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35화 (35/346)

35화

촬영장에 들어가니 우리가 조악하게 그려서 보냈던 무대 세트가 구현되어 있었다.

“대박-”

“이걸 이렇게 해내시네, 쩐다.”

무대 구석에 놓인 피아노에 궁금증을 가지는 연습생도 있었다.

“피아노도 있네?”

“피아노 연주도 해?”

교복과 함께 피아노도 회심의 아이템이었다. 누가 연주하냐고? 내가 한다. 연기하면서 정말 별걸 다 배웠는데, 피아노도 그중 하나였다. 딱 고백하는 장면 하나에 잠깐 쓰일 거였음에도, 몇 개월을 연습한지 모른다. 역시 뭐든 배워 두면 어디선가 쓰게 되나 보다. 앞선 리허설을 마치고 구경을 하러 온 박재봉이 다가왔다.

“헐. 형, 피아노도 칠 줄 알아요?”

“조금.”

“대박이다- 나중에 저도 가르쳐 줘요. 저도 조금 칠 줄 알거든요.”

“그래? 어떤 거 연주할 줄 아는데?”

“젓가락 행진곡이요!”

“오, 양손으로 연주 가능?”

“양손이요? 양손 검지로는 할 줄 아는데. 그것도 양손 연주이긴 하죠?”

“아…….”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난감하던 차에 우리 팀을 부르는 감독의 목소리에 무대로 향했다. 순조롭게 리허설이 진행되던 중 문제가 발생했다.

[할 수 있을까- 내가

긴 겨울 지나…….]

“우는 거야?”

“그런 거 같은데?”

클라이맥스가 지나고 주변 소리가 다 사라진 후 지운이 형의 목소리만 나오는 파트가 있다. 이번 경연의 히든카드이기도 하고, 무대의 감성을 극대화해 주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런데 감정이 북받쳤는지 노래를 잇지 못한 거다.

뒤이은 화음에서도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다가, 아예 노래 부르기를 멈췄다. 조금 당황했지만, 다른 팀원들이 침착하게 해내서 겨우 노래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무대를 마치고 내려오는데 무거운 분위기였다. 특히 지운이 형이 심각했다.

“미안해, 형한테도 너무 미안해요…….”

“괜찮아, 심호흡하고.”

“맞아요, 형. 그러다 과호흡 오겠어.”

우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지운이 형을 부축해 겨우 대기실로 올 수 있었다.

“나 지운이 형이 저렇게 우는 거 처음 봐.”

“그니까. 엄청 무덤덤한 줄 알았는데…….”

다른 연습생들도 지운이 형의 눈물에 적잖게 당황한 듯했다. 하긴, 날카로운 인상 때문에 먼저 다가오는 연습생도 적어서 친한 연습생이 손에 꼽는다. 친하지 않은 사람 앞에서는 감정 표현을 극도로 숨기는 사람인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리허설같이 사람 많은 곳에서 눈물을 보인 건 나도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제 진정이 좀 돼요?”

“응, 미안해…….”

“애는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는 거야. 뚝 그쳐!”

“형한테 엄청 중요한 무대-”

성재 형을 보더니 또 울음이 터졌다. 아니, 이 형 수도꼭지야? 무슨 고장 난 수도꼭지인 양 눈물이 한번 터지면 끝을 볼 때까지 멈추질 않는다.

“야, 너 지금 눈 완전 붕어야, 붕어! 카메라에 완전 못난이같이 나온다니까?”

“아흑, 그건 안 되는데…….”

“와, 얘 지금 이 와중에 카메라 신경 쓰는 거야?”

“아, 형. 이런 때까지 웃기지 말라고요-”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는지 지운이 형도 옅게 웃기 시작했다.

“애들아, 웃겨서 운 걸로 나오게 하자.”

“형은 꼭 데뷔해요. 예능 멤버로 활약할 듯.”

“예능? 야, 난 비주얼로 데뷔할 거야-”

“…풉.”

뒤이은 웃음소리에 정적이 오갔다. 지운이 형에게로 시선이 모였다. 퉁퉁 부은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야, 웃어? 웃냐고-”

“안 웃겠냐고요!”

