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죄송합니다. 제가-”
“아, 여자친구 있으시구나…….”
“아니요, 그건 아닌데 제가 특수한 상황이라 정말 죄송합니다!”
졸지에 사과까지 하고, 급하게 지하철을 빠져나왔다.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 나오는데, 앞에서 오던 사람과 충돌할 뻔했다.
“괜찮으세요?”
“아이씨, 눈을 어디다 두고- 승빈이?”
화나 있던 여자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온화해졌다. 과거에 내가 알던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이름을 부르는 게 자연스러웠다.
“네?”
“헐, 미- 아니 문승빈 연습생 아니에요?”
산 넘어 산이었다.
“매주 투표하고 있어요!”
“아, 감사합니다. 하하…….”
“어떡해, 싸인 부탁해도 될까요?”
“아유, 가능하죠.”
“미쳤나 봐- 이거 꿈 아니죠? 혹시 사진도-”
“네! 물론이죠. 예쁘게만 찍어 주세요.”
“고마워요. 앞으로도 계속 응원할게요!”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무조건 택시 타고 다녀야겠다는 교훈을 남긴 하루였다.
* * *
“특수한 상황? 스파이야 뭐야.”
작은 얼굴이 반은 캡 모자로 가려져 있었지만, 이수정은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평범한 외모는 아니라고. 게다가 일반인들이 할 리가 없는 백발까지. 캐리어를 들고 기숙사까지 무사히 도착한 수정은 곧장 대학교 커뮤니티에 들어가 글을 작성했다.
[혹시 학우분 중에 백발인 남자분 있나요?]
좀 전에 지하철역에서 어떤 남자가 캐리어 들어줬는데, 혹시 우리학교 학생이신가요? 얼굴은 모자 때문에 가려졌는데도 존잘이셨음.
글이 올라옴과 동시에 댓글이 무수히 달렸다.
-백발? 아무리 그래도 백발은ㅋㅋㅋㅋ
-글쎄? 백발은 본 적 없는데.
-와 근데 모자 썼는데도 잘생김이 느껴질 정도면;;
┕여기 근처에 사는 연예인이 있나?
-주작 아님? 이근처에서 잘생긴 사람을 본적이 없는데;;
┕22 걍 캐리어 들어준거 버프로 잘생겨 보인거 아님?
┕ㄱㅆ) ㄴㄴ 진짜 청순하게 존잘이었음.
“아무리 생각해도 일반인은 아닌 거 같은데-”
그냥 잘생긴 남자를 만난 추억으로 남겨 두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이 180도 바뀐 것은 우연히 마주한 투마월 재방송 때문이었다.
“어, 저 남자?”
티비 화면 너머 백발의 남자 문승빈. 저 남자가 지하철 백발남이라는 것에 강한 확신이 들었다.
[나 며칠 전에 백발인 학우 있냐고 물어본 사람인데]
그 남자 투마월 문승빈인 거 같아. 역시 일반인이 아니었네.
-주작 아니야?
┕긍까;; 백발했다고 다 문승빈이냨ㅋㅋㅋㅋ
-근데 저 글이 목격담보다 먼저 올라온거긴 함.
“아닌데, 진짜 맞는 거 같은데-”
-이거 한 번 봐봐. 이 사진이랑 옷이 같아? (링크)
댓글에 달린 링크로 들어가 보니 목격담이었다.
(사인 사진)
(셀카 사진)
시간 지나서 올립니다! 이틀 전에 12시쯤 00역에서 승빈이 만났어요!
저랑 부딪힐 뻔해서 놀랐을 텐데도 표정 한번 안 구기고 싸인이랑, 셀카 요청 다 받아줬어요ㅠㅠㅠ 승빈이 실물 진짜 최고... 화면빨 진짜 안 받는 거 같아요.
원래도 원픽이었는데 앞으로 더 응원할듯
#문승빈#투마월문승빈#Moonseungbin
“미친, 진짜 문승빈이잖아!”
-이거 한 번 봐봐. 이 사진이랑 옷이 같아? (링크)
┕보고왔는데 맞아. 시간대도 같고, 저 모자랑 입은 옷도 똑같아;;
┕ㅁㅊ 승빈이 이 근처 사는거야?
┕ㅈㄴ부럽다ㅠㅠㅠㅠ덕계못이냐고
┕나 오늘부터 역 앞에서 노숙함.
┕난 이미 돗자리 깔고 옴.
그렇게 4화가 방영되는 오늘, 그녀는 처음으로 투마월 시즌 2를 본방 사수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언니가 웬일이야? 서바이벌을 다 보고.”
