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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8화 (8/346)

8화

뭐라고? 모두가 개천에서 용 나는 꿈을 꾸고 있는데 등급 재조정이 없다고? 투마월 특유의 성장 서사를 버리겠다는 건가? 뭔 개소리야. 하고 다들 화를 내는 와중에 나만 차분했다. 이미 이다음에 발표할 내용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 센터는? 그냥 지금 S등급끼리 하는 거야?”

“불공평하잖아!”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고, 옆에서 김병대가 비아냥거렸다.

“지들이 실력이 없어서 그런 걸-”

누가 쟤한테만 성능 좋은 마이크 하나 달아 주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쩜 입에서 나오는 말마다 주옥같은지.

연습생들의 반응을 의식한 엠시가 진정하라는 제스처를 하며 말을 이어 갔다.

“그 대신! 센터의 기회가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등급 조정도 없는데 이게 무슨 개가 풀 뜯어 먹는 소리인가?’를 순화한 말들이 주변에 난무했다. 전혀 진정되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때 전광판 화면이 바뀌었다.

[등급별 센터 도전 연습생 비율]

“저게 뭐야?”

[S등급 4명

A등급 2명

B등급 2명

C등급 1명

D등급 1명

F등급 1명]

“허…….”

헛웃음이 나왔다. 이걸 악마의 재능이라고 해야 하나. 알고 있는 내용인데도 직접 눈으로 보니까 새삼 대단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입장에서는 진짜 허를 찌르는 구성일 거다.

“모든 등급에서 센터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F등급 연습생도 센터에 지원할 수 있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그리고 다들 좀 진정되니까 이 방식이 노리는 걸 알 수 있었다. 바로 S등급이 딱 5명이라는 것이다. 그중 단 한 명은 S등급임에도 센터에 지원할 수 없다. 그래서 플랜 비로 S등급을 노릴까도 잠깐 고민했었다. 이번 센터 선발전의 메인 서사는 바로 여기서 나올 테니까. 하지만 내가 그 한 명이 될 수도 있었기에 더더욱 안전하게 성장 서사를 선택한 것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김병대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기회를 줘도 쫄리나 보지.

“형, 저도 센터에 도전할 기회가 생겼어요! 완전 포기하고 있었는데…….”

등급 평가 C를 받은 박재봉이 방방 뛰며 말했다.

“모두 각자의 등급에서 최선을 다해 센터에 지원할 수 있길 바랍니다.”

오전에 시작한 녹화가 새벽이 돼서야 끝났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 진이 다 빠졌다. 아이돌이고 뭐고 체력부터 길러야겠다.

모두 챙겨 온 짐을 가지고 숙소로 향했다. 시즌 1부터 시즌 4까지 지겹도록 똑같은 숙소였다. 모니터 너머로 엠시인 윤승철이 나타났다.

[100명의 연습생분들 입소를 환영합니다! 다들 어떤 연습생과 한 방이 될까 기대되시죠?]

“네!”

기대는 개뿔. 김병대 강도현이랑만 안 붙게 하소서.

[룸메이트 선정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지금부터 나이순으로 원하는 방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각 방은 4명 정원이 채워지면 더 입장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한 번 방문을 열면, 번복은 불가능합니다.]

이번 시즌은 아주 그냥 랜덤에 미쳐 버린 게 분명하다. 그래도 다행히 이건 내 기억 속 시즌 2와 같은 방식이기는 했다.

[그럼 지금부터 방 배정을 시작하겠습니다.]

곧 내 차례가 되었다.

“문승빈 연습생, 출발하세요.”

길게 고민하지 않고 처음 생각한 방으로 향했다. 투마월 시즌 2는 처음 하는 남자 시즌이라 그런지 유독 선착순으로 불러내는 게 많았던 거로 기억한다. 그러면 내 선택지야 뻔하지. 무조건 입구에서 가까운 방이다.

그래도 카메라가 찍고 있으니 살짝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고민하는 척 좀 했다. 분량 좀 뽑아 봐야지. 문에다 귀도 갖다 대 보고, 소리 안 나게 뒤꿈치도 들고 살금살금 걸어 보고. 그러다가 결국 입구 쪽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인원이 남았나 보다.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익숙한 목소리에 하마터면 문 닫고 나갈 뻔했다.

“승빈 씨?”

언제 들어도 적응 안 되는 저음. 박선우다.

“안녕… 하세요.”

