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현장 열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데요! 먼저 농구복 입은 선공 팀 소개부터 들어볼까요?”
“안녕하십니까! 저희는 여러분의 심장을 바운스~하게 만들 ‘바운스’ 팀입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을 새로운 세계로 이끌 ‘전우치’ 팀입니다!”
“재봉아!!”
“윤빈아!!”
역시 시그널 송 센터인 박재봉의 반응이 가장 컸다. 그리고 윤빈이라는 연습생의 이름도 간간이 들렸다. 저 덩치 큰 애가 윤빈인가, 인기멤인 거 같으니 쟤도 몰래 몇 컷 찍어 둬야겠다.
“각오 한마디 들어 볼까요?”
“팔로워님들! 기다리느라 많이 지치셨죠?”
“저희의 청! 량! 가득한 무대로!”
“시원하게 해 드릴게요!”
“귀여워!!!!”
“그럼 ‘바운스’ 팀 무대 시작하겠습니다!”
[네가 있는 곳이 어디든
혹시 네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말해도]
K는 차지운 팀의 무대를 보면서 속으로 됐다를 몇 번이고 외쳤다. 팀원들 밸런스도 좋고 옷도 노래랑 잘 어울리고. 특히 차지운이 킬링 파트를 맡았다. 그 말인즉슨, 방송에서도 킬링 파트 서사가 붙을 거고, 분량이 늘어나는 만큼 차지운도 떡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네게 달!려갈게
그 무엇이 그 누가
내 앞을 막는다 해도
오직 너만 보는 나니까]
“차지운 잘 어울리는데?”
“그니까, 쎄게 생겨서 청량 안 어울릴 줄.”
“오늘부터 차애 삼을까?”
K는 금방이라도 저 무리에게 가서 종이비행기 매매를 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이 경연을 계기로 최소 50은 넘겨 보자고.
[너에게 달려갈게!]
엔딩 포즈와 함께 무대가 끝났다.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대부분 노래와 의상이 찰떡이었다는 반응이었다. 굳이 두 무대를 다 보고 투표를 해야 하는 건가- K는 금세 지루함을 느꼈다.
“다음으로 ‘전우치’ 팀의 무대 시작하겠습니다!”
“전우치라니, 벌써 무대 다 봤다.”
“한복 예쁘긴 한데 왜 하필 이 노래에 입은 거냐.”
이곳저곳에서 하품하며 피로감을 분출했다. 그나마 박재봉과 윤빈의 팬들이 슬로건을 흔들거나, 이름을 외치고 응원을 했다. 무대 조명이 다 꺼지고, 어둠 속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쿵.
쿵.
쿵.
“뭐야?”
“무슨 소리지?”
“북이야?”
뒤이어 푸른빛 조명이 들어오고, 누군가 텀블링을 하며 등장했다. 도포 자락이 휘날렸다. 그리고 서서히 걸어오는 남자, 윤빈이었다. 오랫동안 수영이라도 한 건지 떡 벌어진 어깨에 도무지 허리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모르겠는 다리길이였다. 마치 호랑이가 한 마리 걸어 오는 듯한 기세에 주변에서도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뿐이었다. 그리고 도포 자락을 던져 버리는데 근육이 다부지게 잡힌 어깨가 보였다. K는 자신도 모르게 비속어를 내뱉었다.
“X나 섹시해 미친…….”
엄청난 임팩트를 남기고 등장한 윤빈의 뒤로 다른 멤버들이 걸어 나왔다. 도복처럼 펄럭거리는 도포 자락과 머리 위에 쓴 갓까지, 팀 이름 그대로 영화 ‘전우치’를 떠올리게 하는 착장이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모두 눈 아래를 비단 같은 천으로 가린 상태였다.
[지금 그대에게 달려갈게]
[어디서부터 시작된 감정인지 모르겠지만]
원곡에서 EDM 베이스로 둥둥거리던 배경음이 거문고 소리로 바뀌었다. 소리는 간소해졌지만, 여백의 미가 돋보이는 편곡이었다. 거기다 조금 허전하다 싶을 때면 해금 소리가 들렸고, 대금 소리가 베이스 기타 역할을 했다. 분명 이질적인 악기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묘한 매력이 있었다. 거기다가 편곡에 단조 코드를 넣었는지 이전에는 청량 백 퍼센트의 곡이었다면, 지금은 약간의 아련함이 더해졌다.
“이거 대체 누가 편곡한 거지?”
“앞 팀이랑 같은 노래 맞아?”
기존보다 느린 템포였지만 지루할 틈이 없었다. 오히려 사운드가 더 풍부하게 들리는 착각까지 들 지경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오디션에서 소위 ‘국뽕’을 노리기 위해 ‘국악’을 가지고 나왔지만, 대부분 수박 겉핥기식이었다. 이건 전통 악기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한 활용이었다.
