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충격적인 차지운의 무대를 마지막으로, 각자의 최애 무대가 모두 끝난 세 명에게 남은 분량은 강 건너 불구경이었다. 그래도 시선을 끄는 연습생은 몇 있었다.
“스무 살 박선우입니다!”
바닥에 누워 있던 K와 문스트럭을 기립하게 만든 발언이었다.
“박선우 성인임?”
“미자 아니라고?”
“미친 거 아니야?”
박선우의 나이가 1차 서프라이즈였다면, 다음은 윤빈이었다.
“올해 열아홉 살, 1년 4개월 차 연습생 윤빈입니다!”
-당연히 오빠인 줄 알았는데...
-윤빈오빠단 해산.
┕나는 윤빈 오빠라고 할 수 있는데ㅎ
-ㅁㅊ.....
-그니까 박선우가 윤빈보다 형이라는거잖아.
-윤빈이 박선우한테 형이라고 한다고?
┕아 ㅈㄴ 상상하고 소름 돋았어;;;
박선우와 윤빈의 사진을 붙여 두고.
[윤빈아.
네. 선우 형]
만든 게시물은 벌써 밈이 되어 여기저기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1화 마지막은 정유현 무대를 보여 줄 듯 안 보여 주는 어그로와 함께 끝이 났다.
“헐, 야 첫 번째 순위 나온다.”
첫 순위는 거의 시그널 송과 PR 영상만으로 만들어진 등수이기에, 문스트럭은 내심 기대를 했다. 비록 PR 영상은 공개된 지 이틀밖에 안 됐지만 말이다.
“100명 다 나오려니 길다 길어.”
“도현이는 한참 있다가 나오겠네.”
[9위. 문승빈]
“9위? 생각보다 낮네.”
“9위면 잘 나온 거 아님? PR 공개된 지 얼마 안 됐잖아.”
“그건 그런데, 9위면 겨우 데뷔권이니까-”
“아직 데뷔조 숫자 안 나오지 않았냐?”
“응, 근데 시즌 1이 9명이었는데, 똑같이 가지 않을까?”
“하긴, 그렇네.”
“헐, 차지운 12위야.”
“오, 대박. 야, 너 부자 될 수도 있겠다.”
K는 종이비행기를 부여잡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세상에서 가장 비싼 종이비행기가 되어라.
쭉쭉 순위가 발표되고, 이제 남은 건 1위와 2위. 첫 1위가 정유현이냐, 강도현이냐가 첫 번째 순위의 가장 큰 이슈였다.
“미친, 역시 우리 도현이가 1위네!”
“역시 VM이라 다르긴 하다.”
“김병대도 4위네.”
“쟤네 둘이랑 정유현은 그냥 시작부터 데뷔조 빼박일 듯.”
“님, 거기에 우리 승빈이도 들어갈 거거든요.”
“네네, 문스트럭 님. 열일하세요. 이번에는 꼭 데뷔시키시길 바랍니다.”
그 이후로도 한참 투마월 얘기가 이어졌다.
* * *
“승빈이 형, 거기서 좀 더 왼쪽으로 서셔야 해요.”
“아, 미안.”
김형석과 파트를 바꾸고 안무와 동선을 재정리했다. 노래 걱정이 사라졌다 했더니 안무가 또 문제였다. 이미 다 외웠던 안무를 두고, 새롭게 습득해야 했다. 강도현의 질문이 맞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메인 보컬이 바뀐다는 건 단순히 노래만 잘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안무 신경 쓰느라 노래를 실수하면 메인 보컬 자리도 말짱 도루묵 되는 것이다.
‘안무를 내가 어느 정도까지 익혀야 하지?’
그 순간 다시 ‘킬러’의 상태창 팝업이 떴다.
[제목: 킬러]
-노래: ■■■■■
-안무: ■□□□□
‘노래’만 있던 기존 상태창 아래에 ‘안무’ 영역이 추가됐다. 대체 이 상태창은 어떻게 구성이 나타나는 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은 연습이 먼저였다. 노래는 그나마 2칸으로 시작했는데 안무는 1칸이라니- 박하다. 메인 보컬을 다시 가져오기 위해 노래 연습에 매진했더니, 안무 습득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탓이었다.
스텟창도 나타났겠다, 노래와 비슷하게 연습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원곡 무대를 보고 춤 동작을 정리하고, 어울리는 제스처를 생각했다. 그렇게 하루를 꼬박 연습했을까. 참지 못하고 아무도 없는 화장실 구석 칸에 들어가 외쳤다.
“아, 왜 더 안 오르냐고!”
