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하, 같은 곡에 같은 의상은 최초였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전략을 잘 짠다고 하더라도 아이디어나, 분위기가 겹치는 부분이 분명 나올 거였다. 거기다가 상대 팀은 대부분 키가 큰 연습생들이어서 슈트에 더 잘 어울리는 외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경연 준비 기간은 5일입니다. 연습생 여러분들은 처음으로 대중의 평가를 받는 무대인만큼 최고의 무대를 준비해 주시길 바랍니다!”
“네!”
우렁찬 대답과 함께 팀별로 모였는데, 하필 옆자리에 강도현이 왔다. 그런데 이놈이 티 나게 주춤하더니 다른 조원과 자리를 바꾸는 거다. 본능적으로 주변에 카메라가 있는지 스캔을 했다. 다행히 센터인 박재봉네 조에 카메라들이 모여 있었다.
그 이후로도 강도현은 누가 봐도 이상했다. ‘나 문승빈이랑 어색해요.’를 온몸으로 표출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자기가 생각해도 나하고만 어색하게 지내는 건 그림이 이상했는지, 안 어울리게 얌전하기까지 했다. 강도현이 얌전? 세상에, 그냥 박선우가 묵언 수행하는 게 더 말이 된다.
모두 같은 곡, 같은 의상에 난감해 보였다.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자, 안 되겠는지 드디어 강도현이 입을 열었다.
“일단 파트 분배부터 하시죠.”
센터, 리드 보컬 1&2, 서브 보컬 1&2 그리고 메인 보컬. 나는 무조건 메인 보컬을 선점해야 했다. 투마월 1-3 시즌을 분석했을 때, 처음부터 시청자들에게 포지션을 눈도장 찍어 놔야 유리했다. 다행히 이 조에서 보컬로 위협적인 연습생은 없어 보였다. 강도현은 이미 센터에 지원해서 뽑힌 상황이니 나에겐 유리했다.
“난 메인 보컬.”
“저도-”
김형석, 같은 A등급이었던 연습생이다. 크게 견제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서바이벌에서 방심은 금물이었다.
“그럼 메인보컬 파트 한 번씩 들어보고 투표로 정할까?”
“누구 먼저 할까?”
김형석이 조용했다. 역시 예상한 대로다. 사실 쟤가 먼저 하기를 내심 기다렸지만 더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좋아, 나 먼저 할게.”
실력에 자신 있다면 굳이 뒤로 뺄 필요가 없었으니까. 이 노래의 메인 보컬 파트는 처음 노래가 나왔을 때도 소소한 화제가 되었을 만큼 초고음에 박자도 어려웠다.
[이름: 문승빈]
외모: B
끼: C-
보컬: B+
댄스: B-
프로듀싱: D
하지만 혹독한 연습 평가 훈련과 트레이닝을 거치면서 노래 등급이 B+까지 올라온 상태였고, 상대방은 B-에 불과했다.
[마침내 다가온 이 순간
네 숨도 끝도 오직 내 손끝에]
이어지는 3단 고음. 연습실 가득 울리는 목소리가 조금 민망했지만 혼신의 힘을 다했다. 다행히 실수 없이 깔끔히 해냈다.
“와-”
“이거 진짜 높은데…….”
“승빈이 진짜 잘하지.”
“생각해 보니까, 두 분은 같은 VM이었으니까 잘 알겠네요?”
“아…….”
다른 팀원의 물음에 강도현도 아차 싶었는지 말끝을 흐렸다. 더 놔두면 분위기만 이상해질 게 뻔해서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럼 이번엔 형석이가 불러 볼까?”
“네? 아, 네!”
가사지를 쥔 김형석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긴장을 잘 하는구나. 하긴, 개인 연습 때는 잘하다가도 A등급 연습 시간에 트레이너 앞에만 서면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던 연습생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음에서 삑사리가 났다. 정적이 흘렀다.
“투표해 볼까요?”
투표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5대 0, 압도적인 차이로 메인 보컬에 선택됐다. 김형석도 아쉬운 듯했지만 별다른 말 없이 결과에 승복했다. 그래서 나는 이번 경연이 꽤 순조롭게 진행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날 저녁 연습 시간에 사건이 터졌다.
“저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저 피곤한데 잠깐 숙소 좀…….”
처음에는 불만 없이 연습을 따라오던 놈이 온갖 핑계로 연습에 집중하지 못했다. 이거 지금 메인 보컬 못 했다고 시위라도 하는 건가? 김형석이 악편으로 조져지게 될 건 둘째 치고, 경연 준비에 차질이 생기고 있었다.