“나? 문승빈 보려고.”
“언니 벌써 원픽도 정했어? 아이돌 관심 없다며.”
“아이돌 관심 없어. 그냥 문승빈한테 관심 있는 거임.”
“그게 뭔 말이야. 문승빈이 아이돌 연생인데- 암튼 볼 거면 여기 투마월 게시판이랑 같이 봐.”
동생이 보낸 링크를 들어가 보니 이미 댓글이 5000개가 넘어가고 있었다. 화력 미쳤네.
그녀의 관심사는 오직 문승빈이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녀가 애타게 찾던 문승빈은 30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아니, 문승빈 나오긴 하냐?”
미션 곡을 뽑는 양궁 장면에서 드디어 처음 나왔다.
“오, 운동도 잘해?”
하지만 그도 잠깐이고, 다시 문승빈의 분량은 실종됐다. 4화는 박재봉과 윤빈이 있는 전우치 조의 스토리가 메인이었다.
-전우치 아이디어 윤빈이 낸 거였어?
┕ㅈㄴ 의외다...
-야 한국인 연생들 사이에서 해외파인 애가 전우치 생각해온 건 무슨 상황이냨ㅋㅋㅋㅋㅋㅋ
-윤빈이 춤,노래,얼굴도 잘하는데 프로듀싱도 ㅈㄴ 잘해...
┕ㄹㅇ 사기캐임
-재봉이 육식동물 사이 소동물같앜ㅋㅋㅋㅋ
-쟤네 옹기종기 모여있는데 무슨 늑대 소굴 들어간 토끼 같음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지금 저기서 토끼가 제일 쎄잖앜ㅋㅋㅋㅋ
건장한 연습생들 사이에서 비교적 몸집이 작은 박재봉을 보며, 이수정은 심드렁하게 자신의 여동생에게 말했다.
“박재봉? 쟤는 너무 어린데?”
“근데 쟤가 센터야. 인기도 엄청 많아-”
“야, 아직 젖살도 안 빠진 애 좋아하는 건 너무 양심에 찔리지 않냐?”
하지만 전우치 조의 무대가 시작되고, 그녀는 아까 자신의 발언이 망언임을 인정했다. 처음 눈을 사로잡은 건 윤빈이었다. 호랑이 같은 등장에 눈길이 가지 않을 사람은 없으니까.
-돌았네...
-호랑이랑 윤빈 동의어로 사전에 등록되어야 하는 거 아님?
-ㅅㅂ 저게 어떻게 열아홉이야;;
┕걍 풀네임이 윤빈오빠인걸로 하자
┕동의합니다. 저 얼굴과 몸이 오빠 아닌거 유죄다 유죄야
그런데 무대가 진행될수록 앳된 얼굴이지만 눈빛이 날 서 있는 박재봉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취향은 유구했다. 본업 잘하는 남자. 그 본업이 아이돌이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보다 5살 어린 아이돌에게 말 그대로 덕통사고 당했다.
“…X됐다.”
그녀의 여동생이 쉴 새 없이 대상을 바꿔 가며 덕질하는 걸 항상 이해하지 못했던 그녀였다. 구구오빠인가 군대 간다고 식음을 전폐했을 때는 진짜 집에서 내쫓을 뻔했는데. 괜히 문승빈이 원망스러워졌다. 그날 캐리어만 안 들어 줬어도, 아니 하다못해 문승빈이 4화에만 먼저 나왔어도! 하지만 이미 덕통사고 당한 사람에게는 그 누구를 던져 줘도 최애가 바뀔 리가 없었다.
충격받은 언니를 보며 에타의 동생은 돌판에서 유명한 명언 한마디를 날렸다.
“언니, 원래 최애는 유사 육아고, 차애는 유사 연애랬어.”
“…….”
“그냥 재봉이 키운다 생각해.”
그래, 재봉이는 군대 가려면 한참 남았으니까.
* * *
6명의 남자들로 시끌벅적한 거실. 그리고 그 틈을 피해 주방에 들어온 나.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된 선택이었다. 어쩌다 저 시커먼 놈들을 내 자취방에 데려온 거지?
“형! 방송 시작해요!”
“승빈아, 빨리 와!”
하, 오늘 무사히 넘어갈 수 있겠지?
샷건 팀이 내 자취방에 모인 전말을 설명하자면 한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같이 방송 못 봐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는지, 김형석은 1차 경연 방송은 무조건 같이 보자는 말을 연습마다 지겹도록 했다.
어차피 1차 경연 방송은 한참 뒤 일이고, 다들 잊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냥 대충 그러겠다고 했다. 그런데…….
