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576화
새로운 일상(31)
아방궁에 피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시… 시바….’
물론 정말로 누군가의 목이 잘려 피가 솟구쳐 오르지는 않고 있었지만 적어도 사용인들이 느끼는 분위기는 그러할 것이다.
마치 광증에 걸린 황제가 황성에서 칼을 뽑아 들고 설치는 듯한 느낌이다. 오랫동안 손님을 불러오지 않고 매번 같은 일상을 반복하던 저택이었기에 이번 사건이 더욱더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
이기영의 난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말려야 되나? 이… 이거….’
아까부터 계속 당황하고 있었지만 얼굴이 일그러진 진 군사를 보고 있자니 어떤 포지션을 잡아야 할지 당최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진… 진짜로 화났자너.’
그래, 대놓고 티를 내고 있지 않았지만 극대노한 모습이라고 할 만했다. 제니스 후작과 1군사의 애정행각을 목도했던 것보다 살짝 덜 빡친 느낌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결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녀석과 함께하면서도 이렇게 이성을 잃은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로 오랜만이다.
물론 그리 쉽게 이성을 잃지 않는 녀석이었던 터라 일말의 끈을 붙잡기 위해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는 것이 포인트.
아마 사용인이나 손님들이 없었다면 소리를 지르면서 책상을 쾅쾅 두드리지 않았을까.
‘이해할 수 있… 있자너….’
그렇지 않아도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가 남다른 녀석이었을진대, 저택에 진영의 물건이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굴욕적이었을까. 그래, 엄청나게 굴욕적이었을 것이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녀석이 이쪽을 맞이하기 위해 모든 사용인들과 대대적인 준비를 했을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하다.
당연히 시간이 짧아 진 군사 혼자 준비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용월을 비롯한 측근들의 도움을 받았을 거라는 것도 예상이 간다.
정확히 진영의 유품들이 저택 안에 들어선 경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진 군사가 저 물건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는 건….
‘지 눈에도 예뻐 보였다는 거니까.’
딱 진 군사의 취향일 것 같은 느낌으로 유품을 정리해 보냈으니 녀석의 성에 차는 것이 당연했지만 진 군사의 입장에서는 마치 몰래카메라라도 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지 않았을까.
만족스럽게 꾸며진 저택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게 시바 하필이면 이기영이 보낸 물건들이라니, 근데 그게 하필 시바 진영의 유품들이라니.
내 안목과 자신의 안목이 겹친다는 것에 대한 짜증이 일어나는 것을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사용인들에 대한 분노도 차오르고 있을 것이다.
녀석은 이 모든 상황을 굴욕이라고, 자신의 체면이 손상되었다고 여기는 듯했다.
심지어 그 체면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손상되고 있는 중.
아마 이런 상황은 진 군사 역시 예상하지 못했었겠지만….
“그… 그 명령에는 따를 수 없사옵니다. 군사님.”
“…….”
“…….”
녀석의 명령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 진… 진짜. 이거 어디까지 가는 거냐고.’
“차라리… 저를 죽이시고… 소가주님의 유품을 보존하여 주시옵소서….”
‘시바… 소가주는 또 뭔데? 이 새끼들 지구에서 온 새끼들 맞아?’
“…….”
“…….”
처음 진 군사의 명령에 불복한 것은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멋들어지게 하얀색 수염을 길러서 어거지로 현명해 보이는 노인 한명이 풀썩 자리에 주저앉고 이마에 땅을 박으며 충언을 올리기 시작한다. 사극에서 꼭 한 번 즈음은 등장하는 장면이었다.
실제로 정하얀이 “나, 저, 저거 드, 드라마에서 봤어. 소라야….”라며 중얼거렸을 정도였다. 물론 그녀의 목소리는 과몰입한 진 군사의 충신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차라리… 저를 죽여주시옵소서… 모든 게 저의 잘못이니, 저를 벌하시고 소가주님의 유품을 보존하여 주시옵소서….”
다시 한번 쾅 하고 이마를 바닥에 내려찍는다.
“차라리… 저를 죽이시고… 소가주님의 유품을 보존하여… 주시옵소서….”
그 와중에….
‘저 노인네… 시… 시바… 강하자너.’
심지어 노인의 옆에 15살도 넘지 않아 보일 것 같은 꼬마 아이가 이마를 땅에 붙인다.
“차라리! 저를 죽이고!! 도련님의 유품을 보존하여 주시옵소서!!!”