스텟창 속 안무는 겨우 한 칸 올라 두 칸에 머물러 있었다. 뭐가 문제인데? 기존의 연습 방법도 바꿔 보고 원곡 분석도 했는데! 연습실에 돌아와서도 스텟창 생각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포인트가 올라갈 만한 방법을 빨리 찾아야 할 텐데.
“승빈아.”
구석에 주저앉아 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강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또 무슨 시비를 걸려고 그러지.
“안무 연습 도와줄까?”
“…….”
“그렇게 하다가는 우리 무대 망쳐. 또 긴장할 건 아니잖아.”
뼈가 있는 말이었지만 애써 웃어 넘겼다. 괜찮다고 말하려던 그 순간, 얘랑 마지막 월말 평가를 연습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강도현 말대로 팔 동작을 더 크게 하자 춤 포인트가 올랐던 순간 말이다. 자존심이 조금 상하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강도현이 손을 내밀고 어떻게 할 거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순순히 그 손을 잡고 일어나기는 민망했다.
“좋아.”
빈손이 민망할 법도 한데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웃는 게 더 재수 없었다.
“어디가 제일 안 돼?”
“음-”
솔직히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지 모르겠다. 전체적으로 대공사가 필요했다.
“한번 춰 볼래?”
쭈뼛쭈뼛 거울 앞에 서서 춤을 췄다. 안무를 마치자, 강도현이 제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긴 듯 미간을 구기고 있었다. 뭐가 틀렸나?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나? 빨리 말해라, 사람 피 말리게 두지 말고.
“전체적으로 네가 아직 몸 근육 쓰는 거에 미숙해.”
근육 쓰는 걸 생각하면서 춤을 춰? 다른 의미로 충격이었다. 동작 따라가기에도 바빴기 때문에 그런 건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예를 들어서 아까 아이솔레이션 부분 있잖아. 다시 해 볼래?”
“응.”
목 아이솔레이션 동작을 하자 강도현이 바로 어깨를 잡는다.
“목 아이솔레이션인데 어깨 근육으로 추고 있잖아. 어깨는 최대한 움직이지 말고 목으로만 움직여 봐.”
다행히 지금 나는 아직 몸 근육이 말랑한 18세였고, 강도현이 코치하는 대로 목 근육이 움직였다. 그러자 별짓을 해도 요지부동이던 스텟창 바가 기다렸다는 듯이 채워졌다.
[제목: 킬러]
-노래: ■■■■■
-안무: ■■■□□
상태창 발견 이후 강도현이 가장 쓸모 있는 날이었다.
“오…….”
“아까보다 더 깔끔해 보이지? 알파 선배님들 무대 봐도 아이솔레이션 부분이 엄청 깔끔해.”
“그럼 이 부분은?”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허벅지에서 목까지 오는 웨이브 동작을 물었다.
“이 부분도 너는 지금 상체만 쓰면서 움직이고 있잖아. 여기 움직임 보여? 골반에서부터 시작해서 위로 올라오는 거 보이지?”
“응.”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역시 욕심이었다. 이전과 다르게 근육 움직임을 생각하다 보니 엉거주춤한 자세가 나왔다.
“어… 이건 연습을 좀 더 해야겠다……!”
그렇게 해맑게 얘기하지 말라고… 만약 형과 데뷔해야 한다는 목표가 없었다면, 그냥 VM에서 강도현과 데뷔해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물론 이뤄질 수 없는 혼자만의 바람이었지만. 아니, 근데 얘네는 그냥 VM에서 데뷔하면 되는 거 아니었냐고. 끝까지 도움이 안 되는 전 소속사였다.
며칠 뒤 최종 리허설 날이 되고, 다행히도 안무 포인트가 꽤 채워진 상태였다.
[제목: 킬러]
-노래: ■■■■■
-안무: ■■■■□
트레이너들의 심사평도 중간 평가와는 달랐다.
“승빈이 섹시한데?”
“형석아, 너 지금 그 포지션 너무 잘 어울린다.”
“그러니까요. 둘이 진짜 잘 바꿨어.”
처음 듣는 칭찬에 김형석도 상기된 얼굴이었다. 과정은 험난했지만, 모두가 윈윈하는 결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내 몫까지 잘 보고와라… 승빈이 사진 잘 부탁하고]
[도현이 사진 잘 찍어와라, 캠 딸 수 있으면 더 좋고ㅇㅇ]
캠 같은 소리 하네. 투마월 시즌 2의 1차 경연 입장 대기 줄에서 K는 친구들의 문자를 확인했다. 사실 그녀는 방청하러 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가 대면식에서 받은 종이비행기의 주인공 차지운은 센터 후보에도 없었고, 아직 최애를 정하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스트럭과 강도현 최애인 A가 혹시 모르니 방청에 신청하고, 당첨된 사람이 대리 찍사나 해 달라기에 다 같이 신청한 게 바로 지난주 주말의 일이었다.
