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이걸 왜 너희 둘이-
설마 했지만 역시나였다. 편곡과 한국어 가사로의 번안, 우산을 이용한 안무까지 월말 평가 때 내가 강도현이랑 준비했던 그대로였다. 쟤네 둘이 같이했던 월말 평가 곡도 있었는데, 굳이 이 노래를 선곡한 이유는 뻔했다.
하, 내가 투마월에 참가한다는 걸 얘네는 이미 알고 있었구나.
그리고 김병대는 정확히 월말 평가 연습 때의 나를 카피했다. 강조했던 파트, 지었던 표정, 제스처까지. 언제 내 무대를 저렇게 열심히 지켜봤나 싶을 정도로 완벽한 카피였다.
내가 받은 충격과는 별개로 무대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강도현의 랩은 강렬했고, 재수 없지만 김병대의 보컬 실력도 최상이었다. 그새 표현력도 길러 온 건지 표정 연기도 더 자연스러워진 모습이었다. 아니, 이런데 왜 신인 그룹으로 데뷔하지 않고 여기에 나온 거냐고. 지옥과도 같던 시간이 드디어 끝났고, 귀가 아플 정도의 박수 소리가 세트장을 가득 채웠다.
”제가 먼저 할게요.“
”아뇨, 이번에는 제가!“
”유진 씨, 이렇게 흥분한 모습 처음 보는데요?“
심사 위원들이 너 나 할 거 없이 마이크를 잡았다. 무대를 보고 벅차오르는 심정을 얼른 뱉어 내야겠다는 의지가 가득해 보였다.
”역시 VM이네요.“
”둘이서 했는데, 무대가 가득 차 보였어요.“
”왜 둘이 같은 팀이었는지 알겠네요. 완벽한 합이었습니다.“
그 어떤 극찬보다도 마지막 서재인 트레이너의 한마디가 내 심장을 찔렀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저건 내 무대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김병대가 아무리 잘했어도 월말 평가 리허설 때의 나보다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카메라가 눈에 들어왔다. 입 안 여린 살을 꾹 깨물었지만, 겉으로는 웃으면서 손뼉을 쳤다. 연기력이 이럴 때도 도움이 되네. 어딘가 터졌는지 입 안에 비릿한 맛이 감돌았다.
둘은 모두가 예상한 대로 S등급을 받았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상태창 속 각 포인트가 더 올라 있는 강도현과 김병대를 보며 내심 부러운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과거 연습생 시절, 이 둘에게 가진 자격지심이 컸다. 특히 김병대는 같은 포지션을 두고 경쟁했고, 나는 그 경쟁에서 밀려나 데뷔조에서 탈락했으니까.
첫 라운드는 완벽한 나의 패배였다. 둘의 무대가 끝나고 잠시 휴식 시간이 생겼다. 무대를 보다가 흥분한 영빈이 마이크에 물을 흘려서 전체 오디오를 조정하게 된 것이다. 둘이 자리로 돌아오는 모습을 씁쓸하게 보고 있는데, 김병대가 아닌 강도현이 올라온다. 뭐야, 저 새끼?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천연덕스럽게 옆자리에 앉는 것이다. 둘이 지금 뭐 하는 거야. 나 가지고 뭐, 폭탄 돌리기 그런 거 하는 거냐? 아, 꼴 받네? 이쯤 되니 나도 짜증 나서 그쪽으로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덕분에 박재봉만 신났다. 강도현과 말 섞지 않으려고 일부러 박재봉과의 대화를 끊지 않았으니까.
한참을 조잘대던 박재봉이 갑자기 이제 곧 자기 차례라며 말을 멈췄다. 누가 봐도 티 나게 뚝딱이면서. 뭔가 싶어 뒤를 보니 강도현이 뚫어져라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 전 동공 지진은 호랑이 앞 토끼의 그것이었구나-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뭐, 그냥저냥 지냈지.”
“부럽네.”
“뭐가?”
“넌 참 속 편해 보여서.”
얘 왜 이래? 잠수 탄 건 내 잘못이었지만, 어차피 잘린 애랑 곧 데뷔할 애는 자연스럽게 멀어질 거였다. 과거의 우리가 그랬듯.
“무대 잘 봤다. 잘하더라.”
“애초에 김병대랑 준비할 걸 그랬나 봐. 네가 이렇게 깽판 치는 데 특기가 있는지 몰랐잖아.”
이건 또 뭔 소리야. 아무리 내가 월말 평가를 연습보다 못했다지만, 깽판이라고 말할 수준은 아니었다.
“깽판이라니? 지금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오해? 뻔뻔함도 정도가 있지. 네가 깽판 쳐서 데뷔조 다 개판 났잖아.”
깽판과 데뷔조 개판? 애써 이해해 보려고 해도, 도저히 연관 관계를 찾을 수 없는 조합이었다.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거냐, 아님 얼굴에 철판 깐 거냐?”
