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쉽사리 잠에 들 수 없었다. 혹시 해명 글이 올라왔을까 게시판을 새로 고침 해도 그대로였고, SNS 대화창도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핸드폰을 켜 둔 채 잠자리에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요란한 진동 소리에 잠에서 깼고, 눈에 들어온 건 뜻밖의 이름이었다.
[박재봉]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울리는 전화를 받아 보니 박재봉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올라왔어요, 형! 정말 다 거짓말이었어요!”
“뭐?”
“지금 씨넷 게시판 들어가 보세요.”
“어, 그래. 고마워.”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갑작스러워서 그런지 손이 떨리고 있었다. 심호흡을 하고 씨넷 게시판을 들어가 보니 정말 상단에 새로운 글이 올라와 있었다. 내 소리에 잠에서 깬 선우 형도 함께 해명 글을 읽었다.
[투마월 시즌 2 차지운 연습생 관련 폭로의 진실을 해명합니다.] 300
올라온 시간을 확인하니 2분 전이었다. 정말 방금 올라온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투마월 시즌2 차지운 연습생 폭로글의 실제 피해자입니다. 우선, 차지운 연습생의 과거를 폭로한 글은 모두 거짓입니다. 오히려 차지운 연습생은 집단 괴롭힘을 당하던 저를 도와준 유일한 친구였습니다. 우선 지운이와 친했던 사실을 증명할 만한 사진과 메신저를 공개합니다.
(같이 찍은 사진)
(메신저 사진)
이제 폭로글에 올라온 증거와 글 속 거짓말들을 하나하나 반박해 드리겠습니다.
1. 시기상의 오류
폭로글에는 분명 “차지운 연습생의 괴롭힘은 1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지운이는 00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약 6개월 후 부상과 실제 가해자의 괴롭힘으로 인해 전학을 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년 동안 지속해서 괴롭힘을 가했다는 것은 시기상 완전히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실제 가해자가 저에게 괴롭힘을 가했던 게 1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자신이 했던 일에 주어만 지운이로 바꾸면서 발생한 오류로 추정됩니다.
2. 메신저 사진
폭로 글에 나온 사진에서도 이상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남겨 놓은 가해자 무리가 저에게 보낸 카톡을 확인했고, 메신저에 나온 일부 표현과 말투가 일치함을 발견했습니다. 메신저 시간과 날짜는 충분히 포토샵으로 수정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또한 조작이 의심됩니다.
(실제 메신저 캡처 사진)
(폭로글 속 메신저 사진)
3. 피해 사실 관련 증거
제가 실제 피해자임을 증명할 그 당시 병원 진료 기록서입니다. 지속적인 신체 폭행과 언어폭력으로 받았던 정신과 상담 기록도 함께 첨부합니다.
(병원 진료 기록 사진) ]
“이래서 시간이 꽤 걸렸구나…….”
해명 글은 회귀 전보다 훨씬 더 자세했다. 그런데 이 많은 자료를 어떻게 다 가지고 있었을까? 의문이 들 무렵 바로 다음 단락에서 설명이 됐다.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가 예체능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고, 대부분 연예인의 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 가해자가 연예계에 입문한다면 폭로를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오로지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때의 일들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예상과는 다르게 가해자는 별 볼 일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때의 기억은 뒤로하고 새롭게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실제로 그때의 고통에서 많이 벗어났고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또 다른 가해를 위해 자신이 피해자인 척 자작극을 꾸밀 거라곤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 친구가 일말의 양심으로 반성을 했기를 바랐는데… 그때의 기억을 다시 되살리는 게 정말 힘들었지만, 저 때문에 지운이가 더 이상 고통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결국 자기 무덤 판 거였네.”
“이거 진짜 개쓰레기 새끼였네?”
[저도 지운이에게 큰 잘못을 했습니다. 괴롭힘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절박한 마음에 지운이와의 우정을 저버리는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저 때문에 힘든 시간 보냈을 지운이에게도 사과하고 싶습니다. 지운아, 그때는 네 용기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몰랐어, 이제는 내가 용기 내 볼게.
이 글로 지운이에 대한 오해가 해명되었길 바랍니다. 추가적으로 해명할 증거를 찾는다면 추가 글로 올리겠습니다.]
