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지금까지 나온 정보를 정리하면, 이 상태창은 나를 포함해서 연습생들 모두에게 나타난다. 하지만 연습생 신분이 아닌 일반인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내심 아쉬웠다. 문어 대가리에게도 상태창이 있었다면 외모는 분명 F 아님 물음표였을 텐데. 인성이 없어서 아쉽다. 그건 백 퍼센트 F였을 것이다.
다음으로 일정한 연습, 혹은 현 상태를 뛰어넘는 경험을 하면 포인트가 오른다. 그렇다면 떨어질 수도 있는 건가? 이건 아직 확인하지 못했으니 보류.
숙소에 돌아와 잠을 청하려 해도, 상태창에 대한 의문점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 퀭한 얼굴을 한 나에게 강도현이 피로 회복제를 건넸다. 그 와중에도 걔 머리 위를 둥둥 떠다니는 상태창 때문에 고맙다는 말도 까먹었지만.
사실 어차피 나갈 회사, 그냥 월말 평가 준비도 무대도 무난하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상태창의 등장이라니, 이걸 좀 더 파악하려면 어쩔 수 없이 연습을 다방면으로 시도해 봐야 했다. 그래서 계획을 살짝 바꿨다. 최대한 열심히 연습하되, 월말 평가 무대에서는 내 실력을 숨기기로.
저렇게 열심인 강도현을 속이는 게 미안했지만, 내가 못나 보이면 오히려 쟤가 돋보이겠지 하는 생각으로 애써 합리화했다. 회귀 전에도 결국 그렇게 강도현은 데뷔 조에 들었으니까.
“도현아, 우리 월말 평가 무대 구성 수정 좀 해 봐야 할 거 같다.”
“일주일 남았는데 갑자기?”
“응, 크게는 안 바꾸고 부분 부분 수정할 거라서.”
일단 소품. 기존의 스탠드 마이크는 동선을 바꾸는 데에도 불편하고 자칫 올드해 보일 수 있으니 핸드 마이크로 바꾼다. 그리고 비 오는 날 고백하는 짝사랑의 수줍음을 표현하는 노래니까, 중간에 우산을 활용한 안무를 넣는 것으로 바꾸기를 제안했다. 확실히 지난 4년간의 연예계 생활은 보는 눈을 키워 줬다. 티벡스 하면서 하도 구린 무대를 많이 하다 보니까, 뭐가 별로인지는 확실히 알게 되었거든.
역시나 내 계획을 듣던 강도현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우산 아이템이 마음에 들었는지 바로 안무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는데, 대단하다 느끼면서도 정말 뺏고 싶은 재능이었다. 실시간으로 상태창 위 끼 포인트가 올라간다. 거울 너머 내 상태창 속 ‘끼’는 여전히 물음표였다.
날이 갈수록 무대는 완벽해졌다. 머리 위 상태창 속 포인트가 오르는 것을 확인하는 것도 재미가 쏠쏠했다. 물론 나보다 배의 속도로 포인트가 채워지는 강도현이 부러웠다. 티 안 내려고 일부러 강도현 인중만 봤다. 그래야만 머리 위 둥둥 떠다니는 상태창이 겨우 안 보였으니까.
월말 평가 전날 이뤄진 최종 리허설.
“녹화 시작할게!”
촬영 버튼을 누르고 강도현이 자리를 잡았다. 마지막인 만큼 혼신의 힘을 다하기로 했다. 어차피 내일 월말 평가는 애매하게 끝낼 계획이지만, 내 한계를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리허설은 순조로움을 넘어서 완벽했다. 지금까지의 연습과는 차원이 달랐다. 비록 연습생들이지만, 눈앞에 무대를 지켜보는 관객이 있는 것과 없는 게 이렇게 다르구나 하면서도 스스로 적응이 안 될 정도였다.
[하필이면 비가 내려
우산을 핑계로
너와 한 발짝 더 가까이]
짝사랑하는 마음을 고백하고 싶지만, 수줍어 말하지 못하는 화자에 빙의라도 한 것처럼 무대에 집중했다. 지난 2년 동안의 연기 경험을 십분 발휘했다.
[내 마음 들킬까 두려워
오늘도 말하지 못한 고백
그렇게 쌓여 가는 한숨]
다른 연습생이 노래와 춤에만 집중했다면, 나는 감정 연기와 표현력을 더했다. 앞에 있는 연습생들이 이 무대에 빠져들 수 있도록. 3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사람들 앞에서 다시 춤추고 노래하는 날이 올 줄이야.
[아직은 말할 수 없지만
언젠가 고백할게
너를 사랑한다고]
우산을 펼치는 엔딩과 함께 마지막 리허설이 끝났다. 숨이 차올랐지만 기분은 최고조였다.
유달리 조용하다 했는데, 모든 연습생이 벙찐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연습실이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김병대마저도 짜증 반, 놀라움 반의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을 정도였으니.
녹화 중지 버튼을 누르고 돌아온 강도현의 목소리는 흥분에 가득 차 있었다.
