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36화 (36/346)

36화

2차 경연 방청 당일, 문스트럭은 대기 줄을 가득 채운 팔로워들 틈에서 생각했다.

‘이게 얼마 만의 오프냐…….’

지금까지는 현역 아이돌만 덕질해 왔기 때문에 음악 방송 녹화를 가거나, 비활동기일 때는 행사를 뛰곤 했다. 하지만 연습생 최애를 얻고 나서는, 프로그램 경연이 아니면 최애를 만날 수 없었다. 심지어 1차 경연 현장 평가는 광탈했으니, 공개 대면식이 가까이서 문승빈의 실물을 볼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알았어, 걱정 말라니까?”

그녀는 친구들에게 오는 전화에 답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처음 문스트럭이 현장 평가 방청에 당첨되었을 때, 그녀의 투마월 덕메이트들은 탄식했다.

“야, 어떻게 둘 이상이 같이 당첨되는 경우가 없냐?”

지난번에는 K 혼자 당첨이 되더니, 이번엔 문스트럭 혼자 덜컥 당첨된 것이다. 문스트럭은 졸지에 문승빈과 차지운, 강도현의 사진을 모두 찍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입장하겠습니다!”

“야, 지금 들어간다. 이따가 연락할게.”

[지운이 인생 사진 건져 와야 한다?]

입장 번호가 무색하게 모두 앞자리를 사수하기 위해 달렸다. 문스트럭도 마음과 같아선 펜스를 잡고 싶었지만, 카메라를 숨겨야 했기 때문에 적당한 위치에 자리 잡았다.

“다리 아파-”

방청이든, 사녹이든 간에 불러 놓고 제시간에 시작하는 경우가 없었다. 시작도 전에 다리에 힘 풀려서 주저앉을 뻔했다. 카메라 숨기고 뛰는 오프는 또 오랜만이라 배로 힘들었다.

“안녕하십니까, 팔로워님들! To My World 시즌 2 2차 경연을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1차 때도 이러더니, 5분만 더 딜레이됐으면 무대 난입했다, 진짜.”

문스트럭은 등 뒤에서 자신보다 더 살기 가득한 목소리를 들었다. K가 만약 함께했다면 저러고 있지 않았을까- 흥미가 생겼다. 그녀는 원래 오프를 뛸 때마다 덕메와 함께하거나, 덕메를 만들어 오는 친화력의 소유자였다.

“1차 때도 이랬어요?”

“아, 말도 마세요. 그때도 딜레이 엄청 오래 해서 다리에 쥐 나고 난리였어요.”

“저는 1차 때 못 가서-”

“저도 원래 당첨 운 진짜 없는데 운 좋게 1, 2차 둘 다 왔어요!”

“원픽이 누구예요?”

“저는 민호요. 성민호.”

“아, 그 전우치?”

“네! 민호 아시는구나.”

전우치 조에서 댄브 파트여서 이름과 얼굴은 알았다. 여자는 자신의 원픽을 아는 사람을 만난 것이 엄청 반가웠는지 열심히 최애 pr을 하기 시작했다. 문스트럭도 질세라 문승빈 pr을 했다.

“승빈이 이번에 뮤직 쇼 영상 보셨어요? 백발에 반짝이 완전 요정님 아니냐고요.”

“민호 소속사에서 커버 영상 올린 거인데 한 번 봐 보실래요?”

“놀이동산 영상에서 놀이 기구 타다가 얼굴 질린 거 보셨어요?”

“민호가-”

정말 각자 최애만 얘기하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내적 친밀감이 높아질 때쯤, 여자가 제안했다.

“저… 어차피 민호는 댄스 포지션일 거고, 승빈이는 보컬일 테니까-”

“서로 투표해 줄까요?”

여자는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읽은 거냐는 듯 수신호를 보내며 눈을 찡긋했다. 같은 덕후끼리 돕고 살아야지-

* * *

“무대가 왜 이렇게 어두워…….”

기다림 끝에 문승빈네 무대가 시작되었지만, 누가 있는지 실루엣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씨넷의 조명 미감은 유명했다. 시종일관 정육점 조명을 쓰거나, 지나치게 어두운 조명 때문에 뮤직 쇼를 볼 때도 화난 적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움짤계를 같이 운영하는 문스트럭에게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속으로 씨넷 욕을 한 바가지 하고 있던 그때, 피아노 반주가 나오면서 무대 왼쪽에 핀 조명이 켜졌다.