무엇보다도 박재봉 팀의 무대에는 스토리가 있었다. 달빛 아래에서 마주친, 첫눈에 반한 여인을 잊지 못하고 그녀를 향해 달려간다는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개사도 한 듯했다. 원곡은 하이틴 로맨스가 주제였기에 주어가 대부분 ‘너’였다. 이중 일부를 ‘그대’로 바꾸거나, 현대식 표현을 사극 표현으로 바꾸는 등 디테일을 살렸다.
[그대가 있는 곳이 어디든
설령 그대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하여도]
안무도 적절하게 변형했다. 도입부에 울렸던 북소리는 통금 시간을 알리는 소리였고, 그래서 멤버들은 마치 포졸들을 피해 그녀에게 가는 것처럼 날렵하게 움직였다. 차지운네 ‘바운스’ 팀은 원곡의 안무를 대부분 살려서 활기참을 표현했다면, 이 팀은 원곡의 박력에 국악의 유려함을 더했다.
“뭐야, 디테일 오져.”
“지금 저거 담 넘는 건가?”
두 명씩 짝을 짓고 천을 이용해 마치 담벼락처럼 표현했고, 그걸 뛰어넘으면서 박재봉의 파트가 이어졌다.
[지금 네게 달!려갈게
그 무엇이 그 누가
내 앞을 막는다 해도
오직 너만 보는 나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원곡의 가사와 너무 잘 어울리는 안무였다.
“안무 개빡세네.”
“박재봉 거의 지 키만 한 걸 뛰어넘네.”
“헐, 이거 지금 라이브하는 거 맞음?”
특이하게도 이 팀은 센터가 두 명이었다. 1절 센터는 윤빈으로 시작해서 호랑이와 같은 용맹함을 보여 주고, 2절부터는 박재봉이 센터에 오면서 부드러움을 강조했다. 1절에서는 그녀를 향해 달려가고, 2절에서는 마침내 만난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차이를 보여 주려고 하는 구성 같았다.
의외인 것은 중간 댄스 브레이크를 다른 연습생이 맡았다는 것이다. 애써 피해 다니던 포졸들에게 위치를 들키면서, 마치 결투를 하는 듯한 형태의 안무였다. 승리를 거둔 연습생이 1절 내내 얼굴을 가리던 천을 벗어 던지면서 2절이 시작됐다. 마침내 드러난 얼굴이 익숙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직 인기 있는 연습생은 아닌 듯했다. 그런데 춤선이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윤빈과 박재봉의 장점을 하나씩 가져온 느낌? 덕분에 1절과 2절의 센터 변화가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쟤 누구지? 춤 잘 추는데?”
“성민호라는 연습생인데요, 와우 엔터 연습생이고 올해 19살이고 예전에 프리즈 크루 소속 댄서였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K는 순간 자기가 그렇게 크게 말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이 난리통에서도 자신의 최애를 피알하기 위한 덕후의 처절함에 K는 그의 이름을 외우기로 했다. 성민호? 쟤도 일단 찍어 놔야겠다.
[그대에게 달려갈게]
어느덧 노래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가장 키가 큰 윤빈과 성민호 둘이서 담벼락으로 활용했던 천을 다시 들어 올렸고, 다른 연습생들이 그 천 뒤로 뛰어 들어갔다. 둘이 들고 있던 천을 내던지자 언제 환복을 한 건지 말쑥한 두루마기를 걸친 연습생들이 빨간 댕기를 어루만지는 장면으로 무대가 끝났다. 정인을 생각하는 행복한 표정 연기가 화룡점정을 찍은 완벽한 엔딩이었다.
“민호야!!”
“얘네 팀도 좋은데?”
“편곡 미쳤다.”
“그냥 이렇게 나온 노래 같은데?”
K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무대 자체로 본다면 당연히 ‘전우치’ 팀에 투표해야 했지만, 종이비행기 시세를 생각하면… 그래도 차지운네 팀을 뽑아야겠다고 마음이 기울었다. 일단 이겨야 베네핏 얻고 다음 순발식에 안정적으로 올라가니까.
“누구 투표하실 거예요?”
“네?”
아까 열정적으로 성민호를 소개하던 팬이었다. K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군중에 휩쓸리는 척 자리를 이동했다.
“밀지… 마세요. 하하, 자꾸 미시네…….”
그리고 재빨리 차지운 팀에 투표했다. 투표 버튼을 누르고, 누른 후에도 자꾸만 주변 눈치를 보는 K였다. 분위기가 꽤나 살벌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겨우 첫 화 방영했는데, 다들 열정적으로 자기가 지지하는 연습생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언제 그렇게들 사랑에 빠지신 걸까.
* * *
그 시각, ‘킬러’ 경연 팀은 무대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문승빈은 앞 순서인 두 팀을 모니터링하면서 양가 감정에 휩싸였다. ‘전우치’를 접목해서 ‘청량+한복’이라는 극악의 조합을 살려 냈다는 것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너무 신선한 무대였기 때문에 ‘킬러’ 무대가 상대적으로 가려질 것을 우려하기도 했다. 후공인지라 바로 다음 무대가 아닌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슈트의 정석’ 팀, ‘샷건’ 팀 스탠바이 할게요!”
