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그날은 아침부터 싸함을 느꼈다. 선우 형이 너무 티가 나게 뭔가 말하려다 마는 것이다. 소식이 빠른 이 형이 분명 또 뭔가를 알고 있는 거 같은데.
“형, 또 뭔가 알고 있죠.”
“응? 아니?”
“거짓말 말고 또 뭐예요?”
한참 뜸을 들이던 선우 형의 입에선 뜻밖의 말이 나왔다.
“그게… 뜬금없이 지운이 폭로 글이 올라왔어.”
순간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폭로 글이 어떻게? 갑자기 공포감이 엄습했다. 머리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라고 해야 설명이 될까?
“그럴 리가 없는데…….”
“나도 지운이가 그런 애 아니라는 건 알아, 근데 너무 자세하게 쓰여 있어서-”
“좀 보여 줄 수 있어요?”
선우 형이 내민 화면 속 폭로 글은 이미 몇십만 단위의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투마월 시즌 2 차지운 연습생의 과거를 폭로합니다.] 203989
저는 현재 투마월 시즌 2에 출연중인 차지운 연습생으로부터 학창 시절 괴롭힘을 당한 피해자입니다. 너무 힘든 기억이었지만 이제는 잊고 새로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차지운 연습생이 출연한 투마월 시즌2가 국민적 인기를 얻으면서, 매일같이 차지운의 이름이 언급되고, 얼굴이 보이는 삶을 사는 것이 너무 괴롭습니다. 그래서 용기 내어 글을 적게 되었습니다. (…)
이다음은 학창시절 지운이 형이 학급 내에서 폭로자의 왕따를 주도하고, 신체 및 언어폭력을 일삼았다는 내용이 이어졌다. 졸업 사진과 당시 지운이 형이 활동했던 댄스부 사진, 친구로 추정되는 이들과의 메신저 내용을 증거로 내놓았다.
-내가 뭐라 했냐? 차지운 분명 과거 논란 날거라고 했잖앜ㅋㅋㅋㅋ 관상부터가 깡패새끼임
┕차지운 팬들 그렇게 인상 쎄지만 물렁한 애로 모에화 하더니 ㅈㄴ 꼬숩다.
-이건 너무 빼박 아닌가?
-중립 박는다.
┕중립은 뭔 중립이야 이미 사진이랑 증거 다 나왔는데;;
┕졸업사진이 증거임?
┕메신저 캡처도 떴잖아.
-나 차지운 다른 학교 동창인데 쟤 저런 애 아니었음.
┕응 노인증구씹이야~
┕나 ~인데 하는 글은 믿거지.
-이거 사실이면 하차해야 하는 거 아님?
┕하차해야지;; 저런 ㅅㄲ 데리고 데뷔를 어떻게 함?
┕지운아 하차해라 누나 원픽이 좀 위험한데 너 나가고 땜빵이라도 하게.
댓글창은 벌써 난장판이었다. 안 그래도 2차 경연 후기마다 차지운 얘기로 가득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하차시키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이거 완전 똑같잖아.”
“뭐가?”
“아, 아니에요.”
하지만 내가 정말 놀란 건 다른 이유였다. 이 폭로 사건, 회귀 전에도 발생한 일이었다.
‘하지만 시기가 달라.’
원래는 1차 경연이 끝나고 1차 순발식이 방영되던 날 터진 일이었다. 당시 형은 1차 경연으로 크게 반응을 얻은 직후라 타격이 컸고, 하마터면 진짜로 프로그램 하차를 할 뻔했다. 하지만 사실 폭로자라고 했던 사람이 가해자였고, 진짜 피해자가 해명 글을 썼던 거로 기억한다. 지운이 형이 오히려 가해자 무리로부터 괴롭힘을 당한 자신을 도와줬다는 내용이었다.
지운이 형이 인기를 얻는 걸 보고 열등감을 느낀 동급생의 추악한 거짓말이었다. 해명된 후 지운이 형의 코어 팬은 더욱더 단단해졌고, 그로 인해 결국 데뷔조는 못 들었어도 8위까지 오를 수 있었다.
