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뭐야, 쟤네 둘 싸우냐?”
“승빈이 기 안 죽는 거 발리네.”
“벌써 치열한 대결이 예상되는데요, 그럼 ‘슈트의 정석’ 팀 무대 먼저 보겠습니다!”
“유현아, 잘하고 와!”
“병대야, 파이팅!!”
정유현이 속한 ‘슈트의 정석’ 팀 무대는 깔끔하고 완성도도 높았다. 무대를 감상하며 K는 정유현의 사진도 여러 장 찍어 뒀다. 이미 인기 있는 연습생이니 데이터라도 팔아서 돈이나 벌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완벽한 슈트 비주얼에 홀린 듯 셔터를 누른 것도 있었다. 대놓고 섹시 컨셉인 노래에 정돈된 슈트를 입고 나오니 오히려 절제된 섹시미가 돋보였다.
[네 심장을 향해 원샷
그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관객석을 향해 총을 겨누는 엔딩 포즈로 무대는 끝이 났다. 함성과 함께 주변의 정유현 프로 사랑꾼, 즉 ‘정프’들은 팀의 승리를 확신하는 분위기였다. K는 양가감정에 휩싸였다. 당연히 문승빈의 팀에 투표할 생각이었다. 문스트럭과 A양에게 지불하는 친구비였다. 그런데 정유현의 무대를 보니 솔직히 이것보다 좋은 무대를 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확 얘네 투표해 버려?’
“도현아, 다 찢어 버려!!!”
“승빈아, 잘하자!”
그래, 일단 다 보고 판단하자. 사람이 줏대가 있어야지. 그럼그럼. K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킬러’ 메인 멜로디의 피아노 버전이 흘러나오고 중앙으로 강도현이 걸어오면서 무대가 시작됐다. 그리고 의문의 레이저가 그의 가슴 부근을 저격하더니 총성 소리와 함께 강도현이 사라진다.
“뭐야 X발, 도현아!!”
팬들마다 성향이 다른데, 강도현의 팬들은 특히 과격했다.
…왜 A가 강도현의 팬인지 납득이 갔다.
* * *
엄청난 비명 소리를 뒤로 하고, 다시 조명이 들어오면서 모든 멤버가 한 번에 등장했다. 슈트 위에 걸쳐진 테크웨어, 그리고 얼굴을 반쯤 가린 고글과 허벅지에 묶인 벨트에는 권총까지 꽂혀 있었다.
“뭐야, 고글 무슨 일이야.”
“아까 고글이랑 권총은 없었는데……?”
“도현이 허벅지 돌았나.”
“허벅지 벨트 터지는 거 아니냐고.”
흥분한 관객들 사이에서 그녀는 내심 문승빈이 섹시 컨셉과 어울릴까 반신반의했다. 시그널 송으로 조랭이남으로 유명해지고, 대면 평가에서도 청량에 가까운 컨셉이었기 때문에 섹시 컨셉은 이질적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첫 소절이 들려오는 순간 K는 뒤통수가 얼얼해졌다.
[지금 당장 방아쇠를 당겨
네 심장을 향해]
아직 무대가 어둑했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문승빈이었다. 감미롭기만 한 줄 알았던 미성이 묘한 색기를 담고 있었다. 사실 이전까지만 해도 잘 부르긴 하는데 뭔가 전형적으로 배운 보컬 스타일이라고 생각했다. 문스트럭이 듣는다면 연을 끊자고 할지도 모르겠다만, K에게는 그렇게 큰 감흥이 없는 목소리였다. 근데 이렇게 노래를 ‘맛깔나게’ 부를 수 있을 줄이야.
“강도현 완전 어깨 깡패네.”
“문승빈이 저렇게 키가 컸었나?”
무엇보다도 이 팀은 테크웨어가 신의 한 수였다. 다들 완전한 슬렌더 체형이었지만, 테크웨어를 걸쳐서인지 상대적으로 상체가 크게 느껴졌다. 또한, 강도현을 포함한 몇몇 멤버들은 흰 셔츠 위에 바로 테크웨어 의상을 입었다. 무대 중간중간 거칠게 숨을 몰아쉴 때면, 땀에 젖은 셔츠에 그대로 실루엣이 드러난 거다. 게다가 허벅지에 두른 벨트가 정점을 찍었다. 허리춤이 아닌 허벅지에 위치한 권총이 격한 안무와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전 팀의 무대가 기억에서 희미해질 정도였다.
