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10화 (10/346)

10화

“S등급 연습생 강도현, 영상 평가 시작합니다!”

결국 김병대가 떨어졌군. 성격상 엄청 자존심 상했을 것이다. 당분간은 마주치지 말아야지. 어쩐지 어제 촬영 마치고 나오는 S등급 중 유일하게 어두운 얼굴이기에 대충 예상했다.

나야 뭐, 둘 중 하나가 떨어지면 당연히 김병대일 거로 생각했지만, 다른 연습생들은 아니었나 보다. 다들 상당히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확실히 대면식 무대에서는 김병대의 보컬 파트가 더 많았으니까, 시그널 송을 당연히 더 잘 불렀다고 생각했겠지. 래퍼라고 생각했던 강도현이 노래까지 잘할 줄은 몰랐을 거다.

강도현의 무대는 역시 안정적이었다. S등급 4명의 후보 중에서도 실력 면에서는 가장 뛰어났다. 김병대랑 비교하려고 제일 마지막에 공개한 게 분명했다. 편집이 어떻게 흘러갈지 뻔했다.

곧이어 A등급 영상 평가가 시작됐다. 내 영상이 나올 때 연습생들의 반응은 이전과 비교할 때 가장 뜨거웠다. 특히 센터 후보 중에서 고음은 가장 깔끔하게 해냈다고 자신할 수 있다.

됐다. 이 정도면 센터는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다.

박재봉의 무대를 보기 전까진.

“C등급 박재봉 연습생! 영상 평가 시작하겠습니다!”

시작부터 우렁찬 목소리였다. 잠시 심호흡하는 모습은 꽤 귀여웠다. 그리고 전주가 나오는 순간, 눈빛이 달라졌다. 원래 저런 눈을 가진 애였나? 의문이 들 정도였다. 평소에도 눈이 반짝거렸지만 이렇게 카메라를 잡아먹을 듯 강렬한 눈빛을 가지고 있을 줄 몰랐다. 안무에도 강약 조절이 정확했고, 걱정하던 고음도 나만큼은 아니었지만 실수 없이 해냈다.

그리고 마지막이 압권이었다.

“눈부셔 New World!”

강렬한 엔딩과 함께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내더니 머리 위로 뿌렸다.

“저게 뭐지?”

“꽃가루 같은데 저게 어디서 났지?”

“헐, 대박-”

연습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설마 저거 A4용지 아냐?”

“맞네, 쟤 머리에 붙은 거 봐. 종잇조각이네!”

그 순간 연습생들의 탄성이 쏟아졌다. 지금껏 누구도 저런 엔딩을 준비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제스처를 바꾸거나 엔딩 포즈를 준비한 게 다였다. 심지어 중간중간 잉크가 묻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가사지를 찢어서 활용한 것 같았다.

와, 당했다. 맹한 놈인 줄 알았는데 완전 전략가였다. 마냥 귀여운 애로 보기엔 무서울 정도였다. 저런 애가 아이돌 하는 거구나, 회귀도 안 한 애가 아이돌 인생 N회차인 것처럼 대단하네.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연습생의 영상 평가는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다른 연습생들도 비슷했다. 대면식 무대에서는 큰 임팩트가 없던 연습생이었기에, 다들 박재봉이 누구냐, 원래 저렇게 잘하는 애였냐- 반응이 뜨거웠다. 놀라움과 의아함이 공존했다. 저런 퍼포먼스가 방송에 안 나왔을 리가 없는데. 박재봉이라는 연습생은 기억이 안 나더라도, 이 상황 자체가 낯선 게 이상했다.

실력으로 본다면 당연히 S나 A등급에서 센터가 나와야겠지만, 그만큼의 끼와 임팩트를 보여 준 연습생은 없었다. 단순히 실력만으로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센터는 이미 정해진 듯했다.

“연습생 투표 결과 센터는… 박재봉 연습생입니다!”

그리고 이변은 없었다. 아니, 이 상황 자체가 최대의 이변일지도.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유현이 아닌 박재봉이 센터가 됐다는 건, 내가 과거로 돌아와서 생긴 변화일까? 직접적으로 관련된 건 아니었지만, 알고 있던 과거가 달라질 때마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악!”

박재봉이 비명과 함께 자리에 주저앉았다. 뭐가 그리 서러웠는지 엉엉 운다. 주변에 있는 연습생들의 눈가도 빨개진다. 나도 괜히 코끝이 찡했다.

