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21화 (21/346)

21화

“죄송합니다!”

정유현은 별말 없이 박재봉을 지나쳐 갔다. 그게 더 사람 피 말리게 하는 것을 아는 게 분명했다.

“저 망한 거 같죠, 형…….”

“앞으로 최대한 피해야겠다.”

“근데 전 그럴수록 더 붙어 있게 되더라고요. 도현이 형도 그렇고.”

머리 위로 축 처진 귀가 보일 것처럼 점점 더 시무룩해지기에 얼른 화제를 바꿨다.

“근데 너희 팀 아이디어도 좋았어. 전우치는 누구 아이디어였어? 네가 제안한 거야?”

“아니요?”

“그럼 누구?”

“윤빈 형이요!”

“윤빈?”

그 캘리포니아 바이브 윤빈이? 외국물 먹은 캐릭터라고 생각했는데 청량에 한복을 전우치로 재해석했다니. 생각도 못 한 인물이었다.

“윤빈 형이 미국에 있었을 때, 전우치 영화에 빠졌대요. 마침 형이 프로듀싱도 할 줄 알아서 편곡도 순조로웠고요.”

역시 사람은 겉으로만 판단하면 안 되는 거였다. 그 덩치로 프로듀싱 장비들을 만지는 게 상상이 안 됐는데 직접 편곡까지 할 정도의 실력자라니.

오늘 촬영에서 모든 연습생은 다 같이 대기실에서 다른 팀의 무대를 모니터링했다. 그중에서 제일 눈에 띄던 게 당연히 박재봉네 무대였다. ‘운동복’을 뽑은 지운이 형 팀이 쉽게 이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복이라는 의상에서 도복을 꺼내 올 줄이야.

원래 과거에서도 1차 경연은 무난하게 통과했던 지운이 형인지라, 2차 경연부터 서사를 쌓을 준비를 했는데 예상 밖의 전개였다. 2차 경연 때는 지운이 형을 제대로 돋보이게 해야지.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와 별개로 영화 전우치의 유명 테마곡과 매시업을 한 도입부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 노래가 이렇게 어울릴 수 있다고? 연습생들 반응을 계속 촬영 중이라 끊임없이 무대에 대해 리액션을 하고는 있었지만, 처음으로 진심에서 우러난 반응이었다.

괜히 데뷔 멤버였던 게 아니었구나. 다음 경연 팀을 정할 때는, 관심 대상에 윤빈을 포함해야지. 벌써 다음 경연이 기대됐다.

* * *

우리 어제 경연한 거 아니었나? 경연이 끝난 지 12시간도 안 됐는데, 또 다른 무대를 위해 축구장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그야말로 미친 스케줄이었다. 경기장 홍보. 투마월 시즌 1에서도 화제가 됐던 홍보 수단이었다. 절대 좁지 않은 경기장이었지만, 연습생 100명이 가득 들어차니 인형 공장 같은 기이함이 있었다. 징그럽다는 반응도 많았지만, 조회 수는 거짓말하지 않았다. 부정적인 반응들도 결국 프로그램 화제성을 높이는 데 한몫한 셈이었다.

“이번에 찾아갈 경기장은- K리그 올스타전입니다!”

초록 잔디밭 위에 선 100명의 남자 연습생을 떠올리니 절로 소름이 돋았다, 그것도 세일러복을 입은. 사실 투마월 시즌 1, 2, 3 모두 단체 영상을 보긴 했다. 어차피 방송에는 안 나오는 장면이었지만, 투마월 영상 몇 개 보니까 위튜브 알고리즘이 알아서 보여 주더라고. 그때도 진짜 기묘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내가 당사자가 되다니. 피곤에 찌든 연습생들은 축구장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다들 졸고 있었다.

경기장에 도착해 보니, 관중석에 연습생 슬로건을 든 팬들이 보였다. 벌써 스케줄 뛰는 사람이 있구나, 문스트럭도 왔을까 내심 궁금했다.

“도현아!!”

“재봉아, 안녕!!”

“유현아, 여기!”

“승빈아!!!!”

이름이 불리는 쪽으로 슬쩍 볼을 잡는 포즈를 했다. 이런 거 망돌 땐 해 보지도 못하고, 배우로 조금 뜨고 나서 시상식 대기석이나, 수상 소감 마치고 내려올 때 몇 번 해 봤다. 끼도 봐 주는 사람이 있어야 부리는 거지.

자리는 센터 후보군 연습생부터 등급별로 서게 됐다. 그런데 자리 잡고 보니, 상당히 난감한 자리 배치였다.