아니, 데뷔곡 녹음해도 무산되는 게 비일비재한데, 갑자기 내 탓이다? 스펙터클한 4년을 보냈던 내 입장에서는 그냥 어린애 투정이었다.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한 모양인데, 혼자 비련의 주인공인 것처럼 구니 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맘대로 생각해.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니까.”
“하, 어차피 네가 변명해도 안 믿을 생각이었어. 애초에 믿음을 저버린 건 너니까.”
묘하게 핀트가 나간 대화였기에, 얘나 나나 더 무슨 말을 해도 서로 안 들어먹을 걸 알았다. 강도현이 먼저 등을 돌렸고, 이에 질세라 나도 등 돌려 무심결에 박재봉에게 말을 걸었다.
“헐, 대박. 형이 먼저 말 걸었다.”
안 그래도 눈도 큰 놈이 토끼 눈을 하고 좋아한다.
하, 피곤해지겠다.
* * *
“슬레이트 치고 녹화 재개할게요. 하나, 둘, 셋!”
경쾌한 슬레이트 소리와 함께 다음 팀의 평가 무대가 시작됐다. 드디어 지운이 형 차례다.
“개인 연습생 C조. 차지운, 김영원, 이장훈, 김세하, 박수현 연습생 무대 준비해 주세요.”
형의 4년 전 모습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아직 젖살이 남아 있었지만 날카로운 눈매는 여전했다. 아니, 이쪽이 과거이니 여전하다는 표현은 좀 아닌가. 살아 움직이는 형을 보니, 울컥할 뻔한 걸 겨우 참아 냈다.
근데 아무래도 이미지가 비슷한 연습생들끼리 묶어 놔서 그런가, 풍기는 분위기가 남달랐다. 불안하게도 죄다 자유분방한 느낌 가득한 헤메코에 서 있는 자세부터… 힙찔이의 향기가 가득했다.
아니나 다를까, 단체 인사를 하는데 합장하는 새끼가 속출했다. 정석 90도 인사는 지운이 형뿐이었다. 차라리 다행인 걸까. 저 중에서 군계일학이라면 오히려 이득일 테니까.
“개성 강한 연습생들이 모여 있는 조네요. 하하…….”
하지만 노래가 시작되고 탄식했다. 가사가 죄다 돈, 자유, 여자, 헤이터들에 대한 분노뿐이었다. 아니, 자기들이 데뷔를 하길 했어, 뭘 했어. 벌써 자기한테 헤이터가 있을 거라는 저 자신감을 어쩌면 좋을까. 거기에다가 아이돌에게 금기시되는 단어인 자유와 여자?
[손 하나 까딱하면 넘어오는 게
돈, 명예, 그리고 네 옆에 그 여자!]
돌았나?
그나마 지운 형은 파트 자체가 적어서 다행이었다. 율동에 가까운 안무였지만 워낙 춤을 잘 추는 형이라 그것도 나름 괜찮게 보였다.
“C그룹 평가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선뜻 먼저 심사를 시작하지 못했다. 심사하기 어려운 무대였으니까. 정적을 깬 건 영빈 프로듀서였다.
“저는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여러분 지금 아이돌 하러 나온 거예요, 힙합 하러 나온 거예요?”
제발 정신 제대로 박힌 놈이 대답해라, 제발…….
그때 벙거지를 푹 눌러쓴 연습생이 답했다. 그리고 나는 절망했다.
“저는 아티스트가 될 건데요.”
그럼 쇼캐(쇼미유어캐시)를 나가야지, 새끼야. 아티스트라니, 아이돌 팬들이 제일 극혐하는 아티스트병 걸린 모습을 보여 주다니. 벌써 온갖 커뮤와 SNS에 올라올 조롱이 눈앞에 둥둥 떠다녔다.
아니나 다를까.
“그럼 왜 아이돌 뽑는 서바이벌 나왔어요? 이거 다음 녹화가 쇼캐인데, 거기 나가면 마음껏 꿈을 펼칠 거 같은데. 아닌가?”
직설적이기로 유명한 사람인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특히나 아이돌 래퍼라는 이미지 때문에 평가 절하당했고, 더 독기 있게 올라온 사람이니 말 다 했지.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고 했죠? 근데 그 실력으로 아티스트? 우리는 그걸 자의식 과잉이라고 해요. 박자, 플로우, 가사, 라임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는 무대인데 아이돌에 대한 열정까지 없다? 애초에 여기 나오면 안 됐죠.”
“저도 영빈 프로듀서님같이-”
“저도 아직 저 스스로 아티스트라고 안 해요.”
내가 저 연습생이었으면 영빈 프로듀서에게 병원비 청구할 거다. 저 정도로 처맞으면 최소 전치 4주 각이다.
