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이러고 나오니까 무슨 특수 요원 된 거 같아요.”
“드라마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야?”
캡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마스크에 선글라스까지 중무장한 박재봉이 지운이 형보다 더 신나 보였다.
“누가 보면 너 광고 보러 나온 줄 알겠어.”
“아, 오는 길에 제 꺼도 있으면 같이 보고 오는 거죠!”
“그래.”
“그럼 저희 지운이 형 버스 광고 보고 삼성역 가 볼래요? 거기에 엄청 모여 있다는데.”
“시간 남으면.”
“넵!”
지운이 형의 광고를 보기 위해 모인 나와 지운이 형, 그리고 박재봉. 형의 주작 논란 이후 조금은 어색한 조합이었다.
‘그냥 선우 형이랑 올 걸 그랬나…….’
지운이 형의 사건이 해명되고, 박재봉은 미안한 마음이 깊게 남았는지 형에게 이전보다 더 과하게 친절해졌다. 밥 먹을 때는 물도 먼저 가져오고, 물이 비워지는 것 같으면 꼬박꼬박 리필까지 했다.
“재봉아.”
“네? 형, 뭐 더 필요한 거 있어요?”
“아니, 나 체할 거 같다.”
“헐…….”
이렇게 말하면 알아서 그만할 줄 알았겠지만, 박재봉도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소화제 사 올까요? 체했을 때는 소화제 먹고 자는 게 직빵인데.”
“아니! 괜찮아. 좀 지나면 될 거 같아.”
그래도 박재봉은 기어이 지운이 형에게 소화제를 줬다. 이 정도면 꼽주는 거 아닐까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쟤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의심을 거뒀다. 어지간히 미안했나 보네.
2차 해명 글이 뜬 날, 홈마가 쓴 글에 올라온 버스 광고를 보고 싶다고 지운이 형이 먼저 말을 꺼냈다. 원래는 선우 형과 같이 갈까 했지만, 어디서 들은 건지 박재봉이 자신도 가고 싶다고 강하게 어필하는 거다. 결국 눈치 빠른 선우 형이 재봉이에게 양보했다.
“3차 때는 나랑 가는 거다?”
“알았어요- 근데 형, 3차 자신 있나 봐요?”
“승빈이 요즘 재밌네.”
“하하-”
“유머 감각이 늘었어!”
“악, 아파요!”
특유의 눈만 웃는 가식적인 표정과 함께 어깨동무하는 형의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강도현 역시 아쉬운 눈치였다. 사실 의외로 강도현이 가장 먼저 지하철 광고를 보러 가자고 제안했었다.
“회사에서 꼭 김병대랑 둘이 가라고 하네.”
“하긴, 둘이 같은 소속사인데 따로 보러 가는 것도 그림이 이상하지.”
역시 대형 기획사라 이런 사소한 것에도 신경을 썼다. 기획사 입장에서도 둘을 참여시켜 놨는데 방송에서 관계성이나 보이는 순간이 거의 없는 게 마음에 걸렸겠지.
* * *
버스 광고 찾으러 가는 길은 확실히 어색했다. 사실 지운이 형은 그 당시에는 박재봉에게 큰 상처를 받았지만, 왜 그랬는지를 이해하기 때문에 별다른 앙금은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재봉이는 마치 형이 아직까지 상처를 받은 것처럼 조심스레 형을 대하니까 그 둘의 차이가 좁혀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형은 점점 더 어색하게 반응하게 되고, 박재봉은 그게 또 마음에 걸려서 붙어 오고-의 반복이었다.
“주말 꼭두새벽이니까 아무도 없겠죠?”
“그렇지 않을까?”
“근데 형, 만약에-”
만약 훼손된 상태의 광고라면 오히려 상처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
“훼손되어 있어도 상관없어. 광고해 주신 분한테 감사 인사하려고 가는 거니까.”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조금의 불안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논란으로 인해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사이 형도 아주 단단해졌다는 게 느껴졌다.
버스 광고가 걸린 정류장에 가까워질수록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지운이 형의 말을 듣고 안심했지만, 막상 눈으로 확인한다면 충격적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저기 보이네요!”
“응, 형 얼굴 보인다.”