“형석아, 잠깐 나 좀 보자”
리더인 연습생과 다른 팀원들도 각자 연습에 바쁜 터라 내가 직접 나섰다.
“연습에 조금만 집중해 줬으면 해.”
“…….”
“불만이 있거나, 바꾸고 싶은 게 있으면 말을 해. 이리저리 핑계 대면서 다른 팀원들한테 피해 주지 말고.”
이건 진짜 참다 참다 꺼낸 말이었다. 어떻게 편집될지는 모르겠다만 자칫하다간 나에게도 위험할 수 있는 발언이었으니까. 그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내내 입 꾹 닫고 고개 숙이고 있던 김형석의 어깨가 들썩였다.
“너, 설마 울어?”
“죄, 죄송해요 흑, 그런데, 저 메인 보컬을 꼭, 하고 싶어서”
내가 이 서바이벌에 참여하면서 변한 게 여럿 있었지만, 과거 그대로인 연습생도 있었는데, 그게 김형석 같은 케이스였다. 원래도 얘는 시즌 2에서 메인 보컬 하고 싶다고 팀 분위기 흐리다가, 겨우 메인 보컬을 쟁취했지만, 방송 후 역풍을 맞고 떡락했었다. 그래서 아까 무난하게 넘어갔을 때 다행이라고 생각한 건데, 결국 자기 무덤을 파는구나.
“너 만약 메인 보컬 하게 해 주면 연습 집중하고 제대로 할 거야?”
“네! 당연하죠!”
그래도 뭔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이 정도라면 나도 더는 도와줄 수 없었다.
“대신 완벽하게 해내야 해. 다른 애들이 납득할 수 있을 만큼.”
“당연하죠! 저 진짜 열심히 할게요. 형, 고마워요!”
메인 보컬 교체 소식에 모두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곧 수긍했다. 당장 이틀 뒤가 중간 평가이기 때문에 연습 분위기를 잡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이틀 동안 김형석은 지금껏 보지 못한 집중력을 보여 줬다. 나도 살짝 위기감을 느낄 정도였다. 실전에 약한 애라 어차피 메인 보컬이 다시 나한테 돌아올 걸 알아서, 별 걱정 없이 메보를 넘긴 거였는데 말이다. 이러다가 내일 중간 평가에서도 잘해 버리면 메인 보컬을 정말 빼앗길 텐데.
새벽 1시쯤 전체 연습을 마치고, 김형석을 비롯한 다른 조원들은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는지 내일 컨디션을 위해 일찍 잔다고 숙소에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연습실에 나와 강도현 둘만 남았고, 지금이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관찰 캠도 꺼진 시간대이니 몸 사릴 필요도 없었다. 짐을 챙기고 나갈 준비를 하는 강도현을 붙잡았다.
“야, 강도현.”
“왜?”
“내가 싫은 건 알겠는데, 너무 티 나게 나 불편해하는 거 계속할 거야?”
“무슨 소리야?”
“어차피 너는 나 나오는 거 알고 여기 나온 거잖아. 괜히 어색하게 나와서 너나 나나 좋을 거 없지 않나?”
“…….”
“카메라 앞에서라도 그냥 평소 너처럼 굴어. 연습할 때도 최대한 집중하고.”
“…그래.”
“내일 보자.”
“너는?”
“난 더 연습하고 들어가게.”
“그래, 너무 무리하진 말고.”
말하고 또 자기 딴엔 너무 친밀한 말이었는지 머쓱해한다. 대체 왜 저러는지는 나도 모르겠다만 본인도 지금처럼 행동하면 좋을 게 없단 걸 알겠지, 멍청한 애는 아니니까. 내일은 달라져 있길 바랄 수밖에.
“머리 아프네, 연습이나 하자.”
* * *
한참 연습했을까, 피곤함보다도 알 수 없는 답답함이 강했다. 보통 이 정도 연습을 하고 노력하면 스텟창에도 변화가 있는데, 요지부동이었다.
단계가 높아질수록, 올라가는 속도가 더뎌진다는 건 다른 연습생의 스텟창을 관찰하면서 어렴풋이 깨닫긴 했다. C나 D였을 때는, 연습 몇 번만 해도 +로 올라갔다. 근데 B-부터는 잘 오르지 않았다. 나는 특히나 대부분의 스텟이 이미 B등급이었기에 단계를 올리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노래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다.
“뭐가 문제지. 이런 적은 없었는데.”