내가 지난 1차 경연 때는 형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였다. 회귀 전처럼 1차 경연은 무난하게 이기고 어느 정도 관심을 얻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회귀를 해서 박재봉을 구했기 때문에 1차 경연 전우치 무대가 나온 것이고, 지운이 형은 그 시기에 원래 받았을 스포트라이트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이 사건이 1차 경연이 끝나고 발생하지 않았을 때, 이것까지 나의 회귀와 함께 바뀐 미래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해결할 수 있는 사건이니까…….’
“지운이 어떡하지?”
“이거 다 거짓말이에요.”
“넌 어떻게 알아?”
“지운이 형이 이럴 사람이겠어요?”
“그치? 근데 이미 너무 퍼져 버려서 빨리 해명해야 할 텐데.”
우선 지운이 형의 상태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충격이 클 것이다. 그리고 연습생들의 시선도 분명 신경 쓰일 테고.
“어쩌지?”
“뭘 어째요. 배고픈데 아침부터 먹어요.”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게 제일 좋겠지?”
그래도 눈치가 아예 없는 사람은 아니구나. 선우 형과 함께 방에 가 보니, 역시 소식을 접한 것 같다. 침대에 걸터앉아서 땅만 쳐다보고 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지운이 형.”
“너도 글 봤구나.”
“아닌 거 믿으니까 온 거예요.”
“어떻게 확신해?”
서바이벌 시작하고 가장 날카로운 모습이었다. 이미 인터넷 속에서는 증거 사진도 있고, 빼박이라며 가해자로 낙인 찍히고 있는데, 여기 와서 처음 본 연습생이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구니 어이가 없을 만도 했다.
“형이 한 거 맞아요?”
“아니? 절대 아니야.”
“그럼 제 말이 맞는 거잖아요.”
지운이 형은 대답 없이 우리 쪽으로 고개를 올렸다. 내가 생각해도 사람 할 말 없게 하는 화법이었다. 하지만 극도의 혼란 상태일 땐, 이런 어이없을 정도의 명료함이 필요하다.
* * *
그 시각 K는 폐인 상태였다. 어딜 가도 차지운의 논란 이야기뿐이었다.
“X발…….”
그녀는 몇 번이고 새로 고침을 하며 이 모든 것이 허상이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현실을 부정하는 그녀에게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새로 고침을 할수록 폭로 글의 비난 댓글만 늘어날 뿐이었다.
“말도 안 돼.”
2차 경연 무대가 공개될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 겨우 빛을 보나 했는데 폭로 글이라니. 눈앞에서 지붕 뚫고 상한가 치던 주식이 하루아침에 휴지 조각이 되는 걸 직관하는 기분이었다.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떨어질 때 아픈 거라더니, 이건 상장 폐지 선고나 다름없었다.
때마침 문스트럭한테 전화가 왔다. 그녀도 소식을 들은 지 얼마 안 된 듯 놀란 목소리였다.
“야…….”
“완전 X된 거지?”
“해명 글은 아직 안 올라온 거임?”
“응, 하하 X발.”
K는 서랍 한 쪽에 고이 놓여 있는 종이비행기를 떠올리며 피눈물을 흘렸다.
“내가 존버한 시간이 얼마인데-”
“좀 기다려 봐. 설마 동창 중에 차지운 편 들어주는 애가 하나도 없겠냐?”
“X발 어떻게 된 게 잡는 애들마다 이 꼴이 나는 거냐?”
문스트럭은 해 줄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K는 지독한 병크멤잡이였으니까. 같은 본진을 덕질하던 때도 최애와 차애 모두 그룹의 병크를 담당하는 멤버들이었다. 연습생 덕질하면 상대적으로 병크가 적지 않겠냐고 꼬신 것이 자신이라서 더 할 말이 없었다. 아니, 그래도 그 많고 많은 애 중에 또 과거 논란이 있는 애를 최애로 잡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K는 이미 우수수 계정 폭파해서 줄어든 팔로우와 짹친들을 보며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경이었다. 병크멤의 굿즈는 헐값도 받지 못한다더니, 몇백은커녕 만 원이라도 받으면 남는 장사였다. 짹짹이 타임라인은 이미 폭탄이 떨어진 자리였다. 기다리겠다는 짹을 올린 사람은 벌써 인용이 1000이 넘어가면서 차지운보다 배로 욕을 먹고 있었고, 신랄한 욕설과 함께 탈덕문을 작성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직은 말을 아끼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분위기였다.
