 경연쯤 되면 잘하는 건 당연하고, 더 많은 표를 끌어오기 위해서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 줘야 하니까.

“연습 분위기는 어땠어?”

“멘붕이었죠, 뭐.”

“절반은 팀 재조정하고 싶어 하더라.”

“우리 팀이 특이한 거였네.”

운이 좋게도 블루 팀에는 이미지가 비슷한 연습생들이 모였다. 그리고 대부분 컨셉에 만족해서 첫 연습임에도 순조로웠다. 정작 내가 집중을 못 하고 있어서 문제였지.

그리고 잔인한 말이지만 이번 2차 순발식에서 떨어질 것 같은 연습생이 많았다. 그 말인즉슨, 새로운 팀원이 들어올 자리가 생기면서 충분히 지운이 형을 재영입할 수 있다는 거다. 안무를 새로 연습해야 하지만, 형은 워낙 안무 습득력이 빨라서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걸로 방송에 좋게 비치면 금상첨화고.

그렇게 혼자 온갖 경우의 수를 다 계산해 보고 있을 때 누군가 어깨를 두드렸다. 같은 팀에 배정된 연습생이었다.

“승빈아, 우리 점심 다 먹고 연습실에서 모이기로 했어.”

“어, 그래.”

하필이면 이런 타이밍에 팀 연습을 하자고 하다니. 눈치가 조금 없는 팀원 때문에 나도 모르게 다시 지운이 형의 눈치를 보게 됐다.

“엄청 의욕 넘치네요! 밥 먹자마자 연습하자고 하고-”

“저 먼저 가 볼게요.”

“연습 잘해요, 형!”

이 자꾸 눈치 없는 말을 하는 박재봉을 어쩌면 좋을까. 결국 누가 봐도 어색한 웃음과 함께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습실에 가 보니 우리 팀뿐 아니라 다른 팀 연습생들도 보였다. 특히 김형석이 열심이었다.

“어, 승빈이 형, 안녕하세요!”

“안녕, 너는 무슨 컨셉 됐어?”

“힙합이요!”

“지운이 형이랑 같은 팀이네?”

“네!”

그럼, 지운이 형이랑 메인 보컬로 경쟁을 할 수도 있겠다.

“연습 되게 열심히 하네.”

“네, 저 이번에 좀 위험한 등수라서. 하하.”

1차 때 27위였고, 2차 경연에서 그렇다 할 두각을 보이지 못했으니 순위 하락을 걱정할 만했다.

“마지막 기회일 거 같기도 하고, 후회 없이 준비하고 싶어요.”

언제 이렇게 자란 거니, 1차 경연 때를 생각하면 같은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철이 들어 있었다.

3일 뒤면 2차 순위 발표식이고, 오늘의 노력이 누군가에게는 성과 없는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는 지금의 경험이 앞으로의 성공을 향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나도 연기 경험을 아이돌 서바이벌에서 써먹게 될 줄 누가 알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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