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571화
새로운 일상(26)
-각성하라!!!!!! 각성하라아아아아!!!!!!!!!!!
-평화협정!!! 반대한다아아아아!!!!! 반대한다아아아아아!!!!!!!!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바 잘못된 건지 모르겠자너.’
멍하니 창밖의 광경을 바라보게 된다. 내 허망한 표정을 관찰하던 최면 아저씨가 은근슬쩍 자리를 피하는 모습도 눈에 비쳐왔지만 녀석에게 신경을 쓸 수 없을 만큼 당황스러운 광경이었다.
“그… 혹, 혹시나 필요한 일이 있으시다면… 곧… 바로 불러주시면 득달같이 달려가겠습니다.”
“…….”
“…….”
물론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이는 것을 보는 게 처음인 것은 아니다. 지난 전쟁에서도 우글우글거리는 인간들을 본 적이 있었고, 심지어 야외 공개 기도회 때도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밀집되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지만, 이토록 광기에 찬 현장을 바라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애초에 공개 기도회는 숨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니 논외였지만 지금
보이고 있는 현장은 단언하건대 전쟁터보다 더 혼란스럽다고 느껴진다.
-여러분!!! 대관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란 말이요!!!! 지난 전쟁에서 얻은 상처가 아직 아물기도 전이라니까!!!!!! 아직도 동료들이 죽어가는 모습이 눈에 훤한데!!! 갑작스레 평화협정이라니!!! 이건 교국을 위해 목숨을 버린 병사들을 두번 죽이는 행위라니까!!!
-옳소!!! 옳소!!!!
-그 누구보다도 교국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한마디만 더 하겠소!!! 우리들은 평화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요!!!! 다만 그 누구보다도 교국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희생과 부활의 성자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작금의 행태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어 이렇게 모인 것이외다!!! 평화를 위해 손을 내밀어야 하는 것은 우리 희생과 부활의 성자님이 아니라 그림자의 영웅이요!!!
-옳소!!! 옳소!!!!!!!!
-교국의 지도부에게 묻겠소!!!! 도대체 왜 그대들이 짜놓은 설계에 희생과 부활의 성자님을 장기 말로 내
민 것이오!!! 그대들의 굴욕 외교에!! 어째서 희생과 부활의 성자를 희생양으로 삼았냐는 말이요!!! 지금까지는 참아줬었지만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니까!!!!
-옳다!!! 잘한다!!!!!!!!!!
‘핀트 잘 잡았네….’
아무래도 박기리 삼남매를 전면으로 내세운 것이 문제였을 것일까.
‘목소리도 호소력 넘치자너… 시바.’
그래, 아무래도 녀석들을 전면으로 내세운 것이 문제였던 것 같다. 이미 한 번 선동 아닌 선동을 해본 전적이 있어 잘해낼 거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고작 이틀이었잖아.’
녀석들에게 임무를 내린 것이 고작 이틀 전이었다. 겨우 이틀밖에 시간이 없었는데 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은 것이다.
내가 알몸으로 기습 공개 기도회를 연다고 홍보를 하더라도 이 정도의 인원을 모으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아무리 베넷 사제의 최면에 당한 이들이 주축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진짜 어처구니가 없자너….’
김예리가 베니고어 넷을 움직이고, 박덕구가 발로 뛰고, 안기모가 시위를 준비했다고 어젯밤에 들어 그냥 잘하고 있나 보다 생각했을 뿐이었다. 설마하니 이런 상황이 찾아오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다음은 공화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는 우리 자랑스러운 교국의 청소년을 모셔보겠소!
-…….
-…….
-안녕하십니까!!! 거두절미하고 교국의 지도부들에게 솔직하게 한마디 하겠습니다!!! 도대체 교국지도부는 어디까지 희생과 부활의 성자님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희생과 부활의 성자님은 당신들의 입맛대로 움직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 당신들이 앉아 있는 자리가 교국민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자리라는 것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옳다!!!
-더 이상 희생과 부활의 성자님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행태는 멈춰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마… 저게 결정적이었을 거야.’
그래, 박덕구 이 새끼의 머릿속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지금의 상황을 만들어낸 결정적인 요인일 것이다.
화살표를 내가 돌린 것이 아니라. 교국 지도부에게 돌려 버린 것 말이다.
올바른 판단이었고, 절로 무릎을 탁 하고 칠 만큼 괜찮은 아이디어이기도 했다.
내 입으로 말하기 조금 민망하기는 하지만 희생과 부활의 성자가 교국에서 압도적인 지지율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가.