“너무들 하시네, 진짜!”

다행히 형도 많이 진정되어 보였다. 일단 급한 불은 껐다. 팅팅 불은 눈에 물병을 갖다 대면서도 내게 물었다.

“어쩌지, 승빈아?”

“감정이 너무 격해져서 그런 거죠?”

“응. 감정 이입을 하는데 어디까지 해야 할지를 잘 모르겠더라.”

아주 공감 가는 고민이었다. 얼떨결에 데뷔작부터 대박을 치고 난 후 연기 생활을 하면서 역할에 대한 감정 이입은 큰 고민거리였다. 아예 상관이 없는 이야기 속 주인공이라면 쉽게 과몰입을 방지할 수 있을 텐데, 자전적인 스토리의 무대니 더 어려웠을 것이다.

“음… 감정이입을 하되 너무 슬프면 아주 쓸데없는 생각을 해요.”

“쓸데없는 거?”

“네, 저는 중학교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을 떠올리고는 해요.”

“그러다가 웃으면?”

“…제가 그런 것도 봐 줘야 해요?”

“야이씨.”

“장난이고, 그냥 형은 전달자라고 생각해요. 형의 이야기지만, 나랑 다른 팀원들 얘기이기도 하잖아요. 연기는 노래를 풍부하게 하기 위한 부가적인 요소이지, 그 자체가 핵심이 되어서는 안 돼요.”

“와, 너 진짜 연기 선생님 같다.”

어쩌면 내 두 번째 인생의 롤은 아이돌이 아니라 선생님 아닐까. 회귀하고 나서 온갖 종류의 선생님 소리를 다 듣는 기분이었다.

* * *

“가지가지 한다, 진짜-”

K는 씨넷 투마월 홈페이지에 뜬 공지를 보고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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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뜩이나 2차 경연 방청 광탈해서 잔뜩 빡친 상태인데, 갑자기 씨넷 계열사 냄새가 풀풀 나는 게임을 들고 와서 투표에 써먹겠다는 소식에 팔로워들의 불만도 폭주했다.

-이 ㅅㄲ들이 장난하나?

-저거 백퍼 씨넷에서 만든 게임일 듯?

-저거 렉 ㅈㄴ 심해서 깔았다가 바로 지웠는데.

-이제 게임까지 잘해야 하네... 극한직업 팔로워...☆

-어쩐지 비하인드 보니까 애들이 게임 오지게 하더라.

┕ppl이었네...

놀이동산과 도미노 비하인드에서 쉬는 시간이라고 나올 때마다 핸드폰에 얼굴을 박고 있던 이유가 이제야 설명됐다. 저건 뭔 게임인데 단체로 하는 건가, 합숙소 내 유행인가 했는데-

어플을 깔고 들어가 보니 벌써 연습생 이름으로 계정을 만든 사람들이 있었다. K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아이디에 ‘차지운’을 넣었지만, 이미 누군가 선점한 후였다.

현재 1위는 박재봉의 팬인 듯했다.

[재봉아 빨머해줘]

“재밌는 사람이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팬도 있구나. K도 차지운에게 하고 싶은 말로 아이디를 만들기로 했다.

[지운아 누나 부자 만들어 줘]

“이건 좀 에반가?”

[데뷔하자 지운아]

“이 정도면 무난하겠지?”

그래, 데뷔하면 종이비행기 시세도 저절로 탑 찍겠지.

그사이 2차 경연 방청을 간 문스트럭에게도 연락이 와 있었다.

[야, 이게 뭔 소리냐?]

[짜증나게 뭔 소리냐고.]

[나 게임 ㅈㄴ 못하는데]

[용병이라도 구해야 하는 건가...]

평소 게임에 관심이 1도 없던 K였다. 리듬게임 자체도 생소했기 때문에 어떤 게임인지 맛보기나 해 보자는 마음으로 차지운의 1차 경연곡 ‘달려갈게’를 플레이했다. 그리고 현란하게 쏟아지는 별에 손가락이 분주해졌고 실패할 때 나오는 진동 소리가 난무했다. 열 손가락 모두 동원해서 겨우 전주 파트를 넘기고 첫 소절이 나오려던 순간 화면 가득 [FAIL]이 떴다. 그녀의 머릿속에 ‘시작도 안 했는데 모두 끝나 버렸다’는 노래 가사가 맴돌았다.