“네!”
“네!”
각자 안무를 맞추거나, 가사를 외우던 연습생들이 한곳에 모였다. 입장을 기다리면서, 문승빈은 앞에 서 있는 김형석의 어깨를 두드렸다.
“긴장하지 말고.”
“…네!”
“연습한 대로 하면 아무 문제없으니까.”
“넵!”
“어이어이, 샷건들. 섹시가 뭔지 보여 주자!”
그새 껴들어서 어깨동무하는 강도현이었다. 이놈의 능글맞음이 그래도 꽤나 효과가 있었는지 김형석을 비롯한 다른 연습생들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번졌다.
* * *
“다음은 알파의 ‘킬러’로 무대를 준비한 연습생들입니다!”
윤승철의 멘트와 함께 문승빈을 필두로 연습생들이 무대에 올랐다.
“도현아!!!!”
“승빈아아아아!!”
“유현아!!!!”
수많은 팔로워의 고함 속에서 K는 문승빈의 이름을 들었고, 다시 카메라를 꺼냈다. 문스트럭이 직접 제작한 슬로건으로 카메라 바디와 렌즈통을 감싸고 완벽하게 위장했다. 이미 검은색으로 꽁꽁 마스킹해서 싸매고 온 대포 카메라긴 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거 없지. 다행히도 앞뒤 사람들도 이번 팀에 자기 픽이 있는지 죄다 슬로건을 들고 있었다. 제대로 안 찍어 오면 뒷일은 알아서 하라는 문스트럭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녀는 온 신경을 집중했다.
‘차라리 다행이네. 문승빈이랑 강도현이랑 동시에 찍으면 되니까.’
양 팀의 모든 연습생이 무대에 자리하자, 윤승철이 멘트를 이어 갔다.
“이 노래의 지정 의상은 두 팀 다 ‘슈트’였는데요, 사뭇 달라 보이네요?”
“각자 팀 소개 부탁드릴게요. 선공하시는 팀 먼저-”
선공을 맡은 정유현네 팀은 원곡 무대를 떠올리게 하는 정석 슈트를 입고 나왔다.
“넵, 인사드리겠습니다. 둘 셋! 안녕하세요! 팔로워분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슈트의 정석’입니다!”
다들 키가 180이 넘고, 기럭지가 길어서 그런가 역시 슈트가 찰떡이었다. 주변에서는 벌써 연습생들의 슈트핏에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X발 유현이 지금 슈트 입은 거?”
“개 잘 어울려!”
“쉼표 머리 최고다…….”
“근데 옆에 쟤네는 뭘 입은 거야?”
문승빈 팀의 의상을 보던 K는 고개를 갸웃했다. 테크웨어인가? 저걸 슈트 위에 입었다고? 노래랑 어울릴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흥미를 끈 건 분명했다. 테크웨어는 못 참지.
“슈트의 정석이라, 정말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요.”
“그럼 후공 팀은 누가 소개해 볼까요?”
“제가 해 보겠습니다.”
강도현이 패기롭게 마이크를 잡았다.
“팔로워는 우리가 지킨다. ‘샷-건’ 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강도현의 말에 맞춰 모든 멤버가 다 같이 준비한 동작을 했다. ‘샷’에는 강렬한 표정을 지으면서 총을 쏘는 듯 손을 뻗었고, ‘건’에는 표정을 바꿔서 귀엽게 윙크를 하면서 관객들을 향해 쐈다.
“미쳤나 봐.”
“강도현 윙크 돌았냐.”
“승빈이 윙크 못 하는 거 봐ㅋㅋㅋ 양쪽 다 감기네.”
미친, 멘트는 영상으로 따려고 동영상 버튼을 눌러놨는데 대박인 걸 건졌다. 마침 강도현 바로 옆이 문승빈이라서 살짝 아슬하지만 그래도 둘 다 화면에 잡혔다. 이걸 보고 난리 날 문스트럭과 A의 반응이 예상됐다. 오마카세 디너 정도는 얻어먹을 수 있겠구먼.
현장 반응 역시 다들 뒤집어졌다. 귀여워 보이면 답도 없는 거라잖아. 반전 매력을 노린 거 같은데, 제대로 먹혔다. 하다못해 저기 윤승철 씨도 웃음을 참고 있었으니까.
“어유, 정말 귀여운 인사였네요. 그럼 서로 각오 한마디 들어 볼까요?”
이번에는 김병대가 먼저 마이크를 들었다.
“심플 이즈 더 베스트라고 하죠. 정석이란 것이 무엇인지 보여 드리겠습니다.”
“정석에서 한 걸음 나아갈 때 변화가 시작되는 거겠죠?”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문승빈의 대답에 장내가 술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