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대박! 형 고마워요!”
“형, 이때는 어떻게 연습해야 해요?”
[연습생들의 선생님이 된 문승빈 연습생]
그러고는 이전에 실력이 부족했던 연습생이 내 코치를 받고 해내는 장면을 교차하며,
[명인 문 선생의 보컬 클래스]
[죽은 실력도 심폐 소생술 하는]
따위의 자막이 나왔다.
“이렇게까지 서사를 준다고?”
게시판 반응도 꽤 호의적이었다.
-승빈이가 트레이너 해야 하는 거 아님?
-뚝딱이 치료사네 완전...
-우리 승빈이 인성도 좋아ㅠㅠㅠㅠ
┕진심 순하게 생겨서 성격도 엄청 좋네.
-승빈이가 사람 여럿 살리넼ㅋㅋㅋ
┕저정도면 부두술사야;;
┕연금술사라고 해줘ㅡㅡ
어쩌다 보니 후반 15분이 거의 내 얘기였다.
“왜 문승빈 연습생한테 물어보는 거예요?”
제작진의 질문에 연습생들의 릴레이 간증도 나왔다.
“완전 핵심만 잡아서 알려 줘요!”
“직접 시범도 보여 주니까 이해가 더 잘되는 느낌?”
누가 보면 1타 강사 수강생 후기 영상이라고 생각할 법도 했다. 벌써 사제 지간 케미로 게시글도 여럿 올라왔다.
-실력이 안 늘면 승빈 스쿨!
-대치동 1타 강사냐곸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정도면 승빈이한테 강사비 줘야 하는 거 아님?
┕아이돌 안하고 강사해도 잘 먹고 잘살 듯.
분량도 넉넉하니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들었다. 윤 피디의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의심도 있었다. 인성으로 영업하는 것만큼 위험한 게 없거든. 연예인에게 있어 인성 영업은 독이 든 성배다. 같은 잘못을 해도 인성으로 뜬 연예인은 배로 비난받고, 대중들에게 더 큰 배신감을 주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내 인성이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다지 좋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서.
아직 프로그램이니 초반이니 모두의 차애, 내 최애를 서포트해 주는 좋은 연습생 정도 이미지로만 먹고 들어가면 성공이었다. 그런데 정작 지운이 형과의 서사는 나오지 않았다. 저 승빈 스쿨인가 뭔가도 다 지운이 형과의 관계성을 만들려는 것 때문이었는데 말이다.
2화 마지막은 간단히 쉬어 가는 타임으로 숙소 선정 과정과 생활 모습이 나왔다. 연습생들의 아침 몰골이 적나라하게 공개됐다. 일어나기 전에 이불 속에서 눈곱 떼고, 머리 정리라도 하고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숙소도 잠깐 나왔다. 설마 했는데, 아침부터 젤리로 배를 채우는 박선우와 나의 대화가 방송됐다.
“형, 뭐 먹어요?”
“이거? 쩰리!”
-쩰리래 ㅈㄴ 귀여워서 주금.
-저러니까 살이 안찌지ㅠㅠㅠ 박선우 밥 먹어ㅠㅠㅠ
-승빈이 표정 봨ㅋㅋㅋㅋㅋㅋㅋ
-쟤네 mbti도 정반대일 거 같음ㅋㅋㅋㅋㅋㅋㅋ
서바이벌 시작하면서 제일 신경 쓴 게 표정 관리였는데, 저때는… 그냥 저 표정이 최선이었다. 이어서 묘하게 어색해 보이는 박재봉과 강도현의 숙소 모습도 잠깐 나왔다.
“앞으로 잘 부탁해!”
“…네!”
흡사 경계심 가득한 말티즈와 영문을 모르겠다는 너구리 같았다. 의외로 쟤네 조합도 꽤 인기 있겠네.
* * *
[눈부셔 도미노 ver]은 공개 당일부터 해외 SNS에서 먼저 인기를 얻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국내 알고리즘의 선택을 받았다. 공개된 지 이틀 만에 300만 뷰를 넘었고, 제작진들도 이 정도 반응은 예상치 못한 듯했다. 이렇게 부랴부랴 도미노와 관련된 콘텐츠를 준비한 걸 보면.
[투마월 도미노의 제왕은 누구?]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더니 모터를 다네.
-자체 콘텐츠 달달하다.
영상이 시작되자마자 대강당에 펼쳐진 도미노의 향연에 눈을 의심하는 연습생들이 나왔다. 족히 몇 천 개는 돼 보이는데, 도미노 색이 상당히 화려해서 더 시각적 충격을 주었다.
“이게 다… 뭐야?”
“이걸 진짜 하라고?”
-어우 징그러;;
-저 정도로 도미노 쏟아지면 애들 깔리는 거 아님?
“여러분, 눈부셔 도미노 버전이 이틀 만에 300만 조회수를 넘었다는 사실 알고 있나요?”
“300만? 30만이 아니라?”
“대박…….”
