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첫 방송이 아직도 2주나 남은 이 시점에서, 팔로워들이 가장 기대하는 것은 바로 PR 영상이었다. 연습생의 매력을 집중 탐구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떡밥이 없어도 너무 없는 탓도 있었다. 시그널 송 영상이 나온 후 게시판은 매일 PR 영상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씨넷 홈페이지에 연습생 PR 영상이 업로드 됐다.
씨넷은 시즌 1 자가 복제라는 소리를 피하고자 PR 영상부터 차별점을 두었다.
-소속사 안 밝히나?
-이름만 나와 있네?
┕이번 시즌은 이름만 나오고 그 외는 미공개래.
-어차피 알만한 애들은 다 아는데 유난은...
┕아예 이름도 숨기지 그랬냨ㅋㅋㅋㅋ
“내 영상이 어디 있지?”
100명이나 되는 연습생 사이에서 이름 찾는 것도 일이었다. 가나다순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32. 여러분의 꿀잠 요정, 문승빈]
“잘 나와야 할 텐데.”
사실 걱정이 앞섰다. 내가 고른 아이템이 평범하지는 않았으니까.
“안녕하세요, 팔로워 여러분. 문승빈입니다.”
-뭐야, 소리가 안 나오는데?
-ASMR이야?
-볼륨 100으로 해야 들릴 거 같은데?
-자기 PR을 슬라임 ASMR로 하는 놈이 어디있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처음 대중에게 매력을 공개하는 만큼, 평범하지 않은 아이템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악기나 노래를 할까도 했지만, 눈에 띄기에는 부족했다. 긴 고민 끝에 ASMR, 그중에서도 슬라임 ASMR을 선택했다. PR 영상은 조회 수가 제일 중요하니까, 반복해서 들을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었다.
ASMR 영상 시청자의 알고리즘을 노린 것도 있었다. ASMR을 활용한 시즌 3 한 참가자의 PR 영상이 의도치 않게 꿀잠 영상으로 흥하면서, 순위가 떡상했던 적이 있었거든. 물론 그 사람은 뜨개질을 했지만, 나는 지금 내 이미지와 어울리는 슬라임을 선택했다.
-아니 근데 소리가 왜 저렇게 바삭해?
-스티로폼이냐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야 근데 소리가 좀;;
-소리가 문제가 아니라 문승빈 땀나는데?
“하-”
근데 역시 세상일이 원하는 대로만 될 리가 없지. 원래 짰던 계획이랑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름 ‘조랭이’라는 별명도 얻었으니, PR 영상도 말랑한 이미지로 갈 생각이었다. 그래서 대충 말랑해 보이는 거로 구매했는데, 인생 두 번 살면서 내가 슬라임 가지고 논 적이 있어야지. 준비한 슬라임이 예상외로 너무 뻑뻑해서 촬영 당일에도 엄청나게 당황했다.
“원래 이렇게- 퍽퍽한가?”
“망했다.”
처음에는 신나서 슬라임을 만지던 박재봉도 걱정 어린 눈으로,
“형, 힘내요.”
할 정도였으니.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촬영 들어가기 전까지 슬라임을 최대한 주물렀다. 머릿속에는 ‘말랑해져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제 취미는 음악 감상과 독서이고-”
하지만 맘대로 안 되는 게 세상이었다. 목소리보다 슬라임 반죽 소리가 더 컸다. 당황해서 식은땀까지 났다. 지금 봐도 어이가 없다. 뻑뻑한 슬라임을 무슨 수타면 반죽하듯 치대고 있었으니 말이다.
‘돌아 버리겠네.’
-꿀잠요정이라며....☆ 잠 다깼다 ㅁㅊ
-아니 근데 내가 썩은건가?
-지금 떠오르는 걸 모두 말하면 난 청주교도소에 들어가 있을텐데.
┕잡았다 요놈!
-슬라임 : 죽여줘...
