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씨X, 이건 예상도 못 한 변수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분명 투마월 시즌 2에는 VM이 참가를 안 했는데? 그리고 쟤네는 이미 데뷔를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거잖아. 서바이벌 나올 시간이 어디 있냐고!
사실 그건 알 바 아니고, 일단 내가 제일 문제였다. 이렇게 된다면 나와 저 둘을 비교하는 얘기가 분명 나올 거고, 잘못하다간 어그로용으로만 쓰이다가 떨궈질 수도 있었다.
심지어 남은 두 자리 중 하나가 내 옆자리다. 어차피 둘 중 하나는 앉아야 하는데 둘 다 서로 떠넘기고 있었다. 멍청한 놈들아, 그냥 아무나 대충 와서 앉으라고! 하, 시작부터 불화설 껴안고 싶은 거냐고.
그래도 내심 강도현이 앉기를 바랐다. 하지만 성큼성큼 올라오는 김병대에 실망감이 차올랐다. 근데 얘는 왜 이렇게 살의가 가득한 눈이고, 강도현 역시 원망 섞인 눈인 거지. 얘네 설마 나 여기 나오는 걸 알고 있었나?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들 만큼 멘붕 그 자체였다.
“형.”
“카메라 돌아간다. 이따 얘기해, 일단 앉아.”
하여간 어린 티를 이렇게 내지. 쿵쿵대며 올라오던 김병대도 아차 싶었는지 금세 표정을 풀고 자리에 앉았다. 옆에 앉은 박재봉은 또 쫑알거린다.
“와, 형. 완전 포스 있네요.”
“앞에 봐라.”
“넵.”
또다시 전광판이 바뀌고, 커다랗게 글씨가 올라왔다.
[MC] 배우 윤승철
역시 대세 배우들로 엠시를 구성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프로그램이다. 윤승철은 4년 전 당시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 남자 주인공으로 단숨에 대세 배우 타이틀을 거머쥔 사람이었다. 한동안 나도 제2의 윤승철 소리 좀 들었으니 말이다.
“이곳에는 여러분을 자기 세상으로 이끌 100명의 연습생이 있습니다.”
“지금, 당신의 별은 누구인가요?”
“그리고 이제, 당신의 별은 누가 될까요?”
문이 열리고 윤승철이 무대 한가운데로 걸어 나온다. 스태프들의 신호와 함께 모든 연습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To My World 시즌 2, 지금 시작합니다!”
비장한 음악과 함께 엠시가 인사하는 타이밍에 맞춰 100명의 연습생이 일제히 인사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어디 한번 가 보자고.
* * *
오프닝 영상 촬영 후, 본격적으로 대면식 평가가 시작되었다. 소속사별로 평가가 이뤄지고 나를 포함한 개인연습생들은 총 3팀으로 나뉘어서 평가를 보게 되었다.
인기 서바이벌의 명성에 걸맞게 트레이너 구성도 쟁쟁했다. 1군 아이돌의 안무란 안무는 다 만든 최성재 안무가, 노래 경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얼굴을 알린 김유진 보컬 트레이너, 음원 순위를 점령한 가수 서재인, 아이돌 래퍼 출신이자 프로듀서인 영빈까지.
모두 날카로운 심사평으로 연습생들의 멘탈을 흔들었다. 각기 다른 스타일로 조졌다 이거다.
“지금 보여 준 무대가 본인이 생각하기에 최고였다고 생각해요?”
“최선을 다했습니다!”
“최선을 보자고 나온 거 아니잖아요. 더 준비한 무대 없나요?”
“저…….”
“없다는 거죠? 알겠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박재봉은 겁먹은 목소리로 양팔을 연신 문질렀다.
“대박, 완전 깐깐한데요?”
옆자리 김병대는 가사를 외우는지 뭐라는 건지 내내 중얼거리는데 산만해서 집중이 안 됐다.
“MJ 엔터테인먼트 등급 결과 발표하겠습니다. S… 없습니다.”
이후는 똑같았다. A, B, C도 없고 무더기로 D, F. 폭격기가 따로 없었다. 지금까지 나온 최고 등급이 B인 거 보면 작정하고 로열 S를 만들 생각이구나.
“다음은… 개인 연습생 B팀. 무대 준비해 주세요.”
드디어 올 게 왔다.
“형! 잘하고 와요!”
