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554화
새로운 일상(9)
진 군사가 미친놈이라도 보는 것마냥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익숙한 표정이었다. 녀석이 저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특히 당황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설마 언론에 비치자마자 곧바로 즙을 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표정이다.
당연하지만 기쁨의 눈물 따위가 아니다. 누가 봐도 슬퍼하는 듯한 느낌의 눈물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해석의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산책 회담이 만족스럽게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아니, 만족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거의 파국을 맞을 지경이라는 것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놈의 입장에서는 갑작스레 기습공격을 받은 셈. 당황할 만도 하건만 곧바로 표정을 관리하는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아마 녀석도 이쪽이 선전포고 아닌 선전포고를 했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 분명했다.
쟁점은 당연히 급진과 온건이었다.
녀석은 공동선언문으로 이 평화회담을 마무리하고 싶어 하고, 나는 그 이상을 원했다.
사실 평화회담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고, 일이 커진 김에 해결해야 할 부수적인 목적에 불과하기는 했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이미 일은 터졌고, 뭐가 됐든 간에 수습하기 위해 누군가는 양보를 해야 했으니 여론으로 녀석을 압박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아마 지금 이 순간 기사의 헤드라인이 결정되었을지도 모른다.
[산책회담 적신호. 도대체 정원에서는 무슨 이야기가 오갔던 것일까.]
국뽕TV도 미쳐 날뛰고 있을 것이다.
[희생과 부활의 성자가 산책회담이 끝난 이후 눈물을 흘린 까닭은?]
[끝끝내 눈물로 막을 내린 산책 회담, 두 상징의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은 24가지 이유.]
단언하건대 별의별 추측들이 전부 다 튀어나올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언론에서는 희생과 부활의 성자가 눈물을 흘린 이유에 대해서 하루 종일 떠들어 댈 것이고, 여론은 진 군사를 압박하기 시작할 것이다.
심하면 그림자의 영웅이 평화의 시대에 협조적이지 않다거나 하는 이야기도 나올 수도 있겠지.
“…….”
“…….”
녀석이 손수건을 건넨 것은 이쪽이 살짝 눈물을 훔치려는 리액션을 취했을 때였다.
‘자연스럽자너.’
더불어 중얼거린다.
“같잖은 짓을 하는군.”
목소리가 들릴 거리는 아니었기 때문에 튀어나오는 말과 행동이 다르다. 아마 다른 이들에게는 진 군사가 세상 다정하게 이쪽을 위로해 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을 것이다.
“같잖은 짓이라뇨. 초대하고 초대받은 것과는 별개로 원하는 게 있으면 쟁취해야죠. 군사님이랑 한 자리에서 하루 종일 설전하는 게 재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계속 도돌이표가 될 거라는 거 알잖아요. 괜히 시간 죽이기보다는 제 방식대로 하려고요.”
“무엇을 원하나?”
“제가 원하는 게 뭐겠어요. 양보죠. 뭐. 군사님 말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고, 방식의 차이일 뿐 나아가는 데 별다른 지장이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군사님도 알잖아요. 저는 원하는 게 있으면 꼭 가져야 되거든요.”
“…….”
“이번에도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어요. 대륙에 적당한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 온 것 같기도 하고, 떠밀리는 것 같은 느낌도 없지 않아 있기는 하지만 교국과 공화국은 새로운 환경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어요. 군사님이 여러 가지 부작용을 걱정하시는 것도 이해는 되지만 혁신 앞에서는 사소해요. 대비할 인력도, 시스템도 이미 갖추어져 있고요. 그걸 위해서 지금까지 내실을 다진 거 아니겠어요? 인프라가 갖추어져 있는데 뭐가 그리 무섭다고.”
“뭐가 옳고 그른 것인지 깨닫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떼를 쓰는 것 같군.”
“떼쓰는 거 맞는데요? 아마 내일부터 반응이 꽤 뜨거워지지 않을까요?”
“어차피 여론이라는 건 식게 마련이다.”
“글쎄요. 이번 건 식을지 모르겠는데.”
“…….”