┕문승빈 : 슬라임 할게.
슬라임 : ㅇㅇ 죽어줄게.
팔로워들 반응도 내가 기대한 것과 전혀 다르게 흐르고 있었다. 질퍽거리는 소리가 내가 듣기에도 조금 민망했다. 심의에 걸려서 영상 내려가는 일만 없길 바랐다.
“앞으로 성장하는 문승빈이 되겠습니다. 투표 많이많이 해 주세요. 안녕~”
드디어 끝났다. 1분이 1시간 같았다. 다른 연습생들의 PR 영상 구경이나 갈 겸 스크롤을 내리는데, 눈에 띄는 제목이 있었다.
[71. 여러분을 찌릿찌릿하게 만들 감전좌! 이성재]
“이걸 이렇게 쓴다고?”
게시판도 나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감전좌를 알아?
-미친놈들이 이걸 필터 없이 쓰네.
등장부터 감전된 것처럼 춤추던 이성재는 아예 머리도 폭탄 맞은 과학자같이 하고 나왔다. 시그널 송 방영 당일에는 침울해 보이더니, 아예 자신의 캐릭터로 만들 작정인가 보다.
“여러분의 감전좌, 연습생 이성재입니다!”
-얘네는 핸드폰 압수 안함?
┕ㅇㅇ 이번시즌부터는 안한다더라
-아;; 이런 거 너무 알면 별론데;;
-애잔하다...
┕애잔하면 투표 좀.
-성재한테 처음 감전좌라는 별명 붙인 새끼 내가 죽일거다.
┕왜? 캐릭터 만들어준 거에 감사해야지.
┕응 니새끼 조롱받다가 꼬옥 1차 때 광탈하길.
“다채로운 매력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찌릿! 찌릿! 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이성재 꼭 기억해 주시고 투표 많이 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애처롭다...
-얘는 백퍼 성인일 듯. 말하는 데 연륜이 느껴져 이십대 중반?
┕이십대 중반이 연륜 소리 들을 나이임?
┕이분 이십대 중반이신가 보네.
이성재에 비하면 내 PR은 새 발의 피였다. 그리고 모든 정보를 숨겨서인지, 게시판과 각종 커뮤니티에서는 연습생들의 나이 얘기로 가득했다.
-승빈이 미자다 성인이다?
┕닥전자지. 누가 봐도 미자임.
┕노림수 못 봄? 딱 봐도 성인임. 미자가 저러는 거면 발랑 까진거지.
┕오히려 좋아.
┕이새끼 잡아가.
-내가 다른 건 모르겠고 박선우는 대깨미자임.
┕ㅇㅈ
┕많이 봐도 고딩임.
┕미자단 수장은 우리 선우지^^
“와, 방송 시작하면 많이들 놀라겠네.”
-차지운은 성인이겠지?
┕아무도 의심하지 않아서 언급도 없는 거 실화냨ㅋㅋㅋㅋㅋㅋ
┕미자들한테 사과해야 할 수준;;
“아, 맞다. 지운이 형.”
차지운의 영상을 들어가 보니 조회 수가 꽤 높았다. 1시간 지났는데 3만이면 나쁘지 않은 추이였다.
“안녕하십니까, 차지운입니다. 저는 춤추는 것을 좋아합니다.”
-뭐야, 아무것도 안 준비했어?
-맨몸 승부인가?
-이래서 잘생긴 놈들은 간절함이 없다는거임. 감전좌를 봐라.
┕성재가 여기서 왜 나와?
┕아까 살인예고 하던 성프 이신가 봐요.
“제 취미는… 시집 읽기입니다.”
-?
-???
-?????
게시판에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물음표로 도배되기 시작했다. 약간 쫄렸다. 이거 사실 내가 추천한 아이디어였거든.