그때 허공에 떠 있던 상태창에 불빛이 깜빡였다. 상태창을 발견한 이후로 처음 나타나는 변화였다. 두어 번 깜박이더니 팝업창이 떠올랐다.
‘이게 뭐지?’
[제목: 킬러]
-노래: ■■□□□
“킬러? 우리 경연곡이잖아?”
그런데 이게 왜 지금 뜨는 거지? 다른 곡들을 연습할 땐 개별 곡에 대한 스텟창은 없었는데?
“이것도 연습하면 포인트가 올라가서 채워지는 건가? 근데 왜 아직도 두 칸밖에 안 채워진 거지?”
연습이 부족하진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어쩌면 이전 무대들보다 몇 배의 노력을 투자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비록 일일 천하였지만, 조원 모두의 만장일치로 메인 보컬에도 뽑히지 않았는가. 그런데 대체 왜?
“노래창이 저렇게 뜨는 걸 봐서는 지금 내 노래가 별로라는 건데.”
잠시 안무 연습은 멈추고 노래에 집중하기로 했다. 원곡을 연속해서 들은 후, 연습실에 놓인 태블릿을 사용해 처음부터 끝까지 완곡을 녹음해 봤다. 녹음본을 듣고 나니 조금 감이 잡혔다. 원곡의 창법과 내 기존 창법이 전혀 달랐다. 원곡에서 느껴지는 쫀득한 느낌이 너무 부족했다. 원곡을 완전히 따라야 할 필요는 없지만, 원곡이 가지고 있는 핵심 포인트는 가져가야 하는 것이 맞았다.
분명 하이라이트 고음 말고는 음정이 높은 것도 아니었는데, 진성과 가성을 자주 오가기 때문에 버거웠던 거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부른 곡들은 노래 자체에 기교를 부릴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내 정직한 창법에도 잘 어울렸던 거다.
“레이백이 필요하네, 그리고 발음도 조금씩 흘려 주면서 불러야 하고.”
원곡의 창법을 조금씩 따라해 보았다. 역시 쉽지 않았다. 평소 창법도 아니고, 몸에 익지 않은 것을 단기간에 습득해 내기란 어려웠다.
“네 심장을- 아니야, 여기서 조금 더 끌어서 불러야 해.”
아예 초 단위로 음원을 끊어 가며 음을 따라 불렀다. 그리고 마침내 머리 위로 불 하나가 켜진 기분이 들었다. 원곡의 느낌에 가까워진 것이다.
“다시 한번 해 볼까…….”
한 음 한 음 너무 고민하지 않고, 음을 끌어 가며 불러 봤다. 그러자 상태창에 떠 있던 노래 옆 네모 칸이 하나 더 채워졌다.
[제목: 킬러]
-노래: ■■■□□
“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원래 창법으로 몇 번 더 불러 봤지만, 상태창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때 확신했다, 이건 소화력의 문제였구나. 잠깐 잊고 있었다. 아이돌 세계는 ‘열심히’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건 기본이고 더 나아가 ‘잘’해야 했다.
그 이후로는 연습이 수월했다. 몇 번 불러 보고 상태창에 변화가 없으면 다른 방식으로 다시 불러 봤다. 상태창이 반응하는 대로 연습해 나가자 혼자 답 없는 고민을 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신기하게도 상태창에 노래 포인트가 올라갈수록, 스스로도 이 노래를 이해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다음 날 중간 평가 바로 직전 단체 연습을 하던 중, 마침내 상태창의 네모 칸이 5개 전부 채워졌을 때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간신히 참았지만, 조원들은 쟤 왜 저러나 했을 거다.
확실히 상태창은 내가 머릿속으로 떠올릴 때만 구현됐다. 허공에 떠 있는 상태창을 여러 번 만져 보려고도 했지만, 물리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현재의 상태를 보여 줄 뿐, 내가 원하는 대로 수정할 수는 없었다. 쪽팔린 얘기지만 혼자서 ‘레벨 업’, ‘외모 S로 바꿔 줘.’ 같은 말을 해 본 적도 있었는데,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화장실에서 몰래 했으니 망정이지, 누가 봤다면 그 자리에서 혀 깨물었을 거다.
[노래 목록]
(…)
-Last Chance
-눈부셔
-킬러 (New!)
하지만 킬러 노래를 습득하고 난 후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노래 목록’이라고 떠올리자, 상태창에 그동안 내가 연습했던 노래 목록이 나타났다. 이미 내 눈앞에 등장한 기능들은 지속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걸 구현하는 건 내 생각이었다.
대체 이 상태창이 왜 생겼는지, 어디까지 나타날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 누구보다 든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