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4화 (4/346)

4화

“아니, 윤 피디님이 웬일로 먼저 연락을 다 주시고?”

“거두절미하고. 문승빈이라는 애, VM소속 연습생이었어요?”

‘문승빈’ 이름이 들리자 이 실장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었다. 딱히 엮이고 싶지 않은 인간 입에서 나오니 더욱 껄끄러운 이름이었다.

“맞긴 한데, 이미 나갔어.”

“걔, 이번에 투마월 시즌 2에 나오는 거 알고 있었어요?”

“뭐?”

“투마월 나오겠다고 VM 연습생 그만뒀다고 하는데, 우리 입장에서는 너무 재밌는 소재라…….”

“그 새ㄲ… 아니, 문승빈이 그렇게 말하고 다녔다고?”

“뭐, 저는 지원서에 적힌 대로 읽어 드린 겁니다.”

이 실장은 3년 동안 자신이 호랑이 새끼를 키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멍청한 놈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치다니. 어쩐지 같이 잘린 다른 연습생들이 울고불고 난리 칠 때 혼자 덤덤한 게 의아했지만, 이제야 주제 파악한 줄 알았다.

“그래서 제안을 하려고 하는데요.”

“제안?”

“VM에서도 두 명 정도 내보내시죠.“

“내보내면 우리 쪽에선 뭘 얻을 수 있지?”

“확실하게 비교하는 쪽으로 편집해 드릴게요. 어차피 인지도도 높일 겸,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 거 같은데.”

“…안 내보낸다면?”

“그럼 문승빈 덕분에 방송 내내 VM 이름 거론되는 거죠, 뭐. 좋은 쪽보다는… 대충 감은 오시죠?”

이 실장은 고민에 빠졌다. 윤 피디는 잘못 엮이면 골치 아픈 사람이었다. 이전에도 악편으로 출연진의 연예계 생활을 좌지우지했는데, 투마월 시즌 1의 성공으로 힘이 더 막강해졌을 게 뻔했다.

“알겠어. 대신 누구 내보낼지 고민할 시간은 줘.”

“다다음 주가 첫 녹화입니다. 이번 주 중으로는 연락 주세요.”

전화를 끊자마자 이 실장은 강도현과 김병대를 호출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둘 다 경계심 가득한 얼굴이었다. 오늘 데뷔조 확정이 나도, 내일 해산되는 것이 허다한 판이었다.

“문승빈이 투마월 시즌 2에 나온다더라.”

“네?”

“뭐라고요?”

강도현은 혼란스러움과 동시에 분노가 올라왔다. 그렇게 열심히 연습해 놓고 실전에서 변화 없는 모습이 안타까웠는데, 이게 전부 투마월에 나오기 위한 빌드업이었다고?

“VM 출신인 걸 무기로 나오는 거 같더라고. 애가 생각보다 영악하더라?”

“와…….”

“걔가 투마월 나와서 너희랑 VM 이름 팔면 데뷔 전부터 이미지 나빠지는 거 정도는 예상되지?”

“…네.”

“그래서, 너희 둘 투마월에 참가시킬 생각이야.”

“그럼 데뷔조는요?”

“어차피 너희 최종 데뷔조 선정 서바이벌 찍을 예정이었어. 이미 다 정하고 짜고 치는 판이긴 하지만. 그거 대신 이거 나간다고 생각해. 서바이벌 끝나고 나와도 크게 문제 되진 않아. 혹시라도 데뷔하면 일정 기간 채우고 합류해도 되는 거고.”

“알겠습니다.”

실장실을 나온 김병대의 눈에는 문승빈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다. 짜고 치는 사내 데뷔조 서바이벌과 투마월은 차원이 다른 얘기였다. 강도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무슨 사정이 있겠거니 하며 애써 좋게 생각했는데, 뒤통수를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형, 이왕 이렇게 된 거 그 새끼 제대로 엿 먹이자.”

강도현은 복잡한 마음에 대답 없이 연습실을 향했다.

* * *

전략이 제대로 먹혔다. 허접한 퀄리티의 영상이었음에도 씨넷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문승빈 연습생, 다음 주 화요일 씨넷 방송국에서 면접 가능할까요?”

그다음부터는 막힘없이 진행됐다. 결과는 당연히 출연 확정. 이제 대면식 평가 준비만 하면 됐다. 개인연습생으로 참가하는지라 솔로와 단체 중 선택이 가능했는데, 혼자 하는 것보다는 다른 개인 연습생들과 팀을 꾸리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내 계획은 일단 대면식은 무난하게. 너무 실력자로 보이지도 않고, 뚝딱이도 아니게. 어차피 VM 전 연습생이라는 타이틀만으로도 통편집은 당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 너무 잘해 봤자 기대감만 높아지고, 이후에 실수라도 하면 이미지 떨어지는 건 한순간이다. 실력은 어느 정도 있지만, 아직 성장 가능성이 많은 연습생. 그게 내가 노리는 이미지였다.