아직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목소리로 도련님의 유품 보전을 촉구하고 있는 꼬맹이도 스탯이 보통이 아니다.
용월이도 한 가닥 하는 느낌이었는데, 저기 앞에 선 노인과 꼬마 아이에게는 한 수 접어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림자의 저택에서는 노인과 어린아이를 조심해야 한다는 격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물론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중요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들이 오랜 시간 동안 진 군사의 손과 발이 되어주었던 중요 가신이라는 사실은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스펙도 스펙이거니와 진 군사를 바라보는 표정이 남다르다.
“이 대륙에 저와 함께 떨어진 이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군사님을 모셔 왔사옵니다… 그간 군사님의 명령에 아무런 의구심도 갖지 않고, 그저 수행하는 것만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만… 그저 도구로써의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 왔었습니다만… 도저히… 도저히 소가주님의 유품을 버리라는 명령에는 따를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심지어 튜토리얼에 떨어진 직후부터 지금까지 진 군사를 보필해 왔단다. 이미 나이가 나이인지라 권력에도 관심이 없고, 그저 진 군사를 옆에서 보필하는 낙으로 지내면서 사는 것이 낙인 노인네.
당연히 사용인들 사이에서는 정신적 지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사용인 중 반 이상이 할아버지와 똑같이 땅바닥에 이마를 박고 있는 것을 보면 답이 나온다.
“어찌… 저희가 도련님의 유품에 손을 댈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 불충을… 어떻게 이 손으로 저지를 수 있겠사옵니까….”
“차라리 저희를 죽이고!! 소가주님의 유품을 보존하여 주시옵소서!!”
“차라리 저희를 죽이고!!! 소가주님의 유품을 보존하여 주시옵소서!!!”
“차라리 저희를 죽이고!! 소가주님의 유품을 보존하여 주시옵소서!!!!!!”
‘시… 시바 진짜….’
“차라리 저희를 죽이고!! 소가주님의 유품을 보존하여 주시옵소서!!!!!!!!”
‘이거 쿠데타자너… 명령 불복종이자너….’
물론 사용인들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야 지금….
‘완전히 미친놈처럼 보일 게 뻔하지… 그지?’
“눈을 떠 주시옵소서… 군사님의 눈과 귀를 흐리고 있는 이가 있음을… 깨달아 주시옵소서….”
‘그, 그거… 설마 나 이야기하는 건 아니죠? 할아버지?’
저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더욱더 말이다. 언제나 이성적인 판단을 보여주던 진청 군사가 교국에서 온 이상한 남자의 감언이설에 빠져 자신의 아방궁을 망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지 않은가.
적절하지 않은 예였지만 중전과 왕세자를 잃은 왕이 어디서 근본도 없고 욕심만 그득한 표독스러운 후궁을 들여 나라를 실시간으로 박살 내고 있는 느낌이다.
심지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뭔가 그림이 그렇게 그려진 것 같기도 한 기분이다. 귓속말을 하고 나서 곧바로 유품숙청작업이 이루어진 것도 그렇고, 하필이면 내가 온 첫날부터 대놓고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말이다.
괜히 기 싸움한다고 설친 것이 원인이었던 것일까. 역시 고개를 올리며 표독스러운 표정을 짓지 말았어야 했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저항세력의 덩치는 점점 불어가고 있다.
말마따나 진 군사의 명령이라면 불구덩이에도 뛰어 들어가 죽을 수도 있는 놈들처럼 보였지만 모두가 이 명령에 불복하는 것이 진정한 충이라고 여기고 있는 듯했다.
도저히 자신들의 손으로 불충을 저지를 수 없다는 스탠스를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다.
“…….”
“…….”
‘시… 진짜….’
그리고 우리 군사님은….
‘진… 진짜 당장에라도 쳐 죽이고 싶은 것 같은 얼굴이자너.’
앞서 말했듯이 녀석이 사용인들의 충성심에 감복해 자신의 의견을 물리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는다.
지금 당장 진 군사가 그들에게 손을 쓰지 않는 이유는 딱 하나다.
‘쪽팔리니까… 그렇겠지….’
이 저택에 붉은 피를 뿌릴 생각은 당연히 없을 것이고, 본인의 사용인들을 다스리지 못해 직접 손을 쓰는 멍청한 행동 따위는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본인의 사용인들이 실수와 잘못을 했다며 직접 매질을 하는 고용인만큼 무능력해 보이는 사람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을까.