‘To My World’ 시즌 2는 벌써 인기가 대단했다. 전작의 엄청난 흥행 때문이기도 했지만, 공개 대면식에서 발생한 여러 사건이 이슈가 된 것이다. 그래서 아직 첫 화만 방영되었음에도, 방청 신청이 치열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덕후는 계를 못 탄다고 하던가, 정작 둘은 똑 떨어지고 K만 붙을 줄이야.
“‘To My World’ 시즌 2, 그 놀라운 첫 경연에 와 주신 여러분. 모두 환영합니다.”
“저는 MC 윤승철입니다.”
촬영이 시작되고 한동안은 나름 재밌었다. 구오빠를 탈덕한 후로 꽤나 오랜만에 오프라인으로 무대를 보는지라 생생한 현장의 분위기가 반갑기도 했다.
“1차 경연은 두 팀이 같은 노래를 가지고 대결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두 팀의 무대가 모두 끝난 후, 5분의 시간 내에 투표를 완료하셔야 합니다. 물론 두 팀 다 맘에 들지 않았다면 과감하게 투표를 포기하셔도 좋습니다. 다만 두 팀 다 누를 경우에는 모든 표가 무효가 되니, 이 점만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각 대결의 승자 팀에게는 베네핏이 주어지고, 가장 많은 득표를 얻은 팀에게는 특별한 선물이 기다리고 있는데요. 그 선물은 바로-”
“방송에서 공개됩니다!”
게다가 윤승철은 처음 MC를 보는 것치고는 꽤나 맛깔나게 진행을 했다. 잘생긴 얼굴은 뭐 말할 것도 없고.
“언제 끝나…….”
하지만 그런 그녀는 지금 짜증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500명이 넘는 사람들 틈에 서 있는데, 경연이 하나 끝날 때마다 세트 치우고 다시 세우고 하는 데만 수십 분이었다. 점심부터 입장했는데, 밤이 다 된 시간까지 서 있으니 누가 제정신이겠냐고. 그런데 앞선 무대들이 전부 눈에 차지도 않는 수준이었다. 1n년간 수많은 아이돌의 무대를 관람했던 그녀에게 연습생들의 무대가 감흥을 주기란 쉽지 않았다. 문승빈이나 강도현이 앞 순서였다면 사진 열심히 갈기고 중도 퇴장했을 텐데, 씨넷이 그럴 리가 없지. 뭔가 강도현이 마지막 순서일 거 같아서 더 열받는 K였다.
“이번 경연은 ‘바운스’ 팀과 ‘전우치’ 팀의 대결입니다!”
“이번에는 또 누구냐…….”
연습생들이 걸어 나오고 주변이 전과 다른 환호성으로 가득했다.
“뭐야?”
“재봉아!!!!”
“차지운!!”
“차지운?”
시종일관 동태 눈깔 장착하고 있던 그녀의 눈에 오랜만에 총기가 돌았다. 윤승철이 등장한 이후로 처음이었다. 드디어 볼 만한 애가 나왔구나!
“두 팀이 경연을 펼칠 곡은 바로 ‘달려갈게’입니다.”
“미친 ‘달려갈게’에 농구복?”
“개 잘 어울려!!”
‘달려갈게’는 K의 구구오빠인 ‘에잇비트’의 대표곡이었다. 사랑하는 그녀가 있는 곳이라면 지금 당장 어디든 달려갈 수 있다는 패기가 담긴 가사와 빠른 비트로 이루어진 멜로디. 그해 여름은 저 노래 덕분에 유독 시원하게 느껴졌을 정도로, 극강의 청량을 자랑하는 노래였다.
옛 추억에 잠깐 아련해질 뻔했지만, 음주 운전으로 팀을 탈퇴한 구구최애를 생각하며 정신 차렸다. X새끼. 아무튼 노래는 죄가 없었고, 청량곡에 농구복이라니 최고의 선택이었다. 거기에다 오늘 비주얼도 최고네. 그녀의 머릿속이 상한가를 치고 지붕 뚫고 있는 종이비행기 시세로 가득했다. 됐다, 됐어!
“근데 저긴 농구복인데 상대 팀은 한복이야?”
“청량에 한복?”
“아, 재봉이 귀엽긴 한데 이 노래에 한복 어떻게 해?”
“왜 옷을 저런 걸 골랐지?”
“무리수 아니냐;;”
K는 속으로 꽹과리를 치고 있었다. 이건 누가 봐도 차지운 팀의 승리였다. 웬만한 컨셉충이 아니라면 청량에 저런 도사st 한복?
어림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