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새로운 세계로 함께- 하시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To My World 시즌 2’ 첫 방송이 드디어 시작됐다. 문스트럭은 2명의 덕친들과 함께 치킨을 시키고, 자리에 경건히 앉아 방송을 시청했다. 두 명은 최애가 달랐고 한 명은 아직도 원픽을 정하지 못했다. 절대로 서로의 최애에 대해 비교성 발언이나, 비난하지 말자고 약속을 했지만 지켜질진 미지수였다.
문스트럭은 문승빈을 찾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어차피 포맷은 시즌 1과 비슷했고, 편집점도 씨넷 특유의 패턴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VM]
“야, 도현이 나온다.”
그녀는 강도현이 최애인 친구 A를 불렀다. 강도현 원픽인 그녀도 문스트럭과 같은 태도로 방송을 시청하고 있어서, 실상 TV보다는 인터넷 실시간 반응을 챙겨 보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도현이?”
그때 타이밍 좋게 VM 앞에 ‘전’ 이 붙는다.
“죽을래?”
“아니, 분명 VM이었다고.”
“전 VM 연습생도 나와? 부담 엄청 되겠다. 우리 도현이랑 비교될 텐데…….”
“그러게, 웬만큼 잘해선 안 될 텐데”
문스트럭 역시 공감했다. 문승빈이 걸어 나오기 전까진.
“미친…….”
“문승빈 VM 출신이었어? 대박-”
네가 왜 거기서 나오냐고 소리 지르고 싶은 걸 겨우 참고, 대신 맥주를 들이켰다. PR 때도 공개되지 않았다지만 VM이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그녀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안 봐도 가시밭길이 빤히 보이는 덕질이었지만, 이미 애정도가 너무 높아져서 발 뺄 수도 없는 현실이었다.
승빈이 VM 출신이라는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또다시 전광판에 VM이 떴다.
“아이고야…….”
그리고 거지 같은 중간 광고 타임.
게시판은 또 VM 이야기로 불타고 있었다.
-저 둘을 붙여 놓는다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씨넷 칼갈았네
-근데 VM이 왜 또 나와요?
┕컨셉이야 찐이야?
┕진짜 몰라서 묻는건데요ㅜㅠ
┕야 사격중지 찐머글이다.
-VM 두명 나오잖아ㅇㅇ
┕아 스포ㅡㅡ
┕뭔 스포얔ㅋㅋㅋㅋㅋ이미 다 나왔는뎈ㅋㅋㅋㅋ
-근데 아직도 의문임 쟤네 데뷔조 정해진 거 아니었음?
-ㅇㅇ 전에 계자가 풀고 갔었잖아
┕거기 문승빈도 있었어?
┕ㄴㄴ 이름 나온건 강도현밖에 없었음.
┕ㅇㅇ강도현 포함 5인조라는 썰만 돌았음
아니나 다를까, 입장부터 문승빈과 강도현, 김병대를 두고 묘한 신경전이 있는 것처럼 방송이 흘러갔다.
[문승빈 연습생 옆자리를 두고 망설이는 강도현, 김병대 연습생]
-쟤네 서로 떠넘기는거 봨ㅋㅋㅋㅋㅋㅋ
┕연생때 사이 안좋았나?
-역시 살아남은 이유가 있네
┕강도현에 비하면 평범하긴 하지?
┕문승빈 쟤 어쩌냐 나름 VM 출신으로 비벼보려고 했는데 찐으로 VM이 나오넼ㅋㅋㅋㅋ
그녀는 순간 기분이 나빴다. 지들이 뭔데 내 새끼를 피하고 X랄?
“어이없네.”
“김병대 쟤는 눈치껏 가서 앉을 것이지.”
“뭐냐, 강도현이 우리 승빈이 옆에 앉는 게 별로인가 보다?”
“뭐, 그런 건 아니고…….”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미묘한 신경전이 오갔다. 아직 최애를 정하지 못한 K만이 이 경쟁에서 자유로웠다. 그리고 문승빈의 대면 평가 무대가 먼저 시작됐다.
* * *
문스트럭은 1차로 문승빈이 미자인 것에 기뻐했다.
“승빈이 아직 졸업 안 한 거지? 교복 볼 수 있는 거지?”
“그렇게 좋냐?”
“야, 찐교복 보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서 묻는 거야?”
“그건 인정.”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미 졸업식 앨범 사진과, 졸업식 날 찍을 사진과 영상이 떠다니고 있었다. 자고로 덕질의 묘미는 미자 시절부터 성장하고, 한 계단씩 레벨 업 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백발이 단순히 시그널 송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에 2차로 기뻤다.