거기에 내가 있다는 것도 조금 지분이 있을 것이다. 당장에라도 무릎을 꿇은 이들을 단매에 때려죽이고 싶은 진 군사였지만 지금 녀석이 할 수 있는 행동은 왕강을 나무라는 것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거냐. 왕강. 내가 분명히 전부 다 버리라고 일렀거늘.”
그래 딱 이 정도 말이다.
“저것들을 당장 끌어내라.”
저것이란다. 저것이라고 했다. 녀석이 죽을 만큼이나 화를 참고 있다는 증거였다.
“왕강!!!”
기어코 큰소리를 치는 군사님. 깜짝 놀란 왕강이 다시 한번 무릎을 꿇고 일어선다.
“존… 존명!”
“…….”
“…….”
“충!!! 당… 당장 저 은혜도 모르는 것들을 끌어내라!!!”
“아니 되옵니다!!!”
“아… 아니 됩니다!! 군사님!!!”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단 말씀이십니까!!!”
“통…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은 또 뭐야. 누가 그랬어? 누가 어디서 사극 보고 왔어.’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도련님을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시옵소서!!!”
“슬퍼하실 주인마님을 다시 한번 떠올려 주시옵소서!!!!!”
“군사님… 흐윽… 흐으으윽….”
“군사님!!!”
“군사님!!!!!”
‘아… 아니, 시바… 아니….’
“아니 됩니다!! 절대로 아니 됩니다!!”
“이… 이런 미… 미친 것들이….”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뭣들 하고 있느냐! 저 은혜도 모르는 잡놈들을 당장 끌어내지 않고!!! 군사님의 명령이다!!!! 한노야!!! 도대체!!!! 이 무슨 개짓거리입니까!!! 손님들이 있는 자리입니다!! 응당 모범을 보여야 하는 당신이!!!”
“닥쳐라!!! 왕강!!!!! 은혜를 모르는 것은 네놈이다!!!! 이 금수만도 못한 놈!!! 권력에 눈이 멀어 기어코 사특한 뱀에게 혼을 팔아먹었구나!! 네가 이 저택을 망치는 것이다!!! 권력에 눈이 멀어 군사님을 망치고 있는 것이다!!! 네게 진정한 충심이 남아 있다면!!!”
‘아니, 시바… 이게 도대체 뭐야… 시바. 나 사특한 뱀 아니야….’
“진청 군사님. 소인이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왕강!!! 이거 놓아라!!! 이거 놓아라!!!”
“당장 끌어내!!!! 군사님의 명이다! 저 주제도 모르는 것들을 당장 저택에서 쫓아내라!!!”
“차라리 날 죽이고 가라!! 차라리 날 죽여라!!!!”
“제발 눈을 떠주십시오! 눈을 떠주시옵소서!! 감언을 하는 자들을… 이거 놔라!!”
“교국에서 온 사특한 자에게서 벗어나셔야 합니다. 군사님!!”
‘진짜 이게 뭐냐고… 시… 시바 이거 맞냐고.’
“사특한 뱀을 멀리하시옵소서!!!”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로 막장 개판 오 분 전이 되어가고 있는 중, 시바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이마를 찧었던 이들이 손에 손을 잡고 명령에 따를 수 없다면서 버티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대항세력이 어떻게든 그들을 진압하려고 하고 있었지만 한노야라는 노인은 만근추라도 시바 쓰고 있는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양산형 박덕구 10명이 그를 잡아당겨도 움직임에 미동도 없다.
장담하건대 무기를 빼 들지 않고서는 이들을 진압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피를 보지 않고서는 이 상황을 해결할 수가 없어 보여 당황스럽다.
점점 점입가경으로 흘러가는 상황에 진 군사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지는 중, 그런 진 군사의 눈치를 살피던 왕강이 기어코 칼을 빼 들어 올린다.
“나를 원망하시오!! 한 노야!!! 이 모든 것이 군사님의 뜻이니!!!”
당연히 시바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만!!!!!”
그리고, 정적.
충성스러운 왕강은 검이 한 노야의 목에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물론 금강불괴를 성취한 것 같은 한 노야의 내구를 뚫을 수 없을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개싸움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 맞다.
“…….”
“…….”
“피를 보고 싶지 않은 날이에요.”
“…….”
“소가주의 유품이 버려지는 것이 문제라면….”
“…….”
“제가 보관하도록 하겠습니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냐고… 시바… 슬슬 배고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