해명 글이 나오면서 여론의 판도가 뒤집어졌다.
-와 차지운 개불쌍해 미친놈한테 잘못 걸린거잖아;;
-ㅠㅠㅠㅠㅠㅠ난 우리 지운이 믿었음ㅠㅠㅠ
-ㅈㄴ싸패새끼네.
-ㅅㅂ 애 인상 가지고 기정사실화했던 새끼들 다 어디갔냐?
-억까들아 여기서도 한 번 지랄해봨ㅋㅋㅋ
-하여간 냄비근성 어디 안 간다고 뭔 일 터지면 우르르 몰려와서 사람 하나 죽이는 게 스포츠지?
-욕하던 새끼들은 어디 가고 다들 한 마디씩 훈수 두는거임?
┕이러는 거 지겹지도 않나... ㅈㄴ 변한 게 하나도 없음.
-내가 뭐라고 했음? 차지운 그런 애 아니라고 했잖앜ㅋㅋㅋ
┕처음 폭로글 때 댓글 쓴 사람임? 성지순례하고 간다.
┕성지순례하고 갑니다. 시험 합격하게 해주세요.
┕짝남이랑 이뤄지게 해주세요.
하지만 여전히 해명 글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며칠 동안 자신이 만들어 낸 ‘쓰레기 차지운’이 부정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뗸 굴뚝에 연기가 나겠음? 어쨌든 댄스동아리하고 양아치였다는 거잖아ㅋ
┕댄스 동아리랑 일진이랑 뭔 상관임?
┕모범생이 그런 데 들어가겠냐?
┕ㅈㄴ 억까를 못하니까 머리가 넹글 돌았나;;
지운이 형을 주제로 루머를 유포하던 위튜버들은 끈질기게 영상을 내리라는 팔로워들의 반발에도 영상을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해명 글에서 수상한 점이 있다면서 피해자의 신상을 털려는 위튜버도 있었다.
“징하다, 진짜-”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야.”
* * *
같은 시간 K는 문승빈과 다름없이 손가락에 불이 나도록 새로 고침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해명 글이 올라왔을 때, 안도감과 함께 이전에는 느껴 보지 못한 투지와 전투력을 느꼈다. 그리고 오열했다.
“X발 X나 다행이다… 끕, 흐어엉…….”
흐느낌 소리에 놀라서 깬 문스트럭은 기어코 사달이 났구나- K를 어떻게 달래야 하나 머리가 복잡했다.
“야, 괜찮아. 다른 최애 잡으-”
“미쳤냐? 다른 최애를 왜 잡아? 우리 지운이가 있는데.”
“응?”
“해명 글 떴어, 흐앙어어엉… 우리 지운이 불쌍해서 어떡하냐고-”
K가 보여 준 해명 글을 읽으면서 문스트럭은 확신했다. 와씨, 차지운 코어 장난 아니게 쌓이겠다. 원래 병크는 과몰입한 덕후들의 전투력을 상승시킨다. 누가 내새끼를 욕하는 꼴을 보면 눈에 뵈는 것 없이 싸움에 참여하게 되는 거다. 그런데 이 해명 글에는 차지운이 ‘억울한’ 이유로 욕을 먹었다는 것과, ‘타인을 도우려다가 피해를 본’ 사실이 담기면서 일반 팬들도 차지운을 지키겠다는 사명감에 불타오르게 했다.
-이제부터 차지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 차지운과 나는 한 몸이며 차지운에 대한 공격은 나에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
-이제 차까살임.
-지운이 꼬옥 안아주면 되...
해명 글이 올라오고 여론이 뒤집어지면서, 혼란스러웠던 차지운 팬덤이 결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논란이 터진 후에도 남아 있던 계정들은 거의 팬덤 내의 대모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K의 짤계가 특히 그랬다. K의 익명 질문 박스에는 차지운 팬들의 감사 인사가 쏟아졌다.
[어려운 시기에 계정 파기 힘드셨을텐데 감사합니다ㅠㅠ]
[쌤 덕분에 탈주 안하고 버틸 수 있었어요!]