“자리를 잡아도 이렇게-”

자리 선정을 누가 한 건지 모르겠지만, 나랑 안 맞는 사람이 분명했다. 센터는 박재봉, 양 날개로 강도현과 정유현, 그리고 그 뒤 세 명이 나, 윤빈, 그리고 정유현과 같은 조였던 서인혁이었다. 강도현, 정유현은 말할 것도 없고, 서인혁과는 말 한번 섞어 본 적 없었다. 게다가 정유현과 친해 보이기도 해서,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조합이었다.

“완전 가시방석이네.”

그나마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윤빈뿐이었다. 제대로 된 대화는 한 번도 해 본 적 없고, 오가며 인사한 게 전부였는데 큰일이었다. 아니지, 지난번 경연 보니 능력도 있는 놈이고, 결국 얘도 데뷔했잖아? 친하게 지내서 나쁠 거 없지.

“승빈? 문승빈 맞지?”

어떻게 말을 붙여야 하나 생각하던 참에 윤빈이 먼저 말을 걸었다. 친화력 좋아 보였는데, 다행히 예상 그대로였다. 박선우한테 한 번 크게 당해서인지는 몰라도, 이미 방송으로 알던 연습생도 직접 겪어 보기 전에는 안심할 수 없었다.

“아, 네. 맞습니다.”

“아, ‘요’ 붙였어야 했나?”

“네?”

아무리 캘리포니아 바이브라지만 ‘Yo!’를 붙인다니.

“몇 살이에요?”

아, ‘요’가 앞에 붙는 게 아니라 뒤에 붙는 거였구나. 내가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지, 많은지 몰라서? 하, 혼자 북치고 장구 치고 난리도 아니네. 정신 차리자, 승빈아.

“18살입니다. 제가 동생이니까 말 편하게 하세요, 형.”

“너도 편하게 불러!”

“그래도 형인데.”

“괜찮아! 재봉이도 가끔 반말해.”

“뭐야, 내 얘기해요?”

연습에 집중하느라 못 들을 줄 알았는데, 귀신같이 자기 얘기하는 걸 알아챈다.

“너 반말한다고.”

“아이, 내가 언제 반말을 했어! 요.”

“승빈아, 저런 것도 존댓말로 인정해 줘?”

“형, 지금까지 엎드려 절 받으셨는데요.”

“그게 뭐야?”

“승빈이 형! 이상한 거 알려 주지 마요!”

“너 이제 나한테도 반말하겠다?”

그래도 박재봉 덕분에 윤빈과 급속도로 친해졌다. 지난번 박선우도 그렇고, 박 씨들이 도움을 많이 주네. 이 둘을 ‘제비즈’라고 해야겠다.

“1차 경연 진짜 대박이었어요.”

“너희 팀도 엄청 강렬했어!”

“재봉이한테 들었는데, 전우치 편곡 아이디어 형이 낸 거라면서요?”

“그런 것도 얘기했어?”

“제가 물어봤었어요. 편곡이 너무 신선해서요.”

“너무 칭찬하는 거 아니야? 민망하네.”

연예계 4년 짬밥으로 처세술에는 도가 텄지만, 윤빈의 프로듀싱 실력은 굳이 과장할 필요가 없었다. 실제로 경연 날 적지 않은 충격을 준 무대이기도 했고.

“다음 경연 때 같은 팀 되면 재밌겠다!”

“대박, 저도 그 생각 하고 있었는데.”

서바이벌 들어오고 만난 연습생 중에서는 가장 성격이 잘 맞았다. 이후로도 서로 안무를 봐주거나, 연습생 얘기를 하면서 대화를 이어 갔다.

“리허설 시작합니다!”

총 2번 진행된 리허설은 시그널 송 촬영 날만큼이나 빡셌다. 원 테이크로 진행되는 영상이기에, 리허설 때 최대한 합을 맞춰야 했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연습생들 대기 공간으로 이동해 주세요.”

연습생들이 화면 밖에 있다가 동시에 달려와서 거대한 역삼각형 대형을 만드는 것을 시작으로 촬영이 이어졌다. [눈부셔] 반주와 함께 박재봉이 고개를 들고, 본격적으로 단체 안무가 시작됐다. 중간에 별 모양으로 대형이 변하기 때문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했다.

단체 홍보라는 특성상 원샷이 잡히는 촬영은 아니었지만, 나노 컷으로 잘라서 덕질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기에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때, 노랫소리를 뚫고 어떤 소리가 들렸다.

‘함성 소리인가?’