“대박. 승빈아, 이번 리허설 완전 최고였어!”
지금까지 실력이 늘었다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확신이 생긴 무대는 처음이었다. 내일 애매하게 끝내야 한다는 것이 살짝 아쉬울 정도였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거울 너머 상태창을 확인했다. 분명 이건 상태창의 변화를 불러올 만한 발전이었으니까.
[이름: 문승빈]
외모: B
끼: ?? → C-
보컬: B
댄스: B-
프로듀싱: ??
“저거 때문이었어?”
높은 레벨은 아니었지만 물음표에 변화가 생겼다. 아, 이제야 깨달았다. 내 끼가 물음표였던 이유. 과거의 나는 가수로서 끼를 발산할 기회가 없었구나. 길거리 캐스팅으로 들어와서, 내 연습생 생활은 아이돌에 대한 별다른 목표도 없이 시작됐다. 성실하게 연습만 했고, 그사이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쯤 되니 이제 이거 아니면 할 게 없다는 조바심에 어떤 장점이 있는지 정작 나조차도 몰랐던 거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성공한 배우로 보냈던 지난 시간은 내가 뭘 잘하는지, 뭘 할 때 사람들이 좋아하는지를 알게 해 주었다. 대중에게 사랑받은 경험이 나를 변화시킨 거다. 가수로 분야가 달라진다 해도, 내가 익혔던 것들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결국 보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야 한다는 건 똑같았으니까. 상태창을 파악하려고 시작한 연습이었는데, 그보다 더 큰 걸 깨닫게 된 거 같았다.
“응?”
“아니, 아니야. 그냥 너무 기분 좋아서.”
“이번엔 진짜 잘될 거 같지, 승빈아-”
“응? 어, 그치.”
“진짜 이번엔 데뷔할 수 있을 거 같아. 고맙다. 우리 꼭 같이 데뷔하자.”
기대감에 가득 찬 강도현의 눈을 보는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넌 데뷔할 운명이었고, 난 너랑 같은 팀이 되지 않을 텐데. 아무것도 몰랐을 과거의 문승빈이었다면 저 말에 행복했겠지만, 슬프게도 지금의 나는 너무 많은 걸 기억하고 있었다. 저 눈이 나를 배신했던 순간이 아직도 선명하니까.
“잘될 거야.”
할 수 있는 말이 없을 때, 이것만큼 유용한 말이 있을까.
“그치? 이번엔 분명 될 거야. 내가 장담한다.”
말이라도 고맙다.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는 말이었다.
* * *
대망의 월말 평가 날이 밝았다. 이 무대로 끝이 날 인연임에도 정이 꽤 들긴 했나 보다, 잘하자는 강도현의 말에 살짝 울컥한 걸 보니. ‘그런 거 사사로운 감정이야-’ 문어 대가리가 데뷔조 최종 탈락을 통보한 날, 오열하던 내 앞에서 한 말이었다. 그때 그 감정을 잊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연습실에 들어가니 실무진과 트레이너들이 모여 있었다. 3년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평가를 받았던 자리. 이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B팀 문승빈, 강도현 연습생. 나와서 준비하세요.”
“네.”
“네!”
무대를 시작하기 전, 강도현이 주먹을 쥐고 나를 보며 ‘파이팅.’ 속삭인다. 그래, 파이팅 하고 데뷔해서 나중에 꼭 다시 만나자. [Last Chance]의 전주가 흘러나왔다.
어제의 반의반도 안 되는 에너지와 완성도였다. 하도 연습했던지라 나도 모르게 표정 연기를 할 뻔했지만, 뇌에 힘을 주고 참아 냈다. 못하는 척도 힘든 거였구나, 난생처음 겪는 기분이었다.
무대가 끝이 나고, 강도현이 흘리는 말로 물었다. 목소리에 당황스러움이 잔뜩 묻어났다.
“왜 그래? 어제랑 너무 다르잖아.”
“그, 너무 긴장해서.”
긴장했다는 말밖에 할 변명이 없었다. 그리고 아마 과거의 문승빈이었다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도현이는 역시 잘하고, 문승빈 너는… 3년 연습했으면 이제 좀 발전이라는 게 있어야 하는 시기 아닌가?”
“도현이는 춤, 노래, 무대 매너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었고. 승빈이한테 고마워해라. 원래도 잘하는데 쟤 때문에 더 잘해 보였어.”
“승빈이는 역시나 애매하네.”
거울에 비친 강도현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당황스럽겠지. 하지만 저 정도로 놀랄 일인가? 늘 그랬던 거처럼 난 애매한 사람으로 남는 건데.
“다음 팀 준비하세요.”
자리에 돌아온 강도현은 나보다 더 아쉬움이 가득해 보였다. 극찬을 받았음에도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아 괜히 눈치가 보였다.
월말 평가가 끝나고 오랜만에 이뤄진 야식 파티에 모두 들떠 있었다.
“형, 오늘 실무진분들 다 온 거 같던데, 진짜 얼마 안 남은 거 같죠?”