아직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두 명의 연습생이 거울 앞에서 안무를 맞추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명이 무언가 잘 풀리지 않는 듯,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 주저앉았다. 옆에 있던 연습생은 그를 위로하려는 듯 무릎을 굽혀 어깨를 두드린다.

[할 수 있을까, 내가-]

정적을 깨는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뭐야, 누구야?”

누군지 알아내기도 전에, 이번에는 무대 중앙에서 핀 조명이 켜지면서 또 다른 연습생 둘이 보였다. 여기서도 문스트럭은 문승빈이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머리색이 승빈이가 아니야.”

이번에는 각자 노트에 가사를 적는 듯하더니, 이전 연습생과 같이 좌절하는 모습이 보였다.

[할 수 있을까, 내가-]

같은 멜로디였지만 확연히 다른 목소리.

“미친, 성재야!”

역시 원픽의 목소리를 알아채는 건 덕후밖에 없었다. 노트를 찢어서 구기는 연습생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다시 조명이 꺼졌다. 문스트럭은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한 팀에 5명씩인데 2명, 2명이 나왔으면 승빈이는 혼자 나오는 건가? 어떤 모습일까?

마침내 무대 오른쪽에서 핀 조명이 켜지고,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분명 현실이었다. 문승빈이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그것도 흑발로.

“이거 실화냐-”

“승빈이 피아노도 쳐?”

“뭐야, 심지어 잘 치는데?”

“미친, 흑발이다.”

“흑발이라고? 여기서 흑발이 왜 나와?”

“승빈아!!!!”

흑발에 흰 셔츠, 단정한 넥타이와 회색 슬랙스. 완전 귀공자 스타일링이었다. 문스트럭은 입을 틀어막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할 수 있을까, 내가-]

네가 하지 못할 게 뭐니, 승빈아. 너는 다 할 수 있단다. 이전까지는 별생각 없던 가사 한 줄에 갑자기 과몰입되는 그녀였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암전. 관객들은 예측할 수 없는 무대 구성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또?”

“뭐야?”

드디어 전체 조명이 켜지더니, 연습생들이 한 소절씩 부르며 무대 중앙으로 모였다. 그런데 멀리 있을 때는 잘 안 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입고 있는 재킷이 각자 다른 모양이었다.

“옷이 다 다르네?”

“따로 안 맞춘 건가?”

“아, 미친.”

“왜?”

“X발, 미친놈들… 저거 지운이 찐교복임.”

“교복? 교복이라고?”

문스트럭은 정신을 다잡으려고 노력했다. 자칫했다가는 여기서 내가 기절할 수도 있겠구나. 데뷔하고 나서나 볼 줄 알았던 교복을 이렇게 빨리 보게 될 줄이야. 그녀가 상상한 모습 그대로였다. 끝까지 채운 단추와 단정한 넥타이. 다 챙겨 입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모범생의 느낌은 아닌.

첫 소절은 이성재의 솔로 파트였다. 그동안 개그 캐릭터라고만 생각해서 실력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뜻밖에 미성이었다. 게다가 노래를 부르는 감성이 특히나 잘 어울렸다.

[설레던 처음을 기억해

내 모든 것을 다 걸고

찬란하게 빛날 미래를

꿈꾸던 그날의 나를]

“이거 청춘예찬 맞지?”

“얘네 가사도 바꿨나 봐.”

“성재야!!”

“어머, 저 사람 우나 봐요.”

“하긴, 이성재 연생 기간 거의 7년이라면서요. 나 같아도 눈물 난다.”

“우리 민호도 장수 연습생인데…….”

그리고 이어진 차지운의 파트.

[넘어지는 건 아프지 않아

멈춰서는 내가 나를 더

아프게 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돌아보니

너무 먼 길을 왔어]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모두 짜기라도 한 듯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촬영장 전체에 차지운의 목소리만이 가득했다. 문스트럭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처음에 보컬 팀으로 나왔을 때도 너무 의외라 놀랐는데, 노래를 진짜 잘했다. 무엇보다도 음색과 감정 표현이 유독 좋았다. 그녀만의 감상은 아니었는지, 주변에서도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친 거 아니야? 왜 이렇게 슬퍼…….”