아주 가끔, 이렇게 개인의 노력과 열정이 운과 실력을 이길 때가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이 악랄하고, 정글 같은 서바이벌에서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축하해.”

“이거 꿈 아니죠, 형.”

“볼이라도 잡아 줄까?”

“악, 아파요, 아파. 근데 좋아요.”

눈물을 펑펑 쏟아 내는 애 양 볼을 붙잡고 죽죽 늘렸다. 안 그래도 볼살 때문에 동그란데, 울어서 부으니 완전 찐빵이었다.

시그널 송 촬영까진 이틀. 그사이 나도 어떻게 하면 3분 안에 임팩트를 줄 수 있을까 더 고민해 봐야겠다. 이전 시즌에서 이슈가 됐던 연습생이 누가 있었지. 아, 시즌 4 센터가 했던 걸 해 봐야겠다. 한쪽 볼을 잡아서 떼어 내 먹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말랑이’라는 별명이 붙고 인기 꽤나 얻었던 거로 기억한다. 다행히 4년 전으로 돌아오면서 얼굴 젖살이 돌아왔다. 어려지니까 이런 건 좋네.

* * *

서바이벌 시작하고 나서 매일 느끼는데, 시간이 정말 빠르게 지나간다. 뭐 했는지도 모르게 눈 깜빡하니까 시그널 송 촬영 날이다. 승빈아, 뭐라도 좀 해 봐라- 지금 나를 회귀시킨 절대자도 똥줄 좀 탈 거다. 그런데 죄다 ‘어쩌라고 연습이나 해.’ 상태인 걸 어떡하냐는 말이다.

여전히 잠에 취한 얼굴들이지만, 이제 따로 공지 안 해도 모두 합숙소 입구에서 등급별로 줄 서서 버스를 기다렸다. 탑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가 멈췄고, 거대한 컨테이너 박스 같은 세트장에 도착했다. 순서대로 입장했는데 상상 이상의 규모에 다들 입이 떡 벌어졌다.

“대박…….”

“미쳤다. 저게 다 무대야?”

“완전 크다, 진짜.”

눈이 멀 정도로 사방에 조명이 가득했고, 무대는 거대한 별 모양이었다.

스태프들이 각 연습생의 자리를 알려 줬는데, 그냥 센터와 아이들 수준의 배치였다. 의외로 등급별로는 차이가 거의 없었다. 센터를 포함한 센터 후보군 11명이 가운데에 서고, S나 A등급도 나머지 멤버들은 사이드 행이었다. S등급 김병대보다 센터 후보군인 F등급 연습생이 더 잘 보이는 자리에 위치했다. 제작진의 노림수가 뻔했다. 데뷔조를 제외하고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노골적으로 보여 주는 구성이었다. 등급이 무엇이든 결국 선택받아 데뷔하는 사람이 승자라는 걸.

모두 정해진 자리에 위치하고 난 후, 마이크를 든 PD가 박재봉을 불렀다.

“박재봉 연습생, 센터 공간에서 대기해 주세요.”

“네!”

센터 공간에만 카메라가 3대나 따로 설치되어 있다. 다들 이번 시즌 센터 팍팍 밀어준다며 부러움 섞인 반응이었다. 물론 불공평하다며 불만을 가진 연습생들도 있었지만, 박재봉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듯했다.

“센터 공간 리프트 상태 확인하겠습니다.”

지잉-!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재봉이가 서 있던 공간이 우뚝 솟았다. 완전 센터와 아이들이구먼. 이게 마냥 좋은 건지는 모르겠다. 선공개로 나오면 분명 센터 몰아주기 심하다는 부정적인 여론이 나올 것이 뻔하다. 뭐든 ‘적당히’를 알아야 하는데 씨넷이 그럴 리가 없지.

“으아아…….”

처음이라 적응이 안 되는지 중심을 잃고 휘청거린다. 잠깐 겁먹은 얼굴이더니 금세 중심을 잡고 가볍게 안무를 맞추는 여유까지 보인다. 근데 너무 높은 거 아닌가, 뭔가 잡고 있을 만한 것도 없어 보였다. 고소 공포증은 없어 보여서 다행이지 아니었음 고역이었겠네.

