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38화 (38/346)

38화

푸른 조명과 붉은 조명이 교차하면서 파도가 몰아치는 VCR으로 무대가 시작했다. ‘항해사’가 테마인 만큼, 시작부터 뱃머리 모양의 모형에서 강도현이 나타났다. 라이트한 음색으로 빠르게 치고 나오는 강도현 특유의 래핑이 돋보였다.

[나침반 하나 쥐고

이 바다를 지배해

누군가는 내게 묻지

묻어 둘 꿈에 묻혀 사는

기분은 어떠냐고]

“미친, 가사가 다 들리네.”

[내 야망을 품기엔

연습실은 너무나도 비좁지

비 오듯 흐르는 땀방울은

스스로 비참하다

느낄 새도 없이

어느새 나침반이 되어

내 목표를 가리켜]

“도현이 왜 아이돌 서바이벌 나옴?”

“그냥 쇼캐 나갔어도 힙찔이들 다 바르고 왔을 거 같은데.”

“야, 힙찔이는 아이돌이 될 수 없지만, 아이돌은 래퍼가 될 수 있잖니-”

“맞는 말이네.”

“도현이 쇼캐에 뺏겼어 봐. 저런 아이돌 스타일링 못 봤다고 생각해 봐.”

“하, 아이돌 해 줘서 고맙다.”

강도현의 파트가 끝나고 다른 연습생들이 랩을 이어 갔다. 사실 강도현의 임팩트가 너무 커서 그다음은 장기 자랑 보는 기분이었다. 약간 루즈해질 즈음, 박선우가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왔고 현장은 새로운 충격에 휩싸였다.

마린룩 중에서도 가장 제복 같은 의상을 입은 박선우가 중앙에서 각 잡힌 모습으로 경례를 하더니 랩을 시작했다. 그 지하 암반수도 뚫고 내려갈 저음으로.

“미친…….”

[누군가는 내게 말하지

네 나침반이 가리키는 길은

잘못된 길이라고

누군가는 내게 말하지

콜럼버스 흉내에 미친

어릿광대일 뿐이라고]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단순히 낮은 것이 아니라, 약간은 위협감을 느끼게 하는 목소리였다. 밀림에서 맹수를 마주한다면 느껴질 소름이라고 해야 할까.

저 예쁘장한 얼굴과 사슴 같은 눈에서 맹수의 울음소리라니, 박선우의 목소리가 처음 공개되던 날의 충격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각 잡고 아예 낮은 음으로 읊조리면서 시작하다가 점점 거칠게 목을 긁는 소리가 더해지니 정글 한가운데 떨어진 기분이었다.

박선우의 목소리만으로도 충격이었는데, 강도현과 더블링하는 구간에서는 다들 평가의 입장이 아니라 정말 페스티벌의 관객이 되어 즐겼다. 강도현이 빠르게 치고 가면, 박선우가 깊게 파고드는 느낌. 권투로 치자면 연속 잽에 정신을 쏙 빼놓고 결정적으로 묵직한 훅을 날려서 K.O 시키는 것 같았다.

[모두가 같은 곳을 바라볼 때

난 길 잃은 내 나침반을 믿어

아무도 없는 곳에 뿌리 내려

세울 거야 나만의 킹덤]

파트를 마친 박선우가 몸을 뒤로 돌렸다. 박선우를 따라 관중들의 시선도 무대 뒤로 향했다. 뱃머리에서 조종키를 붙잡은 강도현이 보였다.

[키를 잡은 건 나야

정해진 길 따윈

차라리 부숴 버려.]

가사에 맞춰 강도현이 조종키를 아예 던져 버렸다. 문스트럭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쉬지 않고 카메라에 담았다.

“미친, 핏줄 봐.”

“이마에도 핏줄 선거 봐-”

전광판에 비친 강도현의 얼굴에는 땀이 비처럼 흐르고 있었다. 튀는 땀방울조차도 하나의 연출처럼 보였다.

’이거 보정만 제대로 하면 레전드 하나 나오겠다,‘

강도현이 무대 중앙으로 내려오면서 5명이 무대에 모였다.

[거칠게 달려드는

파도도 겁나지 않아

내 나침반과

함께라면]

그리고 일제히 나침반을 든 손을 올리면서 무대가 끝났다. 현장 반응은 뜨거웠다.