-진심 저 중 만번은 내가 봤을거임.
┕ㅇㅇ요즘 내 우울증 치료제임.
-조낳괴도 아니고...
“팔로워분들의 뜨거운 관심에 보답하기 위해, 오늘 여러분은 하트 모양 도미노를 만들 겁니다.”
“그리고 모든 팀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뭐야? 팀까지 정해서 한다고?? 도미노를???
-왜이렇게 도미노에 진심이 된건뎈ㅋㅋㅋㅋ
-등급별이겠지 뭨ㅋㅋㅋㅋ새로울 것도 없다.
그때 스태프들이 숫자가 붙어 있는 깃발을 가져왔다.
-저게 뭐야? 깃발 퀄리티 미쳤낰ㅋㅋㅋ
-뽑기인가?
┕아니, 이미 정해져 있다잖아.
-깃발에 그냥 종이 붙인 거잖아ㅋㅋㅋ
저 숫자, 분명 우리 숙소 호수다. 이조차도 급조한 티가 역력했다. 팀 조합을 새로 짤 시간도 부족했겠지.
“바로 여러분들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룸메이트입니다!”
“아…….”
“재밌겠다!”
반응은 극명히 갈렸다. 룸메이트라고 다 친한 게 아니니까. 가끔 저 X끼들이랑 못 살겠다고 제작진에게 항의하는 연습생도 꽤 있었다.
“각자 방 호수에 해당하는 깃발 앞에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불행 중 다행이었다. 선우 형 말고 다른 두 명과도 어색한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A~E 한 조에 5팀이 경쟁하고, 각 조 1위 5팀을 뽑는 방식이었다.
“승빈아, 도미노 잘해?”
“어렸을 때 빼고는 해 본 적 없어요.”
“난 진짜 잘해.”
“그래요?”
“진짜, 다들 나만 믿어!”
자신만만한 박선우였지만, 다들 신뢰하는 눈은 아니었다. 게임 방법은 간단했다. 바닥에 그려진 하트 모양 선에 따라 도미노를 가장 먼저 세우는 팀이 승리하는 거다. 다만 한 멤버가 50개씩, 모두가 돌아가며 도미노를 세워야 했다. 어려운 룰도 없고, 그냥 얌전히 도미노만 세우면 끝나는 게임인 줄 알았는데-
“승빈아 내가 도와주… 헉!”
“…형.”
“하하, 또 쓰러졌네?”
도미노 영상이 공개되었다기에 반응 좀 보려고 켰다가, 혈압 올라서 바로 꺼 버렸다. 다시 봐도 빡치네. 박선우 진짜 뭐 하는 인간이냐고.
한두 번은 웃고 넘어갔다. 그런데 내가 세우면 선우 형이 쓰러뜨리는 것이 10번 반복될 때쯤에는 인내심이 점점 바닥나고 있었다.
-승빈이 표정봨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문승빈이 세우면 박선우가 쓰러트리고ㅋㅋㅋㅋㅋ
-이게 머선일이고.
-아이고 선우야!!
회귀한 이후로 이렇게 심한 인내심 테스트는 처음이었다. 강도현이랑 김병대가 내 월말 평가 무대를 따라했을 때도 이 정도로 빡치지는 않았었다.
-ㅈㄴ톰과 제리얔ㅋㅋㅋㅋㅋ
┕선우 눈치 보는 거 봨ㅋㅋㅋㅋㅋㅋㅋㅋ
-정작 얼굴은 박선우가 고양인데ㅋㅋㅋㅋ
-승빈이 끝나고 성불한 거 아님? 저정도면 보살이얔ㅋㅋ
“톰과 제리는 또 뭐야?”
영상을 재생해 보니.
[톰승빈과 제리선우]
따위의 자막과 함께 내 머리 위에는 고양이 귀가, 선우 형 머리에는 쥐 그림이 붙어 있었다. 실시간으로 인내심이 무너지는 내 얼굴은 나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다음으로 이어진 건, 정유현네 팀이었다. 정유현네 방은 전체적으로 조용한 연습생들이 모여 있었다. 지운이 형도 같은 방이었다.
[평온한 205호 팀]
[침착하게 도미노를 세워 가는 205호]
-유현이 콧대 미쳤네;;
┕ㅈㄴ 썰매 타도될 듯.
-지운이 집중해서 입 삐죽이는 것 봐ㅠ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정유현이 옆을 힐끗거리기 시작했다. 왜 저러나 했는데, 옆에 종잇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중간중간 손을 뻗었지만 타이밍을 놓친 듯했다. 그러다가 결국 종잇조각을 줍는 데 성공했지만, 그와 동시에 도미노를 건드려 버렸다.
와르르-
-헐;;
-미친.
정유현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5초간 멈춰 있다가, 쓰러지는 도미노를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이미 쓰러진 도미노를 쓸어 모으고 있었다. 덕분에 도미노는 더 빠른 속도로 쓰러졌지만.