[차차님 지운이 예쁘게 기록해주셔서 감사합니다ㅠㅠ]
[해명글 보셨어요? 지운이 기다리기 잘 한 거 같아요ㅠㅠ]
K의 짹짹이 타임라인도 다시 북적이기 시작했다. 계정을 폭파했던 몇몇 네임드 계정들이 돌아왔고, 그중에는 계정을 세탁하고 돌아온 사람들도 있었다.
@JIWOON_LOVE 30초 전
[지운아 믿고 있었어ㅠㅠ]
“뻔뻔한 것 봐.”
K는 속에서부터 분노가 밀려왔다. 캡처해 둔 걸 풀어 버릴까 생각했지만, 다시 사람들이 돌아오고 있는 판을 굳이 흔들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대신 글 하나를 올리는 것으로 이 분노를 삭이기로 했다.
@chacha_gif 1분 전
[요즘 저에게 과분한 말을 해주시는 분들이 많은 거 같아요. 그저 지운이가 좋아서 계정을 운영한 건데, 더 큰 사랑을 받는 거 같아 얼떨떨합니다. 사실 언제 좋아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잖아요. 지운이 좋아하는 마음은 다 똑같으니까요. (타래로)
하지만, 지운이에게 성급하게 상처를 주고 아무렇지 않게 돌아온 분들도 있더라고요. 그분들은 앞으로 더 큰마음으로 지운이 사랑해주시길 바라요. 저는 앞으로도 지운이의 모든 순간을 담기 위해 더 노력할게요.
다시 한 번 저와 함께 어려운 시간 견뎌준 팔로워분들과 지운이 팬분들 감사합니다.]
굳이 누가 계정 세탁을 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팬들끼리는 암암리에 알고 있는 듯했다. K의 글을 확인한 문스트럭이 넌지시 말했다.
“이야- K 인생에 이런 덕질이 있었냐?”
“그렇게 됐다…….”
“야, 네 자식도 이렇게 케어 못 하겠다.”
“몰랐음? 지운이 내가 낳음.”
눈 한번 안 깜빡이고 말하는 모습에 문스트럭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와, 이제 부정도 안 해.”
이런 인간이 어떻게 그 긴 시간 입덕을 부정했을까.
* * *
어느 정도 해명이 됐지만, 지운이 형의 이슈를 완전히 잠재울 만한 한 방이 필요했다. 그리고 다행히 2차 해명 글이 올라왔다.
[2차 해명글/ 투마월 시즌2 차지운 연습생 관련 폭로의 진실을 해명합니다.] 43058
[과거 가해자와 친분이 있었지만, 유일하게 저에게 사과했던 친구로부터 받은 사진입니다. 알고 보니 가해자는 단체 메신저 방을 만들어서 조직적으로 메시지를 조작하고, 지운이에 대한 루머를 유포하고 있었습니다.]
함께 첨부된 파일은 꽤 긴 내용의 단톡방 캡처였다. 가해자가 고등학교 시절 일진 무리들을 모아서 차지운 폭로 자작글을 꾸미기 위한 자리였다. 그런데 정말… 성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언어 사용에서 그들의 수준을 느낄 수 있었다.
(단체 메신저 방 사진)
-버스 타러 갔는데 차지운 그새끼 얼굴이 보여서 열 확 오르더라ㅋ
-형님, 차지운 함 조져야죠ㅋ
-멀리 안간다~
-지운이 조지러 가보즈아~!
-ㅇㅇ참교육해야지
“요즘 양아치들도 이래요?”
“너는 무슨 나보다 어린 애가 요즘 양아치 거리고 있어-”
“아, 아니에요.”
아니, 저런 건 이미 철 다 지난 유행어 아닌가? 거기다가 자기들끼리 형님 거리는 꼴이라니. 가오가 뇌를 지배하면 저렇게 되는구나.
“지운이 불쌍해서 어쩌냐-”
“그래도 이번 글 덕분에 완전히 누명을 벗을 수 있겠어요.”
“맞아. 그건 다행이야.”
어쨌든 이 사진이 공개되면서 가해자가 과거 친구에게도 손절당할 만큼 인성이 쓰레기였다는 것과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자작극이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내 생각과는 조금 다르게 사건이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