“찢었다, 도현아!!”

“선우야, 잘했어!”

“와아아악!!”

역시 기대 이상이었다. 보통 랩 포지션의 경우 정말 잘하는 연습생을 빼고는 애매한 힙찔이나, 낮은 등수 때문에 고를 노래가 없어서 아예 랩을 한 번도 안 해 본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앞선 랩 무대에서는 가사를 절거나, 기대 이하의 퀄리티를 보여 주기도 했다.

“랩은 여기가 1등할 거 같죠?”

“네. 여긴 너무 실력 차이가 커서.”

“근데 강도현이랑 박선우 목소리 합이 저렇게 좋을 줄 몰랐어요.”

“맞아요.”

문스트럭은 박선우에게 투표했다. 강도현도 잘했지만, 더 큰 충격을 준 연습생을 뽑는 게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강도현이 VM이라서 그런 건 아니다. 아마… 아닐걸? 이 팀의 무대를 끝으로 장장 12시간에 걸친 촬영이 끝났다. 분명 아침 해 보고 들어왔는데, 밤이 다 돼서야 나올 수 있었다.

[도현이 잘했어?]

[차지운 무대 어땠음?]

아니나 다를까, 두 덕메의 연락이 잔뜩 와 있었다. 문스트럭은 간결하게 답했다.

[응]

[야, 차지운 떡상한다. 비행기 잘 챙겨놔.]

* * *

2차 경연이 끝나고 연습생들은 ‘씨더스타’라는 게임을 통해 투표권이 추가 제공된다는 소식을 뒤늦게 확인했다. 원래도 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되니 다들 씨더스타 삼매경이었다. 투표권을 하나라도 더 받아서 자신에게 투표해야 하니까 말이다. 자칫하다가 카메라에 게임하는 모습이 너무 많이 잡히면 태도 논란이 생길 게 뻔하니, 머리 좀 굴린 연습생들은 화장실에 들어가서 게임을 하고 오는 경우도 빈번했다.

투표권 추가 제공 사실이 공지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어플 스토어 매출 상위권에 ‘씨더스타’가 랭크되어 있었다. 게임 발매 이후로 단 한 번도 순위권에 오른 적 없던 게임이었는데, 10위 안에 든 것을 보면서 다들 투마월의 화력을 실감했다.

그리고 이런 반응을 두고 보기만 할 투마월 제작진이 아니었다. 경연을 마치고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연습생들을 대강당에 집합시켰다. 이번에도 도미노 대회 같은 걸 준비했나 하고 들어갔다가 현란한 현수막에 연습생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투마월배 씨더스타 대전!]

“안녕하세요, 50명의 연습생분들! 2차 경연 후 추가된 투표 방식에 대해 모두 다 알고 있죠?”

“네!”

“여러분을 응원하는 팔로워분들의 열띤 성원에 보답하고자, 이번 투마월배 씨더스타 대전을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도미노 때처럼 몸이 피곤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팀은 역시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이번에도 룸메끼리인가?”

“식상하게?”

“팀은 이번 2차 경연 같은 팀이었던 사람들과 이루게 됩니다.”

“오~”

감탄하는 것 같았던 리액션의 선우 형이 내 귀에 작게 속삭였다.

“생각보다 더 식상한데?”

팀이나 노래 정할 때마다 양궁이니 공 뽑기니 해괴한 걸 많이 시켜 대니, 이럴 땐 그냥 식상한 게 마음 편했다.

“룰은 각 팀에서 한 명씩 게임을 플레이합니다. 그리고 5명의 합산 점수가 가장 큰 팀 순으로 순위가 정해집니다. 이번에도 상품이 당연히 있습니다!”

“나 이번엔 무조건 이길 거야.”

선우 형이 비장하게 주먹을 쥐었다. 하긴 지난번에 놀이동산 자유 이용권 상품으로 나라 잃은 것처럼 우울해하던 걸 생각하면, 꼭 우승하는 게 룸메인 나에게도 이득이었다.

“상품은… 팔로워 분들과의 라이브 채팅 시간입니다!”

“라이브 채팅?”

“대박- 에이라이브 같은 거?”

“에이라이브 같은 게 아니라 에이라이브를 하는 거지!”

“와, 그건 진짜 연예인들만 하는 거 아니야?”