“형들! 다음 주에 5화 같이 보는 거 안 잊었죠?”
“와, 너 그걸 아직도 기억해?”
“당연하죠!”
“근데 어쩌냐, 우리 내일 퇴소하잖아. 각자 집에서 봐야겠는데?”
“그건-”
순순히 포기할 줄 알았지만,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 승빈이 형 자취방에서 다 같이 보면 되겠네요!”
“승빈이 자취해?”
아니, 얘는 내가 자취하는 걸 어떻게 알았지? 내 입으로 자취라는 말을 꺼낸 적이 없는데 분명.
“아… 응.”
“승빈아, 우리 가도 괜찮아?”
“형~ 같이 봐요, 네?”
저기서 오면 안 된다고 말하기에도 애매했다.
“…그래.”
“아싸! 그럼 다음 주에 승빈이 형 자취방에서 모이는 거예요. 알았죠? 말 바꾸고 갑자기 스케줄 만들면 안 돼요!”
몇 명은 같이 신났지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은 못 이기는 척 수락했다. 특히 강도현은 유독 불편해 보였다. 만약 내일 못 간다고 하면 프로그램 내내, 어쩌면 끝나고 나서도 김형석은 잊지 않고 징징댈 게 분명하다는 걸 모두 아는 듯했다.
나중에 김형석에게 어떻게 자취하는 거 알았냐고 물어봤더니-
“형이 전에 영양제 자취방에 두고 왔다고 했었잖아요!”
와, 저걸 기억한다고? 정말 스치듯 했던 혼잣말이었는데. 앞으로 김형석 앞에서는 특히나 말조심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날, 숙소로 가는 길에 강도현이 넌지시 물었다.
“자취하는 줄 몰랐네.”
“한 지 얼마 안 됐어.”
“어쩐지 이전 집 가 보니까 이사 갔다고 해서 무슨 일인가 했지.”
강도현은 연습생 시절 몇 번 우리 집에 놀러 온 적이 있었다. VM과 계약 해지 후 번호도 바꾸면서 연락이 끊겼는데, 강도현도 자기 나름대로 나와 소통할 방법을 찾아다녔구나.
“급하게 결정된 거라 따로 얘기를 못 했네.”
“됐어. 굳이 나한테 말해야 할 필요 없었잖아. 안 그래?”
듣고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어차피 난 얘랑 더는 엮일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 흔적이나 정보를 남길 이유는 없었다. 1차 경연 연습 이후로 나름 잘 지내 왔다고 생각했는데, 뭔가 다시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 기분이었다.
* * *
“집이 왜 이렇게 휑해?”
“자취한 지 얼마 안 됐다니까?”
“승빈이 안 심심하게 자주 놀러 와야겠다.”
“됐거든. 곧 방송 시작할 텐데 다들 앉아 있어. 먹을 거 좀 가져올게.”
과자와 음료수, 그리고 치킨을 준비했다. 오늘만큼은 다들 식단 관리 따위는 잊고 먹어야지.
“형! 방송 시작해요!”
“승빈아, 빨리 와!”
아슬아슬하게 자리에 앉았다. 그때 강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왜요? 도현이 형, 그 과자 좋아해요?”
“어? 어.”
“너 입맛 특이하다? 나 저 맛 먹는 사람 처음 봐.”
“그러게? 그거 엄청 인기 없어서 단종된 줄?”
“우리 팀 나온다!”
과자 때문에 말이 더 길어질까 걱정이었는데, 타이밍 좋게 우리 팀 분량이 나왔다. 예상대로 김형석에 대한 약간의 악편이 들어갔다. 팀원들 모두 형석의 눈치를 봤지만, 정작 당사자는 담담했다.
“어후 형, 제가 진짜 왜 저랬을까요?”
“너 괜찮아?”
“걱정되긴 하는데, 제 잘못은 맞으니까요.”
게시판 반응도 살벌했다.
-실력이 없으면 나대지말지...
-쟤는 뭐 잘했다고 울어?
-승빈이가 보살이네...
┕나였으면 쌍욕하고 인성논란으로 하차함.
-이제 겨우 열일곱인데 다들 머리에 힘주고 댓글 쓰세요.
┕열일곱이면 사리분별은 할 줄 알아야 하는 거 아님?
┕겨우 고딩인 애가 실수 좀 했다고 욕 박는 니가 더 사리분별 못하는 듯.
[어벤저스 조의 위기]
[순식간에 얼어붙은 분위기]
[할 말을 잃은 트레이너들]
부정적인 자막의 연속이었다.
X됐다. 다들 같은 생각이었는지, 거실에는 부스럭거리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