박재봉의 응원에 긴장이 조금 풀렸다.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는 김병대의 따가운 시선을 뒤로 하고 무대에 올랐다.
“안녕하세요. 개인 연습생 B팀 문승빈, 김재영, 이석철, 박정호, 윤성진입니다!”
“준비되셨으면 스탠바이하고, 음악 재생해 주세요.”
지난 일을 후회하지 말고 내일을 살자는 힘찬 메시지를 담은 리드미컬한 팝송이 흘러나왔다. 적당히 격하면서도 후반부에 고음 파트가 있어서 보컬 역량을 보여 주기엔 제격인 노래였다.
노래 선정에도 머리 꽤나 썼다. 다행히 모두 개인 연습생이라 나를 제외하고는 전문적인 트레이닝을 받은 적이 없는 연습생들이었다. 고로, 내 의견에 크게 태클을 걸 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 팝송으로 하는 건 어때요? 기존 아이돌 곡을 하면 아무래도 비교당할 가능성이 높아서.”
“그러네요?”
“전 좋아요!”
“그럼 이 가수 어때요? 요즘 히트곡 제일 많이 내는 팝 가수인데.”
“저 이 가수 완전 좋아해요!”
팝송으로 하자는 것부터 가수까지. 내가 원하는 대로, 아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노래는… 이걸로 할까요?”
그리고 이쯤에서 변화구 한번 던져야지. 노래는 일부러 내가 생각 중인 것과 다른 곡을 던졌다. 이 가수의 대표곡도 아니었고 살짝 마이너한 노래였다. 이러면 자연스럽게 반응이 오겠지.
“근데 이건 너무 대중성이 떨어지지 않을까요?”
“맞아요. 사실 저는 이 노래 잘 몰라요.”
“조금 더 유명한 노래를 하는 게 나을 거 같아요.”
잘한다. 조금 더 어필해 봐.
“아, 그런가요?”
“네, 그리고 이 곡이 안무 짤 때 더 편할 거 같아요.”
예스. 역시나 내가 생각했던 곡이 나왔다. 저 연습생의 말에 나머지 연습생도 슬슬 설득되는 듯했다. 그럼 이때 나도 슬쩍 올라타는 거다.
“듣고 보니 그런 거 같네요. 와, 안무 창작 잘 하시나 봐요? 이런 것도 바로 캐치하시고-”
마치 그 연습생의 아이디어가 좋아서 내 의견을 포기한 것처럼 흘러갔다. 바라던 바였다. 끊임없이 다른 연습생들을 칭찬하면서, 결국 내가 원하는 노래가 되도록 유도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파트 분배를 하면서도 일부러 모두가 노리는 킬링 파트나 끼 부릴 만한 파트는 맡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팀 내 별명이 ‘양보의 아이콘’이 되어 버려 민망할 정도였다. 대신 고음 셔틀 하나만 노렸다.
이 노래는 고음 파트가 많지만, 전부 메인 멜로디가 아니어서 고음을 하면서도 센터에 설 수 없는 구도였다. 솔직히 말하면 고음은 고음대로 뽑아내는데 스포트라이트는 못 받는, 죽 쒀서 개 주는 꼴이 되어 버린다는 거다. 그러니 내가 애써 경쟁할 필요도 없이 고음 파트를 맡을 수 있었다.
그렇게 준비한 나의 첫 서바이벌 무대는 금세 끝을 향해 달려갔다. 오랜만에 많은 사람 앞에 선 탓일까,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이런 거라면 백번도 더 할 수 있었다. 준비했던 고음은 실수 없이 마쳤고, 무대 완성도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단 한 순간도 카메라를 놓치지 않았다.
[어제는 잊었어
새로운 내일을 향해!]
무대를 마치고 세트장 가득 연습생들의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긴장이 풀리면서 다리 힘이 빠졌다. 호흡을 채 가다듬기도 전에 트레이너들의 평가가 시작되었다.
“무대 잘 봤어요. 개인 연습생들인데 지금까지 무대 중 가장 프로 같았어요.”
“맞아요. 특히 문… 승빈 군?”
“네.”
“이 노래 최고음이 어떻게 되죠?”
“3옥타브 도입니다.”
“3옥타브 도를 춤추면서 이 정도 해낸 거면 와…….”
칭찬을 받으면서도 조금 불안했다. 아씨, 너무 띄워 주면 안 되는데. 그때 옆에 앉은 서재인 트레이너가 마이크를 들었다.