“백발 누구 아이디어였을까?”
“개인 연생인데 자기가 하고 나온 거겠지.”
“보통 백발은 잘 안 하지 않나?”
“X나 하얘 우리 승빈이…….”
백발도 잘 어울리는 아이돌은 천년, 아니 만년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앞으로 또 어떤 머리색을 보여 줄지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졌다. 데뷔하고 나면, 다양한 머리색 보는 맛에 행복한 덕질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아이돌이 염색 안 어울리는 거만큼 노답인 게 없거든.
이어서 시원하게 고음을 뽑아내는 모습에 문스트럭은 쾌재를 외쳤다. 목소리가 좋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뭐야? 승빈이 왜 노래도 잘해?”
“야, 내가 잘할 거 같다고 했잖아.”
“그냥 내 최애니까 좋게 말해 주는 줄 알았지.”
저 얼굴이 노래를 잘할 리가 없잖아, 얼굴 어디에도 노래가 없는데. 우리 승빈이는 그냥 존재만으로 완벽했는데 노래까지 잘한다니. 이번 최애 뽑기 대박쳤네. 그녀는 곧장 실시간 반응을 확인했다. 씨넷의 투마월 시즌 2 불판에서도 꽤나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오, 조랭이 노래 꽤하네?
┕메보픽으로 넣어야지
┕메보하기엔 약하지 않음?
-저 비주얼에 저정도 실력이면 메보감 맞지
┕비주얼 메보 ㅈㄴ 희귀한데
┕비주얼 아니어서 탈락
┕거울이나 보세요
“근데 정작 킬링 파트는 하나도 못 했네?”
“그니까, 완전 고음 셔틀인데?”
파트 분배 무슨 일이지, 견제당한 건가? 아니면 설마 처음부터 너무 나대지 않으려고 한 건가? 그 정도로 전략적이라고? 나쁘지 않아. 오히려 좋아.
그녀는 새삼 승빈이에 대한 애정이 더 깊어졌다. 연습생이라고 마냥 아무것도 모르고 덤벼드는 애들보다는 좋은 쪽으로 머리가 좋고, 전략적인 캐릭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계획이 아니라면? 그건 그대로 순수하고 요령 부리지 않아서 좋았다. 사실 그냥 승빈이가 뭘 하든 좋은 거였다.
뒤이어 승빈이가 발라드 곡을 부르면서 울먹일 때, 그녀는 지금껏 느껴 보지 못한 짜릿함과 보호 본능을 느꼈다. 브레이크 고장 난 에잇 톤 트럭에 직격으로 치인 기분. 저 눈에 눈물 흘리게 하는 것이 있다면 지구 끝까지 쫓아가 피눈물 흘리게 하겠다는 투지가 불타올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는 게 너무 예뻐서, 가끔 울어 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울어?
-헐, 우나봐
┕왜 울어ㅠㅠ
-근데 발라드도 잘하네
┕승빈이 메보 찰떡이다
┕쟤가 메보 안하면 누가 함?
-벌써부터 즙짜냐
┕손을 저렇게 떠는데 저게 연기면 여기 나올게 아니라 오스카 가야지
당연히 S등급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울컥한 게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어 A등급을 받자 누군지도 몰랐던 트레이너에 대한 원망이 차올랐다. 그래도 첫 A등급이었다. 그리고 이 정도면 분량도 많았고, 앞으로 성장하는 서사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SNS 계정에 들어가 보정한 방송 캡처본과 함께 짧은 글을 남겼다.
문스트럭 빈 @Moonstruck_bean 5초전
[울지 마 우리 콩알이ㅠㅠㅠ 너무 잘했어! 더욱 성장할 승빈이를 응원해]
이제 문스트럭의 신경은 이번 화에 강도현의 무대가 나오느냐였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백 번쯤 빌었다. 씨넷 놈들아 너네 잘하는 거 있잖니, VM 무대 보여 주겠다고 앞부분 한 소절 정도 보여 주고, 광고 한참 때리고 다음 주 예고하고 끝내자고.
하지만 그녀는 이내 체념했다. 자신의 지난 시즌 원픽도 악편으로 조지고 파이널에서 떨구고, 그녀랑 더럽게도 안 맞는 씨넷이었다. 즉, 강도현의 무대가 시작됐다는 의미였다.
“어, 도현이 나온다!”