“이거 완전 우리 베스트 프렌드 된다는 하늘의 뜻 아닐까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해맑게 웃으며 안겨 오는데 두통이 밀려왔다. 엮이지 말아야 할 1순위였는데!

“말 놓으세요. 제가 2살이나 어린데.”

“그럴까요? 아니, 그럴게!”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하지 않다. 분명 차분한데 정신없고, 순한데 사람 기를 쏙 빼놓는다. 이 무슨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사람인가.

“침대는 내가 밑에 쓰고 싶어서 했는데, 괜찮지?”

“뭐, 먼저 온 사람이 임자인 거니까요.”

그리고 이미 본인 인형에 침구에 가습기에 조명에 다 설치해 놓으셨잖아요. 침대 반만 한 크기의 코끼리 인형이라니.

“그럼 나 먼저 씻을게! 짐 정리 잘하고 앞으로 잘 지내자!”

“잘 부탁해요.”

대충 짐을 풀고, 다른 방 상황도 확인할 겸 복도로 향했다. 그리고 문 열자마자 보이는 익숙한 얼굴.

“승빈이 형!”

박재봉이다. 언제 갈아입은 건지 C등급 초록색 옷이었다. 주인 만난 강아지처럼 한시를 가만히 안 있고 쫑알거렸다.

“대박, 우리 옆자리였는데 방도 바로 앞이에요! 형이랑 같은 방 못 돼서 아쉬웠는데… 아, 형은 누구랑 같은 방이에요?”

“박선우 연습생이랑-”

“아, 그 염라대왕 목소리 형이요?”

염라대왕이라니, 어린애다운 발상이었다.

“어, 너는?”

룸메이트를 묻는 말에 잔뜩 시무룩해진다. 표정 변화가 이렇게 다양해서야.

“아니, 저 누구랑 같은 방인 줄 아세요?”

누구기에 저렇게 질색을 하는 건가 했는데, 등 뒤로 강도현이 머리를 말리며 화장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잠깐 눈이 마주쳤지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피했다.

“강도현?”

“네, 저 완전 망했어요. 흐어엉”

“잘 지내 봐,”

“형, 형도 저 형 안 좋아하죠?”

“응?”

박재봉의 표정이 갑자기 비장해졌다. 어라? 얘 주먹까지 꽉 쥐었는데?

“저, 절대로 저 형이랑 안 친해질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 내가 그런 걸 걱정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저 조그만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을까 궁금했는데, 어쩌면 아무것도 없을지도? 뿌듯해하는 저 얼굴은 뭔데.

“진짜예요! 저 완전 결심했다구요!”

늦었으니 들어가 자라고 방으로 밀어 넣었다.

“아이, 형. 아직 11시인데!”

“키 안 큰다. 들어가 자라.”

“아, 제발 저 저 형이랑-”

쾅, 마지막까지 불쌍한 눈을 보자니 호랑이 굴에 토끼 하나 두고 오는 기분이었다. 재봉아, 강한 토깽이가 되어라.

방에 돌아오니 나머지 2명의 연습생이 박선우와 수다를 떨고 있었다. 조용하게 생겨선 역시 인싸 중의 인싸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침대에 누웠다. 이제 좀 잘까 싶었는데, 익숙한 윤승철의 목소리로 안내 방송이 나왔다.

[입소를 마친 100명의 연습생분들, 룸메이트는 마음에 드나요? 하하, 안 들어도 어쩔 수 없죠.]

사람 놀리는 건가?

[문 앞에 연습생 일지를 전달했습니다. 앞으로 마지막 무대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성실하게 기록해 주세요! 그럼 모두 합숙소에서의 첫날 밤 잘 보내시길!]

아, 방송국 놈들 시키는 것도 많아요. 다들 눈이 반쯤 감긴 상태로 일지를 작성했다.

[20**년 *월 *일.

대면식 평가를 마쳤다. 다시 무대에 설 거라고 생각도 못 했는데.

앞으로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형과 꼭 데뷔에 성공할 것이다.]

아, 맞다. 마지막 줄은 급하게 지웠다. 이거 분명 나중에 방송에 몇 개 나갈 건데, 괜히 이상한 소리 할 필요 없지. 앞으로 어떤 일이 나를 기다릴까. 솔직히 말해서 웬만한 사건이 일어나도 이제는 별로 놀랍지도 않을 것 같다.

“다들 잘 자!”

선우 형의 마지막 인사와 함께 소등. 그렇게 합숙소에서의 첫날 밤이 지나갔다.