“신기하네요. 승빈 군, 한 번도 센터 파트 한 적 없죠?”
“네, 그렇습니다.”
“근데 눈이 자꾸 승빈 군한테 가요.”
나이스, 전략이 제대로 먹혔다. 이 노래를 고르도록 유도한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원곡을 음원으로만 듣는다면 고음 파트는 메인 멜로디를 받쳐 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이 노래를 알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 메인 멜로디에만 익숙할 거다. 하지만 대면 평가는 전부 라이브로 진행된다. 잔잔한 멜로디 라인보다는 쉴 새 없이 치고 나오는 고음 파트가 당연히 눈에 띌 수밖에.
게다가 다들 개인 연습생인지라 밸런스가 좋지 못했다. 그래서 일부러 무대 구성도 다 같이 노래 부를 때만 단체 안무를 넣었다. 메인 멜로디를 부르는 연습생은 센터에 서서 거의 손동작 정도의 안무만 하면서 노래에 집중하고, 중간에 댄스 브레이크를 넣어서 춤을 잘 추는 연습생을 센터로 세웠다.
그냥 보면 모두의 장점을 잘 보여 줄 수 있는 구성이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것만 보이는 거였다. 노래 잘하는 애는 그냥 노래만, 춤 잘 추는 애는 춤만.
그런 상황에서 단체 군무를 추면서도 고음을 찍어 내는 내가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예상한 대로 흘러가는 분위기가 마냥 짜릿했다. 이제 다음 단계다. 어떤 트레이너가 말을 꺼내려나?
“무대 구성이나 곡 선정 같은 건 누가 주도했어요?”
“승빈이 형이 많이 했습니다.”
“문승빈 연습생이…….”
역시 나왔다. 다들 그렇게 반응해 준다면, 나도 아주 정석의 답변을 해 드려야지.
“모두가 같이 했습니다.”
그러자 서재인 트레이너가 고개를 갸웃한다. 뭐지? 잘못 말한 건 없었는데.
“승빈 군만 모두가 같이 했다고 하네요? 너무 겸손 부리는 거 아닌가?”
아뿔싸, 서바이벌에서 지나친 겸손은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간과했다. 이런 부분까지 걸고 넘어갈 사람은 드문데 잘못 걸렸다. 하지만 망돌 2년, 인기 배우 2년. 4년이라는 길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바닥과 탑을 모두 찍어 본 나에게 있어 임기응변은 기본값이었다.
“아닙니다. 정말 모두가 함께 해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목소리를 높이고,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누가 들어도 진심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사실 모두가 1인분씩은 한 무대였기 때문에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럼 각자 어떤 역할을 했는데요?”
오, 생각보다 더 집요했다. 앞으로 서재인 트레이너 앞에서는 말과 행동에 더 주의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먼저 윤성진 연습생이 이 곡을 추천해 준 덕분에 수월하게 곡을 선정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김재영 연습생은 안무 창작이 가능한 연습생입니다. 그래서 저와 함께 군무를 짜고, 댄스 브레이크 안무를 담당했습니다.”
우선 다른 연습생이 이 곡을 추천했다는 것을 가장 먼저 언급했다. 혹시나 또 나한테 유리한 노래로 정한 거 아니냐는 반응을 사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이석철 연습생은 중간에 랩 메이킹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박정호 연습생은 편곡 아이디어를 제공했습니다.”
“각자의 장점을 모두 활용했기에 가능한 무대였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하게 언급했지만, 결국 내가 다른 애들의 장점까지 돋보이게 구성을 짰다는 게 은연중에 드러나도록 했다.
“재밌네요. 정말 말한 그대로 각 연습생이 포지션마다 돋보였어요.”
“하지만 정작 문승빈 연습생의 파트가 적어서 좀 아쉬웠는데, 혹시 한국어 노래도 한번 들어 볼 수 있을까요?”
“네, 가능합니다!”
오케이, 분명 한 곡 더 시킬 줄 알고 준비한 노래가 있었다. 침착하게 호흡을 가다듬고 첫 소절을 내뱉었다.
[눈을 감아 떠올린 너의 얼굴
말갛게 웃어 보이던 그날의 너
그 계절에 멈춘 듯해]
하지만 한마디를 다 부르지도 못하고.
쿵!
서재인 트레이너의 마이크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