방송국에서 정해 준 우리 조 개인 연습생들의 실력은 고만고만했다. 상태창을 보니 대부분 C, D 사이에 있는 연습생들이었다. 노래는 무난하게 어느 정도 리드미컬한 팝송을 선곡했다. 그리고 다른 비장의 무기를 준비했다. 그렇게 죽어라 연습하면서 녹화 날만 기다렸다.

그리고 대망의 첫 녹화 날. 대기실에 들어가자마자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머리색 때문이겠지. 어떻게 하면 시청자들 기억에 남을까 고민하던 중, 머리를 염색하기로 했다. 어떤 색을 할까 고민하다가 흔하지도 않으면서 너무 이질적이지 않은, 백발을 선택했다. 금발, 빨강, 파랑은 많이 봤어도 백발은 확실히 희소성이 있으니까. 대기실 모니터를 통해 세트장이 송출되고 있었고, 다른 연습생들이 모이는 모습을 지켜봤다. 다행히도 겹치는 머리색은 없었다.

아무래도 VM 전 연습생으로 분량을 채우려는지 내 촬영 순번은 뒤쪽에 있었다.

“문승빈 연습생, 이제 곧 들어갈 거예요. 준비하세요.”

“네.”

심호흡 한번 하고. 쫄지 말자. 촬영장에 들어가니 역시나 전광판으로 어그로를 끈다.

[VM]

VM 엔터테인먼트가 뜨자 연습생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VM? 반칙 아니야?”

“거기 신인 낸다고 하지 않았어?”

“아, 양민 학살 아니냐고.”

그리고 VM 앞에 붙는 ‘전’에 어떤 연습생은 그럴 줄 알았다며 야유했고, 어떤 연습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세트장으로 걸어가자 모두 인사는 하지만 경계심 가득한 눈이었다. 일단 인상 좋게 웃어 보이고 한 명씩 인사하며 마땅한 자리를 찾았다. 40등. 지난 시즌 1위가 앉았던 자리다. 분명 제작진들이 이 번호에 의미를 부여하는 편집을 할 텐데, 그때 한 번 더 얼굴을 비출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주변에 앉은 연습생에게 가볍게 말을 건넸지만 다들 얼어 있었다. 초반이니까, 뭐.

이어서 남은 소속사 연습생들이 들어왔고, 자리가 거의 다 채워졌다. 왜 이렇게 안 나오나 할 때쯤, 지운이 형도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자리를 옮길까 했지만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다가가기로 했다. 옆자리엔 박재봉이라는 특이한 이름의 연습생이 앉았는데, 궁금해하는 게 너무 많아 살짝 귀찮을 지경이었다.

“몇 살이세요?”

“18살입니다.”

“우와! 저보다 2살 형이네요?”

역시 어리다. 이렇게 어리고 잘생긴 애들이 널렸으니 VM에서 18살이 최고참 소리 들을 만했지.

“와, 대박. 머리 몇 번 탈색했어요?”

“머리?”

“네! 이 정도 백발이 나올 정도면 머리 진짜 아팠겠다.”

금세 감정 동기화돼서는 자기가 탈색 과정을 겪은 양 눈썹을 찡그린다. 백발을 향한 여정은 정말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게 얘 말처럼 아파서는 아니었고, 너무 오래 걸리고 지루해서. 다행히도 나는 머릿결 하나만큼은 제대로 타고난 사람이었다. 탈색 두 번만 해도 금발이 나오는 축복받은 머리. 그래도 백발은 세 번 넘게 빼야 하더라고.

“저 처음으로 염색했을 때 탈색 겨우 2번인가? 했었는데 그때도 엄청 아팠거든요! 막 두피에서 피 나는 거 같고… 핑크 머리 해 보고 싶었는데 완전 포기했잖아요.”

아, 앞으로 귀 아플 일이 많아질 거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근데 형, 백발 엄청 잘 어울려요! 백발 잘 어울리기 힘든데.”

그래도 아이돌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놈인 거 같다. 맞는 말이다. 백발이 잘 어울리기는 쉽지 않다. 내가 만약 아이돌에 처음 도전하는 연습생이었다면, 분명 백발은 제외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아이돌 생활을 해 본 적이 있었고, 심지어 망돌이었다. 그 말인즉슨 온갖 실험적인 머리색을 다 해 봤다는 거다.

티벡스로 활동한 거는 2년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동안 머리를 8번 바꿨다. 대표인지 사장인지가 헤어 숍 하다가 기획사를 차렸다 그랬나. 그래서인지 다른 건 하나도 지원을 안 해 주면서 유독 머리에는 집착 수준이었다. 탈색해 놓은 거 아깝다면서 탈색모에 핑크며 보라며 온갖 머리색을 다 입혔었다.