확실히 지난번 자유 이용권 상품보다 폭발적인 반응이었다. 케이팝 아이돌이라면 한 번쯤은 해 봤을 라이브 채팅 플랫폼 ’에이앱(A앱)‘의 ’에이라이브(A Live)‘. 나도 데뷔하고 나서 일주일에 못해도 두 번씩은 했었다. 시청자 수는 백의 자리, 가끔 운 좋거나 콘텐츠를 잘 선정한 날에는 최대가 2,000명이었지만. 심한 날에는 시청자 30명인 적도 있었다. 거의 개인 채팅이었지. 나도 연습생 시절 다른 가수들의 에이앱 라이브 방송을 보면서 원동력을 얻었던 걸 생각하면, 기대감으로 흥분한 연습생들의 마음이 이해 갔다.

“이 소중한 기회를 한 팀에게만 준다면 너무 아쉽겠죠?”

“네!!”

“그래서 상위 세 팀에게 라이브 방송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단!”

“단?”

“1위 팀은 30분, 2위 팀은 15분, 3위 팀은 5분 동안 방송할 수 있습니다.”

3위 팀은 겨우 5분이라니. 아쉬워하는 연습생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래도 에이라이브 할 기회를 주는 게 어디냐는 반응이었다.

“본격적인 대결을 시작하기 전에, 팀별로 10분간의 연습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다행히 모두 현질까지 해 가면서 한지라 게임을 플레이하는 거에는 익숙해 보였다. 지운이 형을 빼고.

“클리어된 노래가 하나도 없네.”

“나, 게임을 못 해. 모바일은 특히 더.”

“그럼 지운이 형이 가장 쉬운 노래하자.”

“수빈이 점수랑 카드 레벨 봐.”

“너 연습 안 하고 게임만 했지?”

“아, 아니거든요?”

“그럼 수빈이가 제일 난이도 높은 노래 출전하자. 어때?”

“게임은 걱정하지 마세요!”

순식간에 연습 시간이 끝나고, 대결이 시작됐다. 첫 번째는 무난한 곡이었다. 하지만 지운이 형의 실력은 상상 그 이하였고, 장렬하게 꼴찌로 게임을 마무리했다. 중간에 [FAIL]이 안 뜬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너무 무난한 난이도의 노래여서 다들 많이 플레이를 안 했는지, 노래 테마 카드 레벨이 높은 사람이 없었다.

“차지운 연습생, 괜찮아요?”

“하하, 저는 괜찮은데 저희 팀 애들한테 미안하네요.”

3차전까지 진행하고 나서는 쉬는 타임으로 팔로워들의 아이디를 보는 시간이 있었다. 이미 연습생들은 각자의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어서, 최대한 연습생들과 비슷한 이름으로 하려는 아이디도 있었다.

[박줴봉]

[강도현재순위]

[차치운]

“야, 대박이다.”

[재봉아 빨머해줘]

“빨머? 빨간색 머리 말하는 건가?”

“와 아이디어 좋다-”

“형, 저 빨머 하면 잘 어울릴 거 같아요?”

박재봉한테 빨간 머리? 안목이 있는 사람이다. 피부톤도 하얗고, 튀는 듯 새빨간 옷도 유독 박재봉한테는 착붙이었다. 본인도 잘 아는지 메이크업 할 때도 붉은 색조로 하는 듯했다.

“응.”

“나중에 빨간색으로 한번 염색해 봐야겠어요. 빨간색은 그래도 탈색 조금만 해도 되지 않을까요?”

다들 이제 게임은 뒷전이고, 자기 이름 찾기에 열심이었다. 나도 내 팬 중에서 신박하고 재미있게 만든 사람이 없을까- 하고 찾아봤다가 바로 후회했다.

[승빈이 견주]

[승빈이만 보면 짖는 개]

[짖어봐 승빈아]

“와우-”

“왜 그래요, 승빈이 형?”

“아니야.”

“재밌는 닉네임 있어요? 보여 줘- 아, 아니에요.”

내가 그러게 보지 말라고 했잖니. 판도라의 상자라도 본 거처럼 뒷걸음질 치는 걸 보자니 헛웃음이 나왔다. 유독 내 팬들이 격해 보이는 게 비단 내 기분 탓만은 아닌 거 같았다.

그리고…….

[현빈 원빈 그리고 문승빈]

이건 차마 누가 볼까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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