왜 데뷔조인지 보여 주겠다는 김병대의 도발에 문스트럭은 도끼눈으로 게시판을 스캔했다.
-병대 쎄네
-문승빈 참교육 가는거임?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 그녀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무대를 지켜봤다. 그리고 맥주를 들이켰다. X나 잘하네 X발.
“도현이 X나 잘해, 역시 내 새끼…….”
-개잘하는데?
-둘 다 S등급 갈 듯
-역시 대기업 인재는 달라
┕긍까ㅇㅇ 괜히 대기업 연습생이겠냐?
-위에 댓글알바들임? 과대평가 쩌네;;
┕문프니? 울지 말고 말해봐
-애네가 문승빈보다 잘한 건 사실이잖아
┕사실적시 명예훼손하지마ㅜ
┕사실적싴ㅋㅋㅋㅋ
벌써 이렇게 정병들이 붙으면 골치 아파지는데. 문스트럭은 자신이 씹고 있는 게 치킨인지 고무인지 구분이 안 갈 지경이었다. 그렇게 강도현네 무대까지 끝나고 나니, 이후로는 고만고만한 무대의 향연이었다.
“얼굴이 좀 생기면… 뚝딱이고”
“실력이 좋으면… 얼굴이 물음표고”
“그래도 전 얼굴에 한 표요~”
“나도 얼굴.”
채널 돌릴까 고민하다가 맥주나 더 가져오려고 일어섰는데, 익숙한 얼굴이 등장했다. 차지운의 무대였다. 문스트럭은 옆에서 치킨을 뜯고 있던 K에게 물었다. K는 문스트럭과 이전 본진 판에서 만난 덕질메이트였다.
“야, 너 지난번에 주운 종이비행기가 쟤 거였나?”
“어.”
“아직 안 팔았고?”
“몰라, 제시 들어온 것들 다 시원찮아서 좀만 더 놔뒀다가 떡상하면 팔려고-”
K는 언젠가 떡상할 지운의 종이비행기에 매일 말을 걸었다. 부디 떡상하고 데뷔 멤버가 되어 나 좀 부자 만들어 주라-
그래서 더더욱 차지운의 대면식 무대를 기대했다. 방송 시작하면 분명 인기 있을 얼굴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어진 지운의 무대는… 실로 처참했다. 문스트럭과 다른 덕친도 섣불리 말을 잇지 못하고 K의 눈치를 봤다. K는 절망했다. 빨리 떡상하고 적어도 데뷔권 언저리에는 올라야 자신의 주식이 대박 나는데, 시작도 전에 하한선 뚫을 위기였다.
“전 아티스트가 될 겁니다.”
쐐기를 박는 아티스트 발언과 함께 K는 자신의 주식이 휴지 조각이 됐음을 직감했다.
“와, 미친놈”
“오늘은 쟤구나…….”
“쇼캐가 세상을 망쳤네.”
“X발 내 주식… 내 반포자이…….”
역시나 게시판도 실시간으로 불타고 있었다.
-데뷔 전부터 아티스트병 걸렸네
┕아 트라우마 도지네
┕아이돌 하는 놈들은 왜 이렇게 아티스트에 집착하는거임?
-개나소나 아이돌 한다고 설칠때부터 알아봤다
-아티스틐ㅋㅋㅋㅋㅋ아이돌은 아티스트 아니냐고ㅠㅠ
-와중에 합장하는 거 꼴받네ㅡㅡ
-이번 시즌 레전드 망신살
-아 차지운 ㅈㄴ아깝네 어쩌다가 저런 애들이랑 한팀이 돼서
┕끼리끼리 아니겠냐;;
반쯤 드러누워서 헐값에 종이비행기 양도 글을 작성하던 K를 구한 건 최성재 안무가의 프리스타일 제안이었다. K는 거의 반쯤 무릎 꿇고 빌었다. 제발 망설이지 말고 기깔 나게 춤 좀 춰 봐라. 그리고 지운은 그런 K의 성원에 보답하듯 완벽하게 프리스타일을 해냈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 작성하던 양도 글을 모조리 지웠다.
-차지운 혼자 탈출했넼ㅋㅋㅋㅋㅋ
┕메댄 차지운 밀어도 되는거?
┕메댄하기엔 약한데
-난 차지운 좋아
┕쟤 분명 인성 논란 난다니까?
┕지 인성은 생각 못하는 방구석 찐따 수준 보소
“살았다…….”
K는 이쯤 되니 차지운에게 동료 의식이 느껴졌다. 네가 성공해야 내가 성공한다.
오늘부터 넌 내 원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