무대는 절정을 향해 달려갔고, 하이라이트 무반주 부분에서 현장의 팔로워들도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문승빈이 무대 가운데에 항복 선언을 하듯 두 손을 들고 서 있고, 다른 멤버들이 원을 그리며 그 주위를 돌고 있었다. 누군가 겨우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다가온 이 순간
네 숨도 끝도 오직 내 손끝에]
아무런 반주도 없이 고요해진 무대 위에서 오직 문승빈의 목소리만이 현장을 가득 채웠다. 원을 그리던 다른 연습생들이 그 자리에 멈췄고, 채도가 낮고 붉은 조명에 문승빈의 실루엣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리고 이어지는 3단 고음. 고음이 끝나는 순간, 멤버들의 발소리가 일정한 박자로 경연장에 울렸다. 그에 맞춰 다시 음악 소리가 나왔고, 점점 고조되는 음악에 맞춰 멤버들의 동작이 빨라졌다.
[난 한번 잡은 먹잇감은 안 놓쳐
붉게 빛나는 네 심장을 향해]
절정은 허벅지에 넣어 둔 권총을 꺼내는 안무였다. 웨이브를 타면서 허벅지부터 목울대까지 총으로 몸을 쓸어 올리는데, K는 하마터면 그 비싼 카메라를 놓칠 뻔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강도현은 강도현이구나. 모두 춤 실력이 출중했지만, 강도현은 한 끗이 달랐다. 모두 허리 쪽으로 웨이브를 탄다면 강도현은 골반을 사용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놀라운 건 의외로 문승빈이었다. 그나마 비슷하게 골반을 사용하는 유일한 멤버였다.
“미친 거 아니야?”
“이거 방송 가능해?”
“웨이브 무슨 일이야, 진짜 작정했구나, 얘네.”
[네 심장을 향해 원샷
그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순식간에 찾아온 엔딩. 가운데에 선 강도현을 다른 연습생들이 둘러쌌다. 그리고 총성 소리와 함께 강도현이 쓰러졌다. 다른 멤버들은 쓰고 있던 고글을 벗어 던지면서 유유히 걸어갔다.
마치 최종 미션을 성공한 것처럼.
“미친…….”
“뭐냐, 강도현이 스파이었나?”
“중간에는 문승빈 아니었음?”
“다른 애들이 배신 때린 거 아냐?”
“와 돌았네, 진짜.”
무대가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경연장은 조용했다. 땀범벅이 된 연습생들이 무대 중앙에 모여서 단체 인사를 하고 나서야 겨우 그 여운에서 벗어난 듯했다.
K는 홀린 듯 ‘샷건’을 투표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선택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정유현 팀의 무대는 기억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그나마 남은 건 정유현의 기깔 나는 슈트핏 하나뿐이었다.
“내가 지금 꿈을 꿨나?”
“야, 이거 레전드 하나 나왔다…….”
경연 녹화가 끝나고 인터넷에는 하나둘 후기 글이 올라왔고, ‘샷건’ 팀 무대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저마다 오늘 최고의 무대는 ‘샷건’의 ‘킬러’였다는 것에 이견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샷건만큼이나 전우치 팀에 대한 언급도 많았다.
[1차 방청 보고 옴]
뚝딱이들 존많인데 박ㅈH봉네, 강도네 무대가 다했음.
박ㅈH봉팀 한복 입었고 엄청 반전이야ㅇㅇ 그리고 윤콩이 미쳤음. 이번 무대로 떡상 예상한다. 약간 전우치? 생각나는 무대였음.
-노인증구씹
┕인증함ㅇㅇ[입장 팔찌 사진]
-ㅈH봉이 최애인데 진심 윤콩 밖에 안 보였어
-ㅁㅊ 사극풍이 벌써 나온다고?
-여기 무대는 왜이렇게 말이 다르냐, 그러니까 청량곡에 국악을 합쳤는데 의상은 또 한복이고, 댕기 흔들면서 무대하고 윤콩이가 호랑이 같은 무대라는 건데 이게 가능함?
[1차경연 후기]
샷건팀 미만잡ㅇㅇ
보는 내내 제정신 아니었음. 일단 스타일링은 슈트 위에 테크웨어 입었는데 이거 누구 아이디어인지는 모르겠는데 방송에 나오겠지?
아무튼 정유ㅎ네 팀보다 피지컬은 딸리는데 무대 퀄이 미쳤음. 앵콜 나온 무대는 얘네가 유일한 듯?
그리고 승넨이 섹시하더라.... 웨이브 하는 데 귀에서 피나는 줄 알았어. 현장 반응은 여기가 최고였음.
-승넨이 섹시 컨셉이야?
┕미쳤다.......
* * *
함성 소리를 뒤로하고 대기실로 돌아오는데 여전히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경험해 본 적 없는 짜릿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상태창 속 끼 포인트도 한 단계 올라 있었다.