다행히 버스 광고는 복구된 상태였다. 아마 팬들이 와서 낙서를 지우고, 욕설이 담긴 종이들을 치워서겠지. 대신에 팬들이 적고 간 응원 메시지 포스트잇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지운아, 덕분에 행복해!]
[지운아 데뷔하자!]
[못 하는 거 없는 올라운더 지운아 더 더 높이 올라가자. 항상 응원할게♡]
“완전 감동이다-”
팔로워들과의 공개 대면식 행사날 사진과 함께 응원 문구가 적힌 광고였다.
[지운아, 너의 청춘을 응원해!]
광고 하단에는 큐알 코드가 있어 형의 1분 PR 영상과, 투표 링크로 이동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우와- 사진 엄청 예쁜데요?”
“…….”
지운이 형은 한참 동안 말없이 광고를 바라봤다. 크기가 큰 광고는 아니었지만, 처음 걸린 광고인 만큼 감회가 남달라 보였다. 포스트잇에 적힌 글들을 구석구석 눈에 담다가 번뜩 정신이 들었는지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미리 준비해 온 포스트잇이었다.
“뭐 써 왔어요?”
“응, 그냥 짧게-”
짧다고 하기에는 종이 한 장을 빽빽하게 채워 왔다.
“어디에 붙여야 하나…….”
“뭔가 형이 적은 포스트잇이라는 표시가 있으면 어떨까요?”
“이 스티커 어때요?”
“응?”
언제 챙겨 온 것인지, 박재봉이 스티커를 건넸다. 여러 가지 동물 얼굴이 있는 스티커였다.
“이건 뭐야?”
“아, 혹시 지운이 형 꺼 보고 오는 길에 제 꺼 광고 있으면 붙이려고 챙겼거든요. 이게 이렇게 도움이 되네요?”
“고마워.”
“뭐, 이런 거 가지고 그래요~”
“형은 여우니까 여우 스티커 어때요?”
아직은 동물 모에화가 익숙하지 않은 듯 머쓱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여우 스티커를 떼어 내 포스트잇 모서리에 붙였다.
“오, 이렇게 보니까 한눈에 들어와요!”
“그래? 다행이다.”
“사진 한 장 찍어 줄까요?”
“응.”
지운이 형은 주위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모자와 마스크를 벗었다. 그리고 버스 광고 옆에 어색하게 섰다.
“좀 웃어요, 형!”
“맞아요! 지금 기분 엄청 좋으면서!”
박재봉의 말에 아니라고 손사래 치면서도 계속 광고를 힐끗거린다. 그러고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찍을게요, 하나 둘 셋!”
찰칵.
‘형이 이렇게 웃었던 적이 있었나?’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환한 웃음은 서바이벌 이후 처음이었다. 티벡스 데뷔 전에는 수없이 봤던 얼굴이었는데. 그새 기억에서 희미해졌는지 사진을 찍으면서 놀랐다.
형은 평소 잘 찍지도 않던 셀카도 여러 번 찍고 나서야 자리를 떠났다. 마침 돌아오는 길에 삼성역이 있었다. 말은 더 안 했어도 박재봉도 본인 광고를 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고, 시간도 괜찮다고 판단했기에 역 안으로 들어갔다.
“대박- 여기 완전 투마월 광고 집합소인데요?”
“어, 저기 재봉이 광고 있다.”
“어디요? 우와 진짜네?”
[팔로워님! 박재봉 연습생의 데뷔를 응원해 주세요!]
투표 큐알 코드/ PR영상 큐알 코드
“신기하다-”
역시 상위권 멤버인 만큼 광고 크기도 크고, 자리도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곳이었다.
“저도 꼭 해 보고 싶은 게 있었거든요.”
뭘 하고 싶었다는 거지? 궁금해하던 찰나 박재봉이 종이 하나를 꺼냈다. 그러고는 가져온 스티커로 종이를 전광판에 붙였다. 가까이 가서 종이의 실체를 발견하곤 놀라서 기절할 뻔했다.
[평생 봉프하겠다는 피의 연합]
봉프 종신 계약서
“이게 뭐야?”
“이거 몰라요? 유쓰 선배님들 앨범에 종신 계약서가 굿즈로 들어가서 완전 유명해졌는데?”
“허…….”
그러고는 박재봉도 미리 준비한 편지를 붙였다.