진 군사가 준 손수건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은 이후에는 손수건을 품으로 집어넣는다. 녀석은 실망하기에는 이르다는 듯 살짝 포옹한 이후에 어깨를 두드리는 중. 세상 따뜻해 보이는 표정에 억지로나마 환한 미소를 짓는다. 마치 아직은 희망이 남아있다는 듯이 말이다.
“정말로 여기에 찬물을 끼얹을 생각은 아니죠?”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나도 내 뜻을 굽힐 생각은 없으니, 일이 재미있게 되겠군.”
이윽고 정중하게 인사하며 이쪽을 마저 안내하는 모습이 시야에 비쳐온다.
‘이 새끼… 재미있어 보이자너….’
“…….”
“…….”
“그럼, 삼 일 후에 저택에서 뵙겠습니다.”
“네. 저택에서 다시 뵐게요.”
“…….”
“…….”
‘농담이 아니라 간만에 얼굴에 활력이 도는 것 같자너.’
아무래도 지금 이 상황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상상 이상으로 말이다.
“…….”
당연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앞선 대화에서 갑작스레 진 군사가 얄미워져 내 마음대로 일을 저지른 것뿐이었지만 이 새끼에게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와… 진짜 이 새끼 이거 순 변태 새끼 아니야?’
간만에 살아 있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가.
‘진짜 어처구니없자너.’
아마 지금의 상황을 게임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리라. 그것도 꽤 흥미진진한 게임 말이다.
당연히 평소에 하던 게임과는 다르다. 체스 말을 옮기고, 서로 가지고 있는 패를 계산하는 것 따위의 게임은 아니었지만 어떤 관점에서는 게임과 다를 바 없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서로의 뜻을 종용하기 위해 자신의 패를 숨기고, 여론과 언론을 움직이는 과정이었으니까.
아마 녀석은 그냥 여론과 언론의 압박을 참고 견디며, 무조건 안 된다고 고집부리지는 않을 것이다. 본인을 설득시킬 수 있다면 시켜보라는 거겠지. 아마 녀석도 자신의 입장을 내게 설득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진짜 이런 거 좋아하는 거 실화냐고….’
“…….”
‘변태 새끼 진짜….’
“군사님이 뜻을 굽히셔도 제가 손님이니까 져 주신 거라고 생각할게요.”
“그럴 일은 없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무조건 이겨야지.’
이쪽도 지는 것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
정원 밖으로 나가자 아니나 다를까 언론에 관심이 쏟아진다. 평화사절단을 비롯한 호위 인력이 그들을 저지하고 있었지만, 이쪽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를 듣기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저들에게는 아쉽겠지만 구태여 입을 열지 않는다. 대중의 상상력에 맡기는 것이 옳은 선택지라는 판단이 선다.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곧바로 마차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마무리. 당연하지만 씁쓸한 표정과 슬픈 눈을 보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명예추기경님!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 산책회담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물러나세요! 물러나세요!!”
“지금은 아무것도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니, 일개 병사가 뭔데 아무것도 말씀드릴 수가 없다고 나를 대변해? 근데 잘하기는 했어. 전형적인 대사였어.’
“희생과 부활의 성자님! 인터뷰 부탁드립니다! 교국민들과 공화국민들이 원하고 있는 새로운 시대에 대해서 여쭙고 싶습니다!”
‘난리도 아니자너.’
“이번 회담에 대해서!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
‘열기가 뜨겁자너.’
마차의 문을 닫기 전까지 계속해서 커다란 고함 소리가 쏟아지고 있지 않은가. 일찍이 마차에 도착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파란 길드원들 역시 뭔가 커다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박덕구가 궁금하다는 듯이 말을 이어왔다.
“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요? 형님?”
“교국과 공화국이 뭔가 하는 겁니까? 부길드마스터? 평화 콘서트니 뭐니, 평화의 노래는 도대체 뭡니까?”
“뭐, 그런 게 있어. 일단은 신경 쓰지 말고 일단 여행이나 즐기자. 그렇지 하얀아?”
“네… 네!”