[이름: 문승빈]
외모: B
끼: C
보컬: B+
댄스: B-
프로듀싱: D
“우리 무대, 관객들 반응 최고였어!”
“뭐 하고 내려온 건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
대면식에서도 다른 연습생들 앞에서 무대를 했지만, 실제 관객이 눈앞에 있는 건 차원이 달랐다. 한 소절, 한 동작마다 실시간으로 관객들의 반응을 마주하니 소름이 돋았다. 형석이 말처럼 정말 무대에서 뭘 했는지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냥 몸이 흘러가는 대로 하다 보니 어느새 강도현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형, 테크웨어가 진짜 좋은 아이디어였어요!”
“맞아, 우리 팀이지만 너무 멋있더라.”
평가며 승패며 모든 걸 제쳐 두고 일단 행복했다. 이걸 위해 내가 아이돌이라는 직업을 선택했던 거였는데, 돌고 돌아서 이제야 이 기분을 느끼게 된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직접 컨셉을 짜고 연습하며 수백 번 상상했다. 이게 무대에서 구현된다면 과연 어떤 모습일까? 연습실에서 거울을 보고 춤출 때마다, 무대 위에서의 내 모습을 그렸다. 하지만 전부 쓸모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마주한 무대는 상상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짜릿했다. 아직도 귀에 이명처럼 함성 소리가 웅웅거렸다.
살아남고 싶다. 끝까지 이 무대를 하고 싶다. 형을 살리기 위해서, 꿈을 이루기 위해서, 나를 무시했던 이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습관처럼 되뇌었던 수많은 이유를 뛰어넘는 진짜 욕심이 생겼다.
나는 절대 이 짜릿함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투표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복도 끝에 위치한 모니터링 룸에 들어서자, 선공을 했던 ‘슈트의 정석’ 팀이 먼저 자리하고 있었다. 묘한 긴장감이 가득했다. 솔직히 질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다. 상대 팀에는 미안하지만, 이번 경연은 우리의 승리다. 테크웨어를 생각해 낸 건 최고의 선택이었다. 잘난 척 맞다, 근데 사실인 걸 어떡해? 전체 경연을 다 비교해 봐도 우리 팀의 현장 반응이 가장 뜨거웠다. 그나마 전우치 팀이 우리와 견줄 만한 정도였을까.
모든 멤버가 방에 들어오자 문이 닫혔다. 각 멤버의 반응을 모두 따려고 하는 건지, 크지 않은 방안이 온통 카메라로 가득했다. 그래서 잔뜩 긴장한 척 양손을 기도하듯 모았다. 옆에서는 거의 반쯤 부둥켜안고 난리도 아니었다. 나처럼 연기하는 건가 잠깐 의심하기도 했지만, 귀가 시뻘게진 걸 봐서 그건 아닌 거 같았다. 정말 다들 긴장 중이었던 거다.
[슈트의 정석 VS 샷건]
“으아 결과 나온다!”
“제발, 제발 이겨라…….”
3.
2.
1.
[105표 / 378표]
[샷건 팀 승리]
“어… 어?”
“우리가 이긴 거야?”
“와!!!!”
승리는 예상했지만 이렇게 큰 표 차이로 이길 줄은 몰랐다. 우리 팀은 서로 얼싸안고 승리를 자축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조금 민망할 정도였다. 겨우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리로 돌아오니 상대 팀은 역시나 초상집 분위기였다. 수고했다고 인사를 건네는 우리 팀 연습생들을 지나쳐 다들 빠르게 촬영장을 벗어났다. 특히 정유현의 표정을 보니 꽤나 충격이 커 보였다.
결과 확인 후, 단체 대기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박재봉을 만났다. 저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며 뛰어오는데 순간 모른 척할 뻔했다. 기력 다 빨린 나와는 달리, 힘차게 펄럭이는 도복이 제법 방정맞아 보였다.
“승빈이 형!!”
저렇게 천진난만해 보이는데 어떻게 무대 위에서나, 미션 때마다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거지? 여전히 미스터리였다.
“형, 이겼어요? 이겼죠? 그쵸?”
“응.”
“그럴 줄 알았어요! 유현이 형 팀도 엄청 잘했는데, 형네 팀이 너무 잘해서 당연히 이길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가 더 신나서 방방 뛰는데, 하필 그 타이밍에 정유현이 화장실에서 걸어 나왔다. 지난번 강도현 때도 그렇고 박재봉과 있으면 등잔 밑이 참 어두웠다.
“솔직히 슈트는 너무 잘 어울렸는데 너무 단조롭, 왜 그래요, 형?”
뒤를 봐 보라고 고갯짓하니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박재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