아이돌의 기본은 화려한 머리색이라는 그럴싸한 말을 달고 살았지만, 그걸 말하는 대표의 머리색이 더 휘황찬란했기에 그다지 신뢰감이 들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 덕분에 망돌 중의 망돌인 티벡스 시절에도 소소하게 이슈가 된 활동이 있었는데, 바로 백발을 했을 때였다. 당시 유행하던 인외 존재 콘셉 시류에 탑승한다며 되지도 않는 뱀파이어 콘셉으로 활동한 적이 있었다. 이미 여름 활동을 염두로 청량한 타이틀곡 작업을 다 마치고 안무까지 완성했지만, 갑작스러운 대표의 한마디에 모두 뒤엎어졌다. 그런데 새로운 노래 가져올 돈은 없다고 그냥 콘셉만 뱀파이어로 하자고 했던 거다.

나름대로 스타일링은 꽤 괜찮았다. 백발에 컬러 렌즈, 그리고 버건디 메이크업까지. 한동안 SNS 아이돌 이슈 채널에 올라오고 ‘하얀 머리 걔’로 불렸었다. 하지만, ‘하얀 머리 걔로 입덕 문 열고, 무대 보고 회전문 돌아 나간다.’는 말과 함께 유입은 바닷가 모래처럼 빠져나갔다. 안 그래도 더워 죽겠는 한여름에 눈 시뻘겋게 칠하고 나온 남자애들 보고 싶겠냐고. 다시 생각해도 황당한 조합이었다.

그때는 짧게 지나간 관심이 허망하기만 했는데, 이렇게라도 도움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사실 내 얼굴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잘 기억나는 얼굴이 아니라는 거였다. 이렇게 말하면 단점으로 들릴 텐데, 객관적으로 나는 잘생긴 편이었다. 뻔뻔하다면 어쩔 수 없지만 사실이다. 그러니 망돌 시절에도 얼굴로 조금씩 이슈가 됐었고 배우까지 했겠지. 하지만 얼굴이 전체적으로 튀는 부분 없이 조화로운 느낌이다 보니, 뭐랄까 특징 짓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근데 이게 배우 활동을 할 때는 엄청난 메리트가 되어 다가왔다. 어떤 역할을 맡더라도 ‘배우 문승빈’이 아닌 역할 그 자체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단기간에 여러 작품을 했음에도 지겹다는 반응이 없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한마디로 질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이렇듯 장단점이 확실한 얼굴이었지만, 지운이 형처럼 처음부터 임팩트를 주기는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하얀 머리 걔’를 노리고 백발을 선택한 것도 있었다. 얼굴을 인식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면, 한눈에 들어오게 해 드려야지. 다행히 피부 톤도 하얀 편이었고, 숍 직원분의 말에 따르면 쿨톤이라서 더 잘 어울리는 거란다. 티벡스 시절에는 할아버지 같다고 싫어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정말 천운이었다. 콘셉추얼한 스타일링이 잘 어울리는 건 아이돌로서 최고의 재능 중 하나니까.

“형, 무슨 곡 준비했어요?”

“형, 키가 몇이에요?”

이러다가 태몽이 뭐였냐고도 물을 기세다. 일일이 다 대답해 주다간 끝이 없을 거 같아서 목 관리해야 한다는 핑계로 대화를 끊었다.

“이제 슬슬 다 모인 거 같은데…….”

그리고 들리는 스태프의 목소리.

“마지막 소속사 연습생 입장합니다!”

대체 어디길래 마지막 순번일까- 궁금해하다가 이내 경악했다.

[VM]

VM? 도대체 왜? 다른 연습생들도 같은 반응이었다. 아까 어그로 끈 걸로 끝난 거 아니었나, 찐으로 VM이냐, 그럼 아까 연습생은 뭐냐 등…….

“VM?”

“아까도 VM아니었어?”

“걔는 전 VM 소속”

“미친, 그럼 진짜 VM이 나온다고?”

내 옆의 박재봉도 안 그래도 큰 눈이 튀어나올 듯했다.

“헐, 형. VM이래요.”

“이게 무슨…….”

고개를 돌리니 메인 피디가 아주 흥미롭다는 듯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쩐지 미팅 날 왜 더 몰아세우지 않나 했다. 머릿속에 이미 재밌는 그림을 다 생각하고 있었구나. 소름이 돋았다.

“에이, 이번에도 어그로 아니야? 아까도 전 연습생 가지고 그랬잖아.”

“이번엔 전전 VM 연습생이려나?”

“그런 식이면 전 국민이 다 VM 연습생이게?”

두둥!

요란한 효과음과 함께 글자 하나가 보인다. VM 앞에 붙은 ‘현’.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리고 걸어오는 두 명을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강도현, 김병대.

너희가 여길 왜 나오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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