분명 뒤쪽에서 난 소리 같은데. 등 돌려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별일 아니겠지…….’

[눈부셔 New World

나를 향한 이 시선이 짜릿해

너만의 스타 그게 바로 나야]

“컷!”

엔딩 포즈와 함께 촬영이 끝났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표정이 일그러진 연습생들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 안무라도 틀렸나?

“이 상태로 내보낸다고? 진짜로?”

“먼저 넘어진 새끼 누구냐?”

대충 반응을 보니, 동선 이동 중에 충돌이 있었나 보다.

“다 망했어…….”

울먹이는 연습생도 있었다. 하긴, 무대 하나하나가 인지도 높이는 길인데 넘어졌으니 속상할 만도 했다.

그런데도 윤 피디는 앞서 언급한 대로 칼 같이 촬영을 끝냈다. 이 또한 하나의 어그로로 사용하겠지? 대충 그림이 예상됐다. 그런데 파급력이 큰 홍보 영상에서 이런 실수를 집어넣는다는 건 조금 이해가 안 갔다. 너무 위험한 방법 아닌가?

원래 시즌 2 축구장 홍보 영상은 제대로 된 안무 영상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해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이 변수가 어디까지 영향을 줄지 이때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 * *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다들 핸드폰부터 찾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얼른 SNS에 들어가 보니, 팬들이 촬영한 영상이 이미 여럿 올라와 있었다.

문스트럭 빈 @Moonstruck_bean 5분 전

20**03**

[조랭이 지나가요!]

업로드된 사진에 반응하는 계정들의 프로필 사진에는 모두 달, 콩 혹은 강아지 이모티콘이 있었다. 다들 나를 이렇게 보고 있구나. 배우 시절에도 신기했는데. 다시 아이돌 연습생이 되어 이런 반응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역시 문스트럭도 있었네.”

크러시온_윤 @CrushOn_Yoon 3분 전

20**03** 올스타전

[동생 앞에서 형아미 낭낭한 윤빈이]

타임라인을 넘어온 윤빈 홈 계정에는 대화하는 나와 윤빈의 사진과 영상이 올라왔다.

“관중석이랑 거리가 꽤 됐는데 엄청 가깝게 찍혔네.”

의외의 투샷에 다들 의아하다는 반응이었다.

-뭐야, 문승빈이랑 윤빈 친해?

-의외의 조합 아님?

┕얘네 경연도 같은 팀 아니었잖아.

-승빈 윤빈이야?ㅋㅋㅋㅋㅋㅋㅋㅋ

┕투빈이넼ㅋㅋㅋㅋㅋ

┕삔이는 어떰?

┕삔이ㅋㅋㅋ 귀엽넼ㅋㅋㅋㅋㅋㅋㅋ

-내 최애랑 차애 조합이라니... 삔즈붐은 온다.

물론 날 선 반응도 있었다.

-문승빈 대면식때는 박재봉한테 붙더니...떡상할 애들은 귀신같이 알아보네.

┕인기멤 자석인가 봄.

┕진짜 데뷔할 거 같은 애들하고 관계성이 몇 개야;;

-이전 시즌 공부 많이 하고왔나. 너무 영악해 보여서 별로야.

┕공부 ㅇㅈㄹㅠ 웅웅 울승빈이 시즌1 선행때리고 왓어여ㅠ

“뭐, 틀린 말은 아니네.”

어차피 나와 지운이 형이 데뷔조에 낀다면, 최소 두 명의 자리가 교체되는 거다. 누구랑 데뷔할지 모르니 일단 기존 데뷔 멤버들과 인연을 만들어 두는 게 안전빵이지. 아니, 그래도 억울하네. 박재봉이랑 박선우는 쟤네가 먼저 붙은 건데.

간단히 씻고, 선우 형과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아침부터 나가서 먹은 거라고는 식어 빠진 도시락이 전부였기에 뱃가죽이 등에 붙기 직전이었다.

“승빈이 형!”

박재봉의 목소리에 뒤돌아보니 윤빈이 같이 있었다. 둘이 같은 방도 아닌데 생각보다 더 많이 친해졌나 보네.

“저녁 먹으러 가요?”

“응.”

“같이 먹으러 가요!”

“나도 같이 가!”

“형은 원래도 같이 가는 거였잖아요.”

“그러고 보니 삔이들이네?”

아니, 이 형은 지난번 조랭이랑, 슬라임 때도 그렇고 왜 이렇게 소식이 빠른 거야?

“삔이 뭐예요? 머리삔? 나 삔 안했는데-”

윤빈의 순수한 물음이 이렇게 당황스러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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