“어? 어, 그래.”
“형은 되게 덤덤하네요. 하긴 무대를 그래 놨으니-”
때를 놓치지 않고 시비를 거는 김병대였다. 그래, 너와도 오늘로 끝이구나. 데뷔하고 나서는 처신 잘해라, 강도현한테 민폐 끼치지 말고. 너 1년도 안 돼서 인성 논란 뜨고 팬들한테 X처맞으니까.
야식 파티가 끝나고 다들 짐을 챙기는데, 회사 막내 직원이 나를 포함한 연습생 몇 명을 따로 불렀다. 갑작스러운 호출에 다들 어리둥절해하는 와중에, 그 입에서 나온 건 바로 연습생 계약 만료 통보.
다시 마주해도 정말 잔인한 회사였다.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단 하루의 시간도 아까웠나 보다. 내가 데뷔조에서 탈락한 그날도, 바로 당일에 숙소를 비우라 했었지. 나보다 어린 연습생들이 눈물을 흘리는 걸 지켜보며, 과거의 어린 문승빈을 홀로 위로했다.
숙소에 돌아와서는 대충 본가에 갔다 온다는 핑계로 짐을 정리했다. 잠깐 본가에 가는 거면서 무슨 이사라도 가는 거냐는 강도현의 말에 뜨끔하기도 했지만,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숙소를 나섰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같은 무대에서 만나자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지금 내가 청춘 드라마 찍고 있을 때는 아니니까.
그리고 사실 강도현을 다시 만나고 싶은가? 그것도 잘 모르겠다. 지금의 강도현은 아무것도 모를 테지만, 미래의 강도현은 내게 가장 큰 좌절을 준 존재였으니까.
다음 날부터 핸드폰이 쉴 새 없이 울렸다. 함께 연습을 했던 연습생들의 연락이었다.
[강도현: 야,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냐?]
강도현에게는 미안했지만, 더 연락해 봐야 좋을 게 없다 생각했기에 번호를 바꿨다. 집에 찾아와도 이미 이사를 간 후라 나를 찾지 못할 거였다, 같이 살던 친누나까지 부모님이 계신 미국으로 가면서 나는 원룸으로 이사했고. 굳이 회사에 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생각하면 정말 잘한 일이었다. 회사도 정리했겠다, 이제 남은 건 오직 ‘To My World’ 시즌 2 참가 신청이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씨넷 홈페이지에 드디어 개인 연습생 신청자를 받는다는 공고가 올라왔다. 참가 영상은 정말… 날것 그 자체로 찍었다. 춤을 보여 주자니 공간이 충분하지 않아서 간단한 루틴 정도만 보여 줬고, 노래도 층간 소음에 예민한 옆집 때문에 흡사 ASMR 영상같이 찍혔다. 하지만 이런 건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어그로 끌릴 만한 포인트만 잘 적어 내면 되니까.
[To my world 시즌 2_지원서]
이름: 문승빈
나이: 18살
키: 178cm
몸무게: 65kg
취미/특기 : 드라마 보기/연기
경력 : 전 VM 연습생 출신 (연습생 기간 3년)
각오 한마디 : 저는 To my world 시즌 2에 참가하기 위해 VM 엔터를 나왔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 * *
투마월 시즌 1을 성공적으로 이끈 윤 피디는, 엄청난 연봉 인상과 함께 시즌 2도 맡게 되었다. 순식간에 씨넷의 간판 피디가 된 그에게 투마월 시즌 2는 자리매김의 기회였다. 자발적으로 야근하면서까지 지원서를 넘겨 보던 그의 표정이 점차 굳어 갔다.
“연습생 풀은 나쁘지 않지만… 그, 뭔가 더 매콤한 게 필요한데 그런 애가 없네.”
자고로 서바이벌은 어그로로 시작해서 어그로로 끝나야 했다. 매 편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현란한 편집이 필요한데, 온전히 방송사가 만들어 준 서사로는 부족했다. 그때, 같이 야근하던 작가 C가 윤 피디에게 지원서 하나를 건넸다.
“피디님, 얘 지원서 보셨어요?”
문승빈. 준수한 외모와 적당한 나이, 피지컬도 나쁘지 않고. 근데 지원 영상을 보니 애초에 실력을 보여 주려고 찍은 영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지막 각오에서 윤 피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저는 투마월 시즌 2에 참가하기 위해 VM을 나왔습니다?”
어그로 끌 줄 아는 애네. 10년 가까이 피디를 하면서, 눈에 띄겠다고 객기 부리는 신인을 많이 봤다. 과연 이게 객기일지, 진짜 패기일지 궁금해졌다.
“이거 사실이면 편집 각이 보이는데요?”
“VM 쪽이랑 한번 연락해 봐야겠네.”
“근데 거긴 이미 데뷔조 픽스됐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쪽에 구미가 당기게 하면 되지, 안 그래?”
작가 C는 윤 피디의 안광이 빛나는 걸 보며 소름이 돋았다. 절대 적으로 두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