형을 알릴 첫 번째 기회였다. 비주얼이야 이미 다들 인정하고, 시그널 송으로 실력도 나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을 거다. 이제는 반전 매력을 보여 줄 타이밍. 그때 떠오른 것이 시집이었다. 티벡스 시절 형은 정말로 시집을 들고 다니면서 틈틈이 읽었고, 가끔 팬 카페에 시를 공유하고는 했다. 처음에는 기겁하던 팬들도 어느 순간부터는 ‘지운이가 또…….’ 익숙해졌다.
“시를 읽어 보는 건 어때요?”
“시?”
“네, 형 목소리가 좋으니까-”
“나랑 너무 안 어울리지 않을까?”
그래서 하라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가끔 보면 아이돌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거 같단 말이지…….’
“근데 너 내 취미가 시집 읽기인 건 어떻게 알았어?”
형의 반응에 아차 싶었다. ‘시집 읽기’는 평범한 것도 아니고, 형의 이미지에서 연상하기에는 더더욱 어려운 취미였으니까.
“형, 진짜 취미가 시집 읽기예요? 아무거나 던진 건데. 신기하다~”
“아-”
속으로는 엄청나게 당황했지만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을 했다. 배우 생활 허투루 보내진 않았네. 너무 당당한 태도에 오히려 형이 더 당황한 얼굴이었다.
“아, 그렇다고 진짜 아무거나 던진 건 아니고요. 형 목소리가 좋으니까-”
“알아, 네가 그럴 애는 아니잖아.”
어쩌다 저런 순한 영혼이 저 개쎈 양아치 얼굴에 들어간 걸까, 내가 다 안타까웠다. 하지만 아이돌에게는 꽤나 매력적인 반전 포인트였다. 살려는 드릴게- 할 법한 얼굴로,
“오래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이러고 있는데 기억에 안 남겠냐고.
-ㅁㅊ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목소리 좋다...
-와 차지운 ㅈㄴ 강적이네.
┕컨셉충은 아닐 줄 알았는데 실망임.
-ㅈㄴ 진지한 얼굴로 시 읽는 새끼가 어디있엌ㅋㅋㅋㅋ
-귀여웤ㅋㅋㅋㅋㅋ
-못된 인상에 그렇지 못한 취미네...
┕잘생긴 게 부럽다고 해 방구석 찐따야.
┕그럼 쟤 인상이 순하냐?
-완전 반전인데?
호불호는 갈렸지만, 확실히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이 시처럼 볼수록 매력 있는 사람이 되어 여러분의 마음에 스며들겠습니다. 소중한 한 표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잘생겼으니까 일단 투표 갈긴다.
-지운이 데뷔해서 시 읽기 콘텐츠 해주면 찰떡이겠다!
┕나중에 떨어져서 소속사 계정에 올라올 듯.
┕PTSD 오게 하네 ㅅㅂ
-어그로는 성공했넼ㅋㅋㅋ조회수 강도현 정유현 다음임.
인기 최상위권 연습생인 강도현, 정유현에 버금가는 조회수라니. 이 정도까지 반응이 올 거라곤 예상 못 했다. 때마침 형에게 메시지가 왔다.
[승빈아, 고마워]
[형이 잘 살려서 그런 거죠! 축하해요, 형.]
띠링. 답장 한번 빠르다고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박선우의 메세지였다.
[문승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
[메시지가 회수되었습니다]
순식간에 사라진 메시지에 의문이 생겼다. 뭔가 불안한데.
“뭐 심각한 일은 아니겠지.”
* * *
박재봉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핸드폰을 보던 중, 인기글 제목을 보고 설마 했다.
[보는 사람 쓰레기 만드는 투마월 연습생](조회수:19089)
(댓글 : 500)
-내가 쓰레기인거지?
┕그치만 쟤가 먼저!
┕승빈이 그런 줄 몰랐는데 무서운 사람이었네.