[안녕하세요, 팔로워님들! 연습생 박재봉입니다! 먼저 항상 저를 응원해 주시고, 부족하지만 예쁘게 봐 주셔서 감사해요! 매일매일 팔로워님들의 사랑을 받아 무럭무럭 자라고 있답니다. 앞으로도 더욱 발전하고 성장하는 모습 보여 드릴게요! 사랑해용.(토끼 스티커)]
전부터 느꼈지만 저렇게 애교에 서슴없고, 거부감 안 들게 하는 것도 능력이었다. 아이돌로서는 최고의 재능 아닌가. 저런 건 어떻게 포인트로 커버할 수 없나? 끼 포인트를 더 높여야 하나?
“온 김에 승빈이 광고도 보고 가자.”
“제 꺼가 있을지 모르겠는데…….”
“저기 승빈이 형 꺼도 있네!”
박재봉이 가리킨 곳에 정말 내 광고가 있었다. 배우로 성공하고 나서는 별 특별한 기념일이 아니어도 볼 수 있었던 지하철 광고였다. 하다못해 출연하는 드라마 개봉일에 맞춰서도 광고가 걸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왜 이런 묘한 감정이 드는 걸까? 뱃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
[빛나는 승빈아, 사랑해!]
팔로워님들! 감미로운 보컬 문승빈 연습생의 데뷔를 응원해 주세요!
투표 큐알 코드/ PR영상 큐알 코드
축구장에서 투마월 단체복을 입고 ‘눈부셔’를 추는 사진이었다. 사진을 봤을 때부터 예상했지만, 하단의 주소를 보니 역시 문스트럭의 사진이었다. 티벡스 시절 받아 본 광고는 문스트럭이 건 광고 하나였기 때문이었을까, 내 아이돌 인생 두 번째 광고였다. 그런데 그때와는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같은 사람이 기획한 광고였지만 가까이 가 보니 나를 응원하는 메시지들이 하트 모양으로, 별 모양으로 모여 있었다.
[승빈이 목소리를 들으면 위로가 돼. 꼭 데뷔하자!]
[투마월 메보 문승빈이 아니면 누가 해?]
[승빈아 센터하자!!]
[따뜻한 목소리만큼이나 따뜻한 마음을 가진 승빈아, 사랑해!]
한참 메시지들에 대한 감상에 빠져 있을 무렵, 근처에 서 있는 어떤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정유현의 광고를 보러 온 거 같았다. 처음에는 남자 팬인가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하지 않은 피지컬이었다.
“잠깐만.”
모자에 가려진 모습만으로도 일반인이 아닌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내 시선이 느껴졌는지 그 남자도 고개를 돌렸고 눈이 마주쳤다.
“정유현?”
모자와 마스크로 가렸지만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평소 준비성 철저하고 빈틈없어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편한 의상에 별다른 세팅도 안 된 모습이었다.
‘진짜 광고만 보려고 온 건가?’
서로 알아보긴 했지만, 애매한 사이였기 때문에 어색한 대치 상황이 이어졌다. 그때 지운이 형이 넌지시 말했다.
“혼자 온 거 같은데 사진이라도 찍어 주는 게 좋지 않을까?”
사실 내키진 않았다. 어차피 저 녀석도 내가 사진 찍어 주는 걸 그닥 원하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사진 찍히는 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거 같고.
“사진 찍어 줄까?”
“그래.”
웬일로 순순히 사진에 응했다. 별다른 포즈를 취하진 않았지만 역시 잘생겼다. 외모 스텟을 얼마나 높여야 정유현 정도가 될까- 하는 현타도 조금 왔다.
[팔로워님! 유현이의 찬란한 꿈을 응원해 주세요!]
정유현은 포스트잇 사진도 몇 장 찍더니,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때 박재봉이 나섰다.
“둘이 광고 붙어 있는 것도 신기한데, 같이 하나 찍어요!”
“굳이?”
“형, 유현이 형 민망하겠어요-”
나는 말로 했지만, 쟤는 눈으로 답한 거 같은데. 왜 이리 오버하나 생각해 보니 박재봉은 정유현과도 의도치 않은 껄끄러운 상황이 있었다. 생각해 보니 얘 은근 트러블 메이커였네. 정유현이 거절하는 건 상관없는데 이 어색한 분위기 어쩔 거냐고.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예상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