사실 베니고어 넷 밖에 나가면, 희생과 부활의 성자의 의견에 반대한다거나 희생과 부활의 성자를 비난하는 행동을 하는 놈들은 찾아보려고 해도 찾아볼 수가 없다.
동료들에게 미친놈 취급을 받는다거나, 상종하지 못할 인간 취급을 받는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 한소라와 함께 극단주의자들을 한데로 묶어 프레임을 씌우는 것에 성공했으니 놈들이 밖으로 기어 나올 리 만무,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협정 반대파가 저렇게 많이 모여 있는 것은 자신들이 희생과 부활의 성자를 지키고 있다는 이상한 사명감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교국 지도부의 교황청의 음습한 음모에 희생과 부활의 성자가 어쩔 수 없이 휘말려 그림자의 영웅에게 평화를 구걸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여러 가지 이유로 평화협정을 반대해야 하는 놈들도 당당하게 기어 나올 수 있게 됐다. 단순한 극
단주의자와 차별주의자들도, 심지어 내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놈들도 가면을 쓰고 저기서 함께 소리를 지르고 있다.
교국시민연대, 베니고어교단 추종회, 교국기 부대, 명예추기경 기도협의회, 뭔 시바 정체도 알 수 없는 집단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깃발을 내걸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평화협정을 반대하는 세력은 공화국 쪽에도 존재한다.
보아하니 이 새끼들도 상황은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얘네들은 시바 그림자의 영웅이 공화국 총통에게 압력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
누가 봐도 둘이 도저히 뭉칠 수가 없는 조합이었는데, 인원수를 뻥튀기하기 위해서인지, 평화협정 찬성 시위에 함께 대적하기 위해서인지, 얇은 가벽을 사이에 두고 함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굴욕외교!!! 물러가라!!!! 물러가라!!!!
-굴욕외교!!! 물러가라아!!! 물러가라아아아!!!!
-굴욕외교오오오!!! 물러가라아!!! 물러가라아아아아!!!
-오스칼은 사퇴하라!!! 사퇴하라!!!!
‘오스칼 사퇴는 뭐야? 너 이 새끼 어디에서 왔어?’
중간중간 정체를 할 수 없는 구호를 외치는 선동꾼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 분명히 교국의 지도자 오스칼의 반대편에 있는 의회에게 고용된 녀석일 것이다.
-명예추기경을 해방하라!!! 해방하라!!!
‘난 이미 해방되어 있어.’
-교황청은 희생과 부활의 성자의 공개 기도회를 주 3회 보장하라!!!
‘진짜 별별 새끼들이 다 있자너.’
심지어 목소리가 하나로 뭉쳐지지도 않는다. 물론 커다란 단상 위에서 머리띠를 하고 있는 박덕구와 김예리, 안기모를 비롯한 시위의 핵심 인물들 중심으로 큰 덩어리가 형성되어 있기는 하지만 각각 모여 있는 작은 집단들의 목소리는 제각각이다.
사실 이런 현상은 평화협상 찬성측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대체로 평화로운 편. 모두가 여신의 손거울을 들고 흔들고 있었고 굉장히 차분히 진행되고 있는 모습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느 집단이 그렇듯 이쪽에서도 과격파가 존재하게 마련이다. 맞불시위를 위해 오늘 이 자리를 찾은 만큼, 반 평화협정 시위가 일어나고 있는 장소와 가까이 붙어 있는 녀석들은 있는 대로 고함을 치고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심지어 물건들까지 집어 던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어떻게든 공화국의 병사들이 이걸 통제하려고 하고 있었지만, 당연히 통제하기가 쉽지가 않을 것이다. 인원도 인원이거니와 시위의 분위기도 거칠기 짝이 없었으니까.
물론 평소였다면 곧바로 공화국 공안들을 투입해 이걸 전부 진압해 버리겠지만… 전 대륙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상황이였으니 이걸 때려잡을 수도 없는 노릇.
언론 1면에 공화국의 집회탄압사태 같은 것이 뉴스로 나오는 꼴을 보고 싶지 않을 테니 말이다.
‘시바… 맞불시위만 안 나왔어도 괜찮았을 텐데… 하… 도대체 맞불시위는 왜 나온 거냐고.’
길 하나를 두고 양 집단이 갈라져 있는 모습을 보니 내가 다 불안해진다. 마치 전투 직전에 선 격양된 전사들처럼 보일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시위를 통제하기 위해 얼떨결에 끌려온 초보 병사들의 다리가 덜덜덜 떨려오는 것이 괜스레 눈에 밟혀온다.