근데 저 리프트를 보니 뭔가 기억이 날 듯했는데, 뭐였더라. 괜한 찝찝함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리허설을 마치고 본 촬영을 위해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으러 이동했다. 새로운 세상으로 향한다는 노래 가사에 맞게 의상 콘셉은 ‘항해사’로 전원 마린 룩이었다. 상의는 하얀 바탕에 짙은 파란색 리본이 포인트였고, 하의는 반바지와 긴바지 중 선택할 수 있었다. 나는 당연히 반바지를 골랐다. 여기서 긴바지 고르는 멍청이가… 꽤 있네. 개중 독기 가득한 몇 명은 반양말까지 착용했다. 물론 나도 그중 하나였다.

가운데에 선 센터 후보 11인에게는 화려한 배지가 달린 어깨 견장이 주어졌다. 그리고 센터인 박재봉에게는 투마월 로고가 박힌 세일러 캡이 추가되었다. 완벽한 특별 대우였다.

촬영이 시작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춤추고 끼를 부렸다. 하도 윙크하랴, 미소 지으랴 눈가랑 입가에 경련이 올 지경이었다. 언제 카메라에 잡힐지 모르니 긴장을 놓으면 안 됐다. 엔딩 포즈에서 하도 볼을 잡아당기니 점점 붉은 자국이 늘어났다. 기어코 화장 수정을 해 주는 분에게 핀잔을 듣고 나서는 볼 하트로 수정했다. 제발 앞에서 생고생한 컷들이 잡히길 빌 수밖에-

그렇게 전체 촬영은 끝났고, 센터 단독 컷을 잡는다는 스태프의 공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머리 위로 기사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To My World 시즌 2 안전 불감 의혹, 시작 전부터 적신호?]

X발 이제야 생각났다. 투마월 시즌 2 시그널 송 촬영 중 리프트가 고장 났지만, 무리해서 촬영을 이어 갔다는 기사였다. 그때는 단순히 프로그램 화제성을 위해 제작진이 뿌린 기사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아니나 다를까, 아까 전보다 더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리프트가 올라갔다.

‘제발 별일 없어라…….’

그러나 얼마 안 가 쿵 소리와 함께 리프트가 멈췄다. 순간 중심을 잡지 못한 박재봉이 휘청거리다 발을 헛딛었고, 바로 뒤에서 그쪽만 쳐다보고 있던 나는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으악!”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간발의 차로 몸을 받아 냈다. 그런데, 박재봉의 몸을 감싼 다른 손이 보인다. 누구지?

“괜찮아?”

강도현이었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뜬 박재봉이 나를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더니, 강도현을 보자 파드득 떨어졌다.

“가, 감사합니다!”

“다친 곳은 없고?”

“괜찮은 거 같아요. 놀란 거 빼고는…….”

리프트 높이가 가슴께 정도라서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밑에서 받은 나랑 강도현까지 다칠 뻔했다. 박재봉이 내려오고 나서야 우리 둘도 어색하게 팔을 떼어 냈다. 나야 사고가 터질 걸 알고 있었지만, 얘는 대체 어떻게 받아 낸 거지. 엄청난 순발력이었다.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하고 나서야 장비 점검이 들어갔다. 그대로 떨어졌으면 최소 골절이었다. 더는 서바이벌에 참여할 수도 없었겠지. 설마 이거였나. 원래 과거에서는 센터였던 박재봉이 사고로 서바이벌을 하차하고, 정유현이 센터가 된 거였을까. 그런 거라면 내가 박재봉이라는 연습생을 모를 만도 했다. 아직 연습생 공개 전이니까 묻으려면 충분히 묻을 수 있었겠지. 답을 얻을 수 없는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제작비를 최대한 아끼려는 목적이었겠지만 사람 안전보다 중요할 수는 없는 거였다. 애써 괜찮다고 제작진에게 웃어 보이는 박재봉을 보자니 씁쓸했다. 이 세계에서 연습생은 을 중의 을이니까. 데뷔만 해 봐라. 오늘 이 썰을 최대한 불쌍하게 풀어낼 테다.

그렇게 점검을 마친 후 박재봉의 센터 컷 촬영이 재개됐다. 언제 놀랐냐는 듯 능숙하게 촬영을 이어 가는데, 다시 봐도 대단한 놈이었다.

“컷! 시그널 송 촬영 마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시그널 송 촬영까지 마치니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 피부로 와 닿았다. 이 영상이 공개되면 대한민국은 ‘눈부셔’ 열풍이 불 것이다. 그리고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일들이 펼쳐지겠지. 중심을 잃지 않고, 지운이 형과 데뷔의 꿈을 이루겠다고 다시 한번 굳게 다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