“저는 여러분이 아이돌이라는 직업을 단순히 인기 얻고 돈 많이 버는 거로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개나 소나 아이돌? 할 수 있죠. 그렇지만 연예계에서 가장 살아남기 힘든 직업입니다. 저도 매일 쏟아지는 아이돌 팀 사이에서 살아남으려고 정말 아등바등 살았고요.”
긴 녹화 시간에 점점 풀어지던 연습생들의 기강을 잡는 말이었다. 어쩌면 여기 나온 100명도 천운으로 선택된 사람들이었다. 시작부터 전 국민적 관심을 받는 거니까. 다른 소속사에서 데뷔한다면 상상도 못 할 푸시를 받으며 출발선에 선 것이다.
“하고 싶은 거 하는 거? 물론 좋죠. 하지만 여러분, 이 프로그램은 대한민국 최고의 아이돌을 뽑기 위한 서바이벌입니다. 꿈에 대한 확신 없이 들어왔다면 차라리 하루빨리 발 빼시길 바라요. 이건 장훈 연습생을 비난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에요. 이 산업에 오랫동안 몸담았던 사람이 주는 현실적인 조언이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습니다.”
아티스트가 되겠다던 이장훈 연습생은 금방이라도 울 거 같은 눈이었다. 하지만 표현은 강했어도 전부 맞는 말이었다. 저 말을 듣고 단순히 쓰다고 뱉는다면 여기까지인 거고, 정면 승부 한다면 더 성장하겠지.
“저는 개인적으로 한 번 더 보고 싶은 참가자가 있어요.”
녹화 내내 유독 조용했던 최성재 안무가였다.
“차지운 연습생? 잠깐 보니까 춤 선도 예쁘고, 춤을 원래 췄던 사람 같은데.”
“네, 잠시 댄스 크루에서 활동했습니다.”
“혹시 프리스타일 가능할까요?”
망설이지 마라, 제발.
“네, 가능합니다.”
다시 기회가 생긴 건 다행이지만 여기서 제대로 보여 주지 못하면 더 역풍을 맞을 수 있다. 부디 형이 제 기량을 발휘하길 진심으로 기도했다. 난 무교인데 말이지.
“노래 주세요.”
다행히도 랜덤으로 흘러나온 곡은 강렬한 힙합이었다. 형이 평소 추는 춤과도 어울리는 노래였다. 형도 침착하게 노래에 맞춰 프리스타일로 무대를 이어 갔다. 연습생들의 탄성 소리가 여기저기 가득했다. 모니터로 보이는 트레이너들의 표정도 밝았다. 다행이다.
“네, 여기까지 볼게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온 힘을 다해 춤을 췄다는 걸 얼굴 가득 흐른 땀이 증명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자세를 고쳐 섰다. 마이크를 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스무 살의 차지운은 꽤 귀엽네. 이제야 좀 긴장이 풀려서 이런 감상도 가능해졌다.
“춤 잘 추네요. 기본기도 탄탄하고 박자감도 좋고-”
“감사합니다!”
됐다. 이 정도면 힙찔이 무대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충분하다. 더 힘차게 박수 쳤다.
“등급 결과 발표하겠습니다. S등급… 없습니다.”
예상했기에 놀랍지 않았다. 무난하게 B 정도 받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B등급… 없습니다.”
그럼?
“C등급, 차지운 연습생.”
춤 실력은 입증이 됐지만 아무래도 랩, 보컬 부분에선 큰 임팩트를 주지 못해서일까. 그래도 나머지 멤버가 전부 D, F를 받은 상황이라 나름의 선방이었다.
“다음 무대에서는 랩 실력을 조금 더 보여 줬으면 좋겠어요.”
“네,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평가 무대를 모두 마치고, 윤승철이 무대 중앙으로 걸어왔다. 피곤함에 눈이 절로 감길 지경이었다.
“다들 수고 많았습니다. 그런데 아직 가장 중요한 게 남았죠?”
“네!”
“이번 시즌 시그널 송을 지금 공개합니다!”
전광판에 시그널 송 제목이 떴다.
[눈부셔(New World)]
시즌 1 ‘빠졌어’와 같이 세 글자로 된 제목. 노래는 ‘눈부셔’를 반복하며 처음 들었을 땐 약간 유치하지만, 자꾸만 입에서 ‘눈부셔’를 따라 부르게 하는 중독성 강한 곡이었다.
[눈부셔 New World
나를 향한 이 시선이 짜릿해
너만의 스타 그게 바로 나야
오직 너를 위해 노래할게
새로운 나의 세상으로
눈부셔 New World]
“이번 시즌의 시그널 송, 눈부셔. 어떠셨나요?”
“좋아요!”
“와아~”
시그널 송이 나왔으니 본격적인 센터 경쟁이 시작되겠군.
”그리고 하나 더 여러분들에게 공지할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엠시가 뜻밖의 선언을 했다.
“이번 시즌에는 등급 재조정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