그리고 괜스레 불안해하는 녀석이 여기 또 하나. 방을 벗어나자 아니나 다를까 이쪽을 기다리고 있는 녀석이 눈에 보인다.
“…….”
“…….”
“기영 씨… 아무래도 일정을 연기하는 것이….”
“…….”
“…….”
당연히 김현성이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너무 많은 이들이 격양되어 있습니다.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혹시나 안전문제가 생길까 걱정입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다른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고 말입니다. 이를테면 저번에 말씀해 주신….”
“아니요. 루키… 아니, 그쪽 일은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검은백조에서 투입한 레인저들이 인파들 사이에 숨어 있으니까요. 전에 말씀드렸던 대로 적들도 무언가를 하기에는 힘든 상황이고 아마 지금의 상황을 정찰하는 것 정도가 전부일 거예요. 검은백조는 그들을 추적하기 위해서 숨어 있는 거고요.”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다른 곳도 아니고 공화국 그림자의 영웅이라고 불리는 진 군사님의 저택 앞이잖아요. 대책은 그쪽에서 마련하겠죠. 평화사절단도 있고요. 게다가 그림자 저택 같은 경우에는 단단한 결계로 보호받고 있고, 무엇보다 현성 씨도 옆에 있고 하얀이도 옆에 있는데… 뭐가 걱정이겠어요?”
‘오히려 니네들이 옆에 있는 게 걱정돼.’
차라리 김창렬이 옆에 있었다면 걱정되지 않았겠지만.
“소… 소라야. 저거 봐.”
“아… 네? 정하얀 님.”
“사람들 모여 있는 거 보이지.”
“네. 당연히 보이죠.”
“커다란 망치를 만들어서 저기를 쾅 하고 찍어버리면 진짜 웃기겠다. 그치?”
“그, 그, 그러면 안 되는 거 아시죠? 정하얀님….”
“당연히 알지. 소라는 날 뭘로 보고… 그, 그냥 웃기겠다고… 말한 건데….”
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걱정이 생기지 않는 것이 이상한 상황이다. 내가 다치는 게 걱정되는 것이 아니
라… 괜한 민간인들이 허무하게 바스라지지는 않을까 걱정된다.
지난 이틀간 김현성, 정하얀과 함께 공화국 곳곳을 여행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도 불안에 덜덜 떨지 않았을까.
별다른 사건 사고 없이 하하 호호 즐겁게 보냈으니까.
‘스트레스 같은 건 없을 거 아니야.’
네 명이서 함께 식사를 할 때는 한소라와 김현성이 좀 어색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것 외에는 다른 문제는 없었다.
김현성과 정하얀이 이야기를 통해 서로의 스케줄을 조정했다 싶었을 정도로 서로의 시간을 존중했기 때문에 하루가 꽉 찬 일정을 소화하기도 했고, 조금 더 많은 시간을 얻어낸 하얀이가 많이 기뻐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 그런데… 좀 아쉽다. 소라야….”
“왜요?”
“저기 저, 저택에서 일정을 전부… 끝내면… 이제… 여행이 끝나는 거잖아….”
“…….”
한소라에게 이야기를 하며 은근슬쩍 들으라는 듯이 내게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기 때문에,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어나간 것은 당연지사.
“집에 가서도 자주 밖으로 나가면 되지. 공화국은 너무 멀어서 세…라를 데리고 나가지는 못했지만, 교국에 돌아간 이후에는 넷이서 같이 나가자.”
“정, 정말요?!”
“그럼….”
“그럼 일, 일정은 제가 짜도 되는 거죠?”
“아… 그렇게 할래?”
“네… 네! 소… 소라야!!!”
“정말 다행이네요! 정하얀 님! 이번에는 세라도 같이 가게 됐어요!”
“…….”
“…….”
“스케줄 비는 날 알아볼게요. 현성 씨.”
“아! 네! 저도 따로 준비해야겠군요.”
정하얀을 두고 부럽다는 듯이 쳐다보던 녀석의 얼굴이 신경 쓰였기 때문에 일단은 김현성에게도 이기영 자유이용권을 발급하자 그제야 밝아진 표정이 시야에 비쳐왔다.
마치 자식 둘을 키우는 느낌인지라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일단은 담담하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저택 안에서 목이 빠져라 이쪽을 기다리고 있었던 얄미운 녀석 때문이었다.
“…….”
“…….”
“슬슬 시간이네요. 나갈까요?”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자, 기다렸다는 듯이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와 응집된 인구의 고함 소리가 귓가를 때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