“아니, X발. 탈덕은 조용히 모르냐?”
희한한 일이었다. 생각보다 꽤 가슴이 아팠다. 종이비행기 하나 못 판다고 이 정도로 슬픈 일인가. 잔뜩 괴로워하며 침대에 누워 있기를 1시간째, K는 마침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망했다. 나 차지운 좋아하네.”
기나긴 입덕 부정기의 끝은 예상치 못한 순간 그녀를 찾아왔다.
* * *
식당에 오니, 아니나 다를까 형을 보는 시선들이 달라져 있었다. 다른 연습생들에게 뭐라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세세한 증언과 증거 사진을 신뢰하는 게 당연하니까.
자연스럽게 박재봉과 윤빈이 앉아 있는 자리로 향했다. 윤빈은 사건에 대해 아는지 모르는지 평소와 같았고, 박재봉은 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씨더스타 에이앱 영상 봤어요. 형 허즈밴드 발언 엄청 인기 있던데요?”
“나, 그거 너무 부끄러웠어- 그런 의미인 줄 몰랐거든.”
“하여간 엉뚱하다니깐.”
그때 지운이 형이 박재봉 쪽으로 반찬을 옮겨 주었다. 다이어트 핑계로 계속 식사량을 줄이는 박재봉이라서, 나나 지운이 형이 반찬이나 밥을 조금씩 나눠 주는 건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박재봉이 흠칫하더니 젓가락을 쳐 냈고, 그대로 반찬이 식판 위로 쏟아졌다. 쇠붙이 부딪히는 소리에 대화가 끊겼고, 찬물을 끼얹은 거처럼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저, 그게-”
“아니야. 미안.”
떨어진 반찬을 주워 담은 지운이 형이 먼저 자리를 벗어났다. 이런 순간마저도 저렇게 착한 형인데. 박재봉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만 달싹였다.
찬바람이 부는 식사 자리에 윤빈 형만 이유를 몰라서 멀뚱멀뚱 앉아 있었다.
“둘이 싸웠어?”
“별일 아닐 거야.”
“저도 먼저 가 볼게요.”
아무래도 형의 상태를 봐야 할 것 같았다. 선우 형에게 나중에 박재봉 상태 좀 파악해 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형을 찾으러 식당을 빠져나왔다. 연습실과 대강당, 휴게실을 찾아봤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화장실에 가 보니 끝 칸에서 조용히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형, 잠깐 나와 볼 수 있어요?”
“…….”
“재봉이 때문에 그래요? 애가 잘 몰라서 그런 거-”
조용히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지운이 형이 걸어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눈가가 충혈되어 있었다.
“내가 한 게 아닌데, 내가 아니라는 걸 믿어 주는 사람이 있을까?”
“형.”
“나 너무 무서워. 그냥 하차하고 쥐 죽은 듯 살래.”
“형, 아니라면서요. 근데 형이 왜 그래야 해요?”
“뭘 어디서부터 아니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 학교에는 남겨 놓은 게 하나도 없어서 증거도 없어. 그냥 내가 아니라는 걸 말로밖에 증명할 수 없어.”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해명될 사건이었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눈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형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자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리고 불안하기도 했다. 내가 이곳으로 회귀함으로써 크고 작은 일들이 바뀐 것은 사실이니까.
혹시 이번에도 변화가 생겨서 실제 피해자가 해명해 주지 않는다면? 회귀로 인한 나비 효과의 범위를 알 수 없으니 답답하면서도 두려웠다. 이대로라면 지운이 형의 데뷔는 물론이고, 앞으로의 삶에도 큰 문제가 발생하고 만다. 사시나무 떨듯 떠는 형의 어깨를 붙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형 믿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고 예전 그 순간에도 꼭 해 주고 싶은 한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