“X발…….”

그리고 뒤늦게 확인한 문스트럭의 연락에 K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미친놈들이 단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걍 다 하드던데?]

이미 기회를 한 번 날렸기 때문에 표를 얻기 위한 현질은 필수가 되었다. 이럴 바엔 차라리 돈을 더 내고 해결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 K였다. 이 짓을 매일 하라고? 그러다간 성격 다 버릴 게 뻔했다. 안 그래도 요즘 차지운의 방송 태도를 두고 거의 매주 알계까지 파이고 있어서 예민한데 말이다. 차지운이 싸가지 없는 게 아니라, 생긴 게 양아치상일 뿐인데-

“어차피 호구 물었다 이거지?”

원래 처음 게임을 하는 유저에게는 이벤트성으로 캐시를 더 주거나, 게임 횟수를 늘려 주지 않는가? 그런데 이 게임은 어차피 유저들 대부분이 표를 얻기 위한 사람이라는 것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처음부터 얄짤 없었다.

K는 결국 본가에 있는 동생에게 전화했다.

“야.”

“왜?”

“이게 누나가 전화를 하는데 X가지 없게.”

“요.”

“너 리듬 게임 해 봤냐?”

“해 봤지-”

“씨더스타 알아?”

“아, 그 개쓰레기 게임?”

그래, 잘 아는구나. 곧 네가 할 그 게임.

“돈 받으면서 게임 해 볼래?”

“뭐야, 갑자기.”

“할 거야, 말 거야?”

“조건이 뭔데?”

“매일 5번 이상 클리어하기.”

“껌인데?”

“그럼 하는 거다? 전화 끊자마자 어플 다운 받아 놔, 메시지로 아이디 비번 보내 놓을게.”

“알았어. 입금은 언제?”

“매달 모아서 한 번에 보낼게.”

“콜.”

짹짹이에는 벌써 씨더스타 대리 플레이를 구하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씨더스타 대리플레이 구합니다.]

가격 제시 받아요

#씨더스타 #투마월 #Tomyworld #투마월시즌2 #강도현 #정유현

[씨더스타 대리플레이해드립니다.]

(클리어 인증 사진)

#씨더스타 #강도현 #정유현 #문승빈 #박재봉 #투마월 #Tomyworld #투마월시즌2

짹짹이를 둘러보다가 차지운 사진을 저장하던 중에 동생이 보낸 메시지 알림이 떴다.

[사진]

[이렇게 하면 되는 거?]

깔끔하게 클리어된 화면과 표 1개가 추가되었다는 화면 캡처였다. 2n년 인생사 처음으로 혈육에 대한 애정이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ㅇㅇ감사]

[근데 이게 뭐야?]

[몰라도 돼.]

[누나 또 아이돌 때문에 하는 거야?]

[누나 탈케? 그거 한다며.]

[그렇게 됐다.]

“내가 저런 망언을 했었다고?”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예전 최애가 ‘달려갈게’로 화려한 전성기를 보내다가 음주 운전이라는 병크를 터트렸으니까. 하지만 사랑은 또 다른 사랑으로 잊는다고 하지 않는가?

물론 K는 아직 차지운에게 ‘입덕’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서로의 성공을 필요로 하는 ‘비지니스’ 관계 정도라고 정의하고 있다. 물론 본인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엊그제 윤빈의 종이비행기가 100만 원 가까이에 거래됐다는 글을 보고 K의 야망은 더욱 커졌다.

“그래도 윤빈보다는 높은 등수로 데뷔하지 않을까?”

K는 차지운이 윤빈을 포함한 다른 연습생보다 나은 이유를 수십 개는 말할 수 있었다. 아마 차지운 본인보다도 그의 셀링 포인트를 더 정확히 알고 있을 그녀였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이것은 철저히 종이비행기의 시세 상승을 위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그리고는 묘하게 미안해졌다.

“내가 얘를 너무 돈으로 보나?”

그녀의 답도 없는 입덕 부정기가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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