* * *

[눈부셔 New World

나를 향한 이 시선이 짜릿해

너만의 스타 그게 바로 나야]

합숙소가 떠나가라 시그널 송이 재생되고, 모두 좀비처럼 어기적대며 일어났다. 옆 침대의 연습생은 괴로운 듯 베개로 두 귀를 가리며 몸부림친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된다. 합숙소의 아침은 최고의 예능 요소니까.

“승빈이, 굿모닝!”

“안녕히 주무셨, 뭐 드세요?”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머리 위에 새 둥지를 얹은 선우 형이 볼이 빵빵해져서는 우물거린다.

“젤리인데, 머글랭?”

누가 일어나자마자 세수도 안 하고 젤리를 먹냐고 할 뻔했다. 그냥 머쓱하게 웃으며 거절했다.

“마싯눈뎅.”

손에 봉지를 보니 이미 절반 가까이 먹었다. 근데 저렇게 말랐어? 지겹게 식단 관리 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살이 잘 안 찌는 체질인가. 부럽네. 그나저나 언제쯤 방송이 나오려나.

[모든 연습생은 지금 바로 대강당으로 집합합니다. 주어진 시간은 단 10분입니다.]

“10분?”

나왔다. 예상했던 그대로의 안내 방송이었지만, 잔뜩 당황한 티를 내며 급하게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는 대강당을 향해 정말 ’미친 듯이‘ 뛰었다.

도착하니 절반 가까이 되는 연습생들이 줄 서 있었다. 가까스로 도착한 마지막 연습생을 끝으로 전원 도착한 것이 확인되고 본격적으로 녹화가 시작됐다. 다른 연습생 뒤에 숨어서 챙겨 온 립밤을 발랐다. 아니, 사실은 숨는 척만 하고 대놓고 발랐다. 이 정도면 카메라에 한 컷은 잡히겠지.

“모두 잠 잘 잤어요?”

“네…….”

“느에.”

여기저기서 눈을 비비고, 하품하는 연습생들이 보였다. 머리 위에 까치집이 덜 죽은 연습생도 보였다. 피곤할 만도 하지.

“가장 먼저 도착한 연습생이 누구죠?”

앞줄에 번쩍 든 손이 보인다. 누군가 했더니 박재봉이었다. 녹화 내내 옆에서 졸음 참느라 허벅지 찔러 가던 애가 제일 먼저 나왔다니 의외였다.

“오, 박재봉 연습생! 여기 위로 올라오세요!”

근데 정작 강당 무대 위로 올라온 모습을 보고는 헛웃음이 났다. 고데기로 세팅된 머리에 메이크업까지 완성된 모습이었다. 와, 저런 독기를 가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몇 시에 일어난 거야 도대체?

“오늘 몇 시에 일어났어요?”

“6시에 일어났습니다!”

“와, 머리도 설마 직접 한 거예요?”

“네! 급하게 하느라 사실 뒤에는 쪼끔 삐쳤어요.”

살짝 부끄럽다는 표정까지 더해진 완벽한 답변이었다. 미친 거 아니야?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어제 취침 방송이 12시였고 일지 작성까지 하고 나면 빨라도 1시에 잠들었을 텐데, 6시에 일어나서 저 준비를 다 하고 나왔다는 거잖아.

“이번 기상 미션은 별거 아닌 것처럼 보였겠지만, 아이돌의 덕목인 ’준비성‘을 테스트하기 위한 미션이었습니다. 재봉 연습생에게는 센터 선발전 영상 촬영 순서를 정할 수 있는 베네핏을 주겠습니다.”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먹는다더니, 베네핏이 주어진 걸 미리 말해 줬으면 다들 아예 밤을 새웠을 것이다. 물론, 나는 그걸 알고도 일부러 적당히 나왔다. 처음부터 너무 완벽해 보이면 대중은 거부감을 갖기 마련이었다. 분명 박재봉의 준비성을 좋게 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누군가는 어린애가 영악하다고 생각하겠지. 그보다는 헐레벌떡 뛰쳐나온 연습생을 보며 귀여워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게 분명했다.

“자,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시그널 송 연습이 시작됩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입니다.”

“하루?”

“하루 만에 저걸 해내라고?”

“가능해?”

살인적인 스케줄에 한계를 시험하는 미션이 더해졌다. 가사지가 배부되고 안무 영상이 나온다. 안무 자체가 복잡하진 않지만, 쉴 틈이 없었다. 하지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가.

다른 연습생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이미 이 안무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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