“아니, 쟤는 뭐 이렇게 세상 풍파를 다 맞은 거처럼 부르냐.”

“목소리 너무 좋은데?”

“쟤 원래 춤멤 아니었어?”

“래퍼 포지션이었던 거 같은데.”

“미친, 지운아. 그 얼굴에 노래까지 잘하면 어쩌라고!”

다음으로 다른 두 명의 파트가 이어지고 대망의 문승빈 파트에서 문스트럭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참느라 입술에서 피가 날 지경이었다.

[할 수 있을까 내가

수없이 의심했던 시간들

언젠가 웃으며

추억할 수 있을까]

“아, X발.”

얼마 남지 않은 정신으로 겨우 카메라를 붙잡았다. 자칫하다가는 떨어트릴 지경이었다. 그녀는 결국 성민호가 최애인 옆 사람에게 대신 찍어 달라고 요청했다.

“민호 무대 때, 제가 진짜 제대로 찍어 드릴게요.”

“알았어요. 승빈이랑 지운이 맞죠?”

“네, 네. 감사합니다.”

문승빈을 안 지 몇 달 되지 않았지만, 이렇게 애틋한 최애는 처음이었다. 짧지만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고, 그녀는 다시금 다짐했다. 그 어떤 X같은 상황과 어그로가 끌리더라도, 네 앞에는 꽃길만 깔아 줄 거라고.

‘승빈아, 네가 내 첫사랑은 아니지만 끝사랑이다.’

노래 실력도 물론이지만, 전광판에 비친 연습생들의 표정이 현장 팔로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마치 뮤지컬 무대를 보는 것 같은 구성과, 그 모든 걸 오그라들지 않게 보여 주는 연습생들의 감정 표현. 다른 팀들처럼 고음이 눈에 띄고 신나는 무대는 아니었지만, 단체로 연기 수업이라도 받은 건지 표현력이 상당했다.

멤버들 간의 화음 조합도 최고였다. 문스트럭도 수험생 시절에 이 노래를 자주 들었지만, 원곡은 이렇게 화음이 풍부한 노래가 아니었다. 원곡의 감성을 잃지 않으면서, 새로운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놀라웠다.

노래는 점점 절정을 향해 가고, 차지운을 제외한 연습생들의 조명이 어두워졌다. 모든 음악 소리가 사라지고 정적으로 가득한 공간. 그리고 이어지는 차지운의 솔로 파트.

[할 수 있을까 내가

긴 겨울 지나

꽃 피울 수 있을까]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와 물기 가득한 눈빛까지. 문스트럭은 이 순간 확신했다.

‘됐다, 보컬 1위는 무조건 청춘예찬이다.’

차지운의 목소리에 하나둘 화음이 쌓이기 시작한다.

[겨울 지나 봄이 오면

얼어 있던 이곳에

아름답게 피울 꽃 한 송이

할 수 있어, 우린]

서로의 눈을 마주하며 한 음 한 음 맞춰 가는 다섯 명의 모습은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화음과 더불어 문승빈의 호소력 짙은 고음 애드리브까지. 기술과 감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무대였다.

관객석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무대 위 다섯 명은 끝까지 단단했다. 결국 해낼 수 있다는 희망적인 가사처럼, 그들은 마침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완벽했다. 보통 이런 컨셉의 무대는 누구 하나 감정에 복받쳐 울먹이고는 했는데, 감정을 표현하되 넘치지 않았다.

노래의 끝에는 각자 처음 위치했던 곳으로 돌아갔다. 거울 앞에서 춤을 추고, 노트에 가사를 끄적거리고 피아노를 연주했다. 하지만 처음과 달리 가사가 바뀌었다.

[할 수 있어, 우린]

여운을 남긴 엔딩에, 무대가 끝나고 나서도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성재야, 넌 할 수 있어!”

울먹이던 한 팔로워의 외침을 시작으로, 현장에는 박수와 환호 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대 내내 감정 조절을 잘하던 연습생들의 눈에도 어느덧 눈물이 맺혀 있었다. 특히 이성재 연습생은 눈물이 터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는지 조용히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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