-유현이 얼었엌ㅋㅋㅋ큐ㅠㅠㅠ
-나 쟤가 저렇게 당황하는 거 처음 봄ㅋㅋㅋㅋㅋㅋㅋㅋ
┕유현이도 사람이었네. (당연함)
-아니 저와중에도 더러운거 못보는거 봨ㅋㅋㅋㅋㅋ
┕진짜 정유현답다곸ㅋㅋㅋㅋ
-종이새끼 왜 저기 있어서 우리 유현이 괴롭히냐ㅠㅠ
공들여 세운 도미노 반절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졌고, 겨우 다른 연습생이 막았다. 그런데 더 큰 사건은 다음이었다.
[충격이 커 보이는 차지운 연습생]
속절없이 쓰러진 도미노 반절에 충격이 컸는지, 지운이 형의 표정도 정유현과 다를 바 없었다. 흡사 데칼코마니 같았다. 그리고 지운이 형이 들고 있던 도미노가 클로즈업되었고, 슬로우 모션으로 떨어지는 장면이 이어졌다.
[이미 그의 손을 떠난 도미노]
“으악!!”
“안 돼!”
[결국 몽땅 깔끔히 쓰러진 205호 도미노]
-ㅁㅊ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운이 영혼 어디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둘 다 영혼 가출했엌ㅋㅋㅋㅋㅋㅋ
-이게 방송보다 재밌다고 생각하는 거 나뿐이냐
┕2222
┕333333
[비명이 난무하는 촬영 현장]
[오늘 안에 끝낼 수 있을지?]
“누가 보면 서바이벌인 줄 알겠어.”
사내자식 100명이 모여서 도미노 하나에 희비가 교차하는 것을 보자니 헛웃음만 나왔다. 후반에 가서는, 룰이고 뭐고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세우는 팀이 속출했다. 제작진들도 처음에는 칼같이 경고하더니, 촬영 시간이 길어지자 그조차도 포기한 듯했다. 진심으로 저때 촬영 안 끝날까 봐 두려웠다.
그 와중에 승부욕으로 똘똘 뭉친 박재봉네 팀이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나는 저 둘이 저렇게 말이 없는 모습은 처음 봤다. 촬영 당시에는 선우 형의 어택으로 얼이 빠져 있어서 잘 몰랐는데.
-나 강도현이 저렇게 조용한 거 처음 봐;;
┕도현이 입에 가시 돋친 거 아님?
-재봉이 얼굴에 장난기 싹 가신 거 봐
┕ㅈㄴ발린다 ㅁㅊ.
┕아가 집중해서 그런가봐ㅠㅠㅠㅠ커여워ㅠㅠ
-얘네 승부욕 장난아니네 진짜ㅋㅋㅋㅋㅋ
┕ㄹㅇ 이런거까지 실력발휘할 일이냐며
결국 우리 조와 지운이 형 조 모두 꼴등으로 마무리했다. 윤빈과 박재봉네 팀은 각각 1등을 차지해서 축제 분위기였다. 선우 형이 나름의 위로랍시고, 덤덤한 척 팀원들에게 말했다.
“아직 상품이 뭔지 안 나왔잖아? 또 과자 같은 거 주겠지, 뭐~”
하지만 상품이 공개되자 바로 울적해졌다. 매번 신기할 정도로 감정 표현에 솔직한 사람이네.
“각 조의 1등에게는, 놀이동산 자유 이용권이 주어집니다!”
“놀이동산?”
“대박!”
“나머지 팀들은 단 3가지 놀이 기구만 즐길 수 있습니다.”
“헐…….”
충격 받아서 도미노를 떨군 선우 형과, 또다시 쓰러지는 도미노를 보며 해탈한 내 얼굴이 클로즈업되면서 영상이 끝났다.
-박선우 미쳤냐곸ㅋㅋㅋㅋㅋㅋㅋ
-선우 놀이동산 좋아하나봐ㅠㅠㅠㅠ
“헤이, 톰!”
얼리어답터분 또 오셨네. 이제 저 목소리도 익숙해졌다. 오늘 마주친다면 분명 톰과 제리 얘기할 거라고 예상은 했다.
“나도 내가 이렇게 못 하는 줄 몰랐어.”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네요.”
“근데 승빈아, 진짜 어쩌면 좋냐…….”
“왜요?”
“나 진짜 고민돼서 머리 터질 거 같아. 한숨도 못 잤잖아.”
잔뜩 울상인 얼굴에 목소리도 한층 더 잠겨 있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건가? 박선우가? 처음 보는 모습이라 괜히 긴장됐다.
“무슨 고민 있어요?”
“응.”
“뭔데요?”
박선우가 과장되게 이마를 짚으며 답했고, 이어진 대답에 나는 뒷목을 잡았다.
“…우리 놀이 기구 뭐 타?”
“아, 형…….”
“아니 진짜 놀이 기구 천국에서 3개만 타라는 거 고문 아니야?”
아뇨.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존재가 더 고문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