-승빈이 완전 앙큼이었네
┕문폭스
설마가 사람 잡았다. 다시 PR 영상에 들어가 보니 조회 수가 2시간 전보다 10배는 뛰어 있었다. 강도현, 정유현보다도 높았다. 반대편에 앉은 박재봉이 내 눈치를 보면서 힐끔거리는 것이 뭔가 이상했다.
“재봉아.”
“네? 저 아무것도 모르는데요?”
넌 아무것도 모른다는 애가 들고 있던 돈가스까지 떨구면서 놀라니.
“선우 형이 비밀로 하자고 해서…….”
“뭐, 나쁘진 않네.”
생각보다 담담한 반응에 박재봉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중간중간 뇌에 힘주지 못하고 쓴 댓글이 보이기도 했지만, 금방 멘탈을 잡았다. 무플보단 악플이라고, 무관심은 이미 망돌 시절 지겹도록 받아 봤으니 더 필요 없다. 이 정도 악플? 일도 아니다. 티벡스 시절에는 하도 댓글이 없어서, 내가 몇 번 단 적도 있었다.
혹시나 자극적인 방향으로 소비될까 잠깐 걱정했지만, 발 빠른 슬라임 업체의 홍보로 그런 걱정까지 깔끔하게 사라졌다.
[투마월 조랭이남이 사용한 화제의 그 슬라임!]
*해당 상품은 슬라임 2개가 세트 구성되어 있습니다. 옵션 선택 시 주의 부탁드립니다.
[주의! 반죽이 아닙니다. 슬라임입니다.]
*문승빈 연습생이 사용한 슬라임은 베이스로, 다른 슬라임과 섞어서 사용해야 합니다.
*슬라임의 문제가 아닙니다ㅠㅠ 단독 사용할 경우, 문승빈 연습생처럼 반죽을 하시는 참사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영상 참조)
-여기 슬라임이었구낰ㅋㅋㅋㅋ
-도대체 슬라임에서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나오나했는데ㅋㅋㅋㅋ
┕아니 문승빈 대체 뭐한거얔ㅋㅋㅋㅋ
-나 저거 사봤는데, 베이스만 하면 눌리지도 않아 ㅁㅊ
┕헐 승빈인 대체 어떻게 그걸 치댄거야??
┕문승빈 독기쩐다;; 저 뻑뻑한걸 반죽을 해놨네
-문민수해야지.
자본주의 만세다. 어쩐지 내가 영상으로 보던 슬라임과 너무 다르다 했더니, 잘못 산 거였네. 업체에서는 본인들의 억울함을 풀려는 듯, 내가 썼던 제품의 뻑뻑함을 온갖 방식으로 어필했다. 그리고는 다른 슬라임과 섞었을 때, 부드러워지는 모습까지 강조해서 다양한 영상을 찍어 올렸다. 상상 이상의 뻑뻑함을 확인한 대중들의 관심사는 이제 슬라임 그 자체와, 그걸 열심히 조진 나의 노력에 집중되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했던가. 비록 내가 노리던 꿀잠 영상은 아니었지만, 내 PR 영상은 입소문을 타고 투마월을 모르던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흘러 들어갔다.
“앙큼아!”
등 뒤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난번 조랭이도 누구보다 빨리 알아 오더니…….
“왜 보내 놓고 삭제했나 했어요.”
“다른 사람 통해서 알면 재미없잖아~”
사람이 분명 나쁜 건 아닌데, 묘하게 열받게 하는 구석이 있다. 그렇다고 미워하기엔 또 착하고. 사람 놀리는 맛에 사는 사람이 있는데 딱 그런 유형이다. 나는 재수 없게 그 타깃이 된 거고.
“너 진짜 도화살 있나 보다. 그 뭐지, 사이버 도화살?”
“하하…….”
그런 게 있었으면 내가 2년 동안 망돌로 살았을까. 그때 있었을 도화살이 죄다 지금 몰빵된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그때, 익숙한 비지엠과 함께 안내 방송이 나왔다.
“연습생 전원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15분 안에 대강당으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갑작스러운 호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