“공화국에 3대 절경이라는 장소가 있더라고, 일단 이쪽부터 들려 보려고. 아마 이 국경 쪽만 벗어나면 호위 인력은 최소화될 거야. 공화국 쪽에서도 편하게 여행할 수 있게 신경을 써준다고 하니까… 몰려드는 인파들도 통제해 줄 거고, 장소가 장소인 만큼 기자들은 어쩔 수 없지만 그나마 편하게 여행할 수 있을 거야.”
“정… 정말요!?”
“그래. 오랜만에 둘이서도 시간 좀 보내자.”
“좋… 좋아요! 좋아요!! 좋아요!!!”
조금은 어두웠던 정햐안의 얼굴에 화색이 핀다. 한소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다행이네요! 정하얀 님! 다행이에요!” 같은 말로 그녀의 기운을 차리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괜스레 이쪽을 책망하는 것 같은 눈빛을 보내면서 말이다.
‘나도 알아. 나도 안다고 소라야….’
아마 정하얀의 입장에서는 꽤 실망스러운 여행이었을 것이다. 마차를 타고 출발해서 국경을 넘기 전까지만 해도 무척 행복해하고 들뜬 표정이었다.
가방에 갈아입을 옷들을 한가득 챙기기도 했고, 이런저런 수다를 떨고 몸을 붙여오며 이번 여행에 대한 기대감을 표현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얼마나 기대를 했는지 한 시간마다 모자를 바꿔 쓸 정도였다. 여기서는 뭘 하고, 또 저기서는 뭘 하고 같은 계획을 짜 놓으며 오매불망 공화국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물론 마차 안에서의 생활을 지루해하거나, 싫어했다는 뜻은 아니다. 마차 안에 공간 확장 마법을 걸어 놓기는 했지만 그래도 6명이나 되는 인원이 편하게 생활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정하얀의 애착 인형이 되었으니 말이다.
한소라까지 정하얀의 옆자리에서 잠을 자 3명이서 같은 방을 사용한 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기는 했지만 아무튼 간에 정하얀은 마차 안에 생활에도 꽤 만족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간혹 행군을 쉴 때, 야외에서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하는 것도 좋아했고, 박기리 삼 남매와 함께 떠들썩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아라 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적은 공화국 여행이다.
오랜만에 타국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웬걸. 도착하자마자 그녀의 눈에 띈 것은 인파들이 몰려와 소리를 지르고, 플래시 세례는 터지고, 양국의 병사들은 서로 기 싸움을 하고 있는 모습.
본능적으로 오붓한 공화국 여행이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고 크게 실망했던 것이 몇 시간 전이었다.
‘진짜… 옛날 같았으면 바로 터졌자너.’
슬그머니 정하얀과 한소라를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다행히 두 명이서 손뼉을 짝짝 치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공화국의 3대 절경이래. 소라야! 여… 여긴가 봐! 여기네! 우와! 여기 폭포 봐! 사진으로 봐도 진짜 예쁘다.” “네. 원래 유명했잖아요.” 같은 말들을 주고받고 있는 것이 귀에 들려온다.
그러다 웃고 있는 나를 발견한 정하얀이 다시 한번 말을 이어왔다.
“근… 근데… 오늘은 어디서 자요? 오빠? 그리고 저녁 식사는….”
“지금부터 숙소로 출발할 것 같아. 아마 식사도 그쪽에서 할 거고.”
“오, 오랜만에 오빠랑 한잔하고 싶은데….”
“그래? 그럼 그렇게 할까?”
“네! 아… 그, 그리고 있잖아요. 사고 싶은 것도 있고, 구경하고 싶은 것도 있는데… 여기 시내에….”
“아. 그거 좋지.”
“어? 형님? 그럼 시내 나가서 한잔하고 와도 되는 거요?”
김예리가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찬성.”
“저도 찬성입니다. 그래도 힘들게 공화국에 도착했는데 펍에는 들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화국 술이 그렇게 맛있다고 하던데 말입니다. 인식저해 마법을 걸고 가면 크게 문제도 없을 것 같고… 그렇지 않습니까? 부길드마스터?”
‘쟤는 진짜 놀 생각밖에 없자너.’
“부길드마스터와 정하얀 님은 데이트를 하시고 나중에 합류하시고… 소라 씨도 저희랑 함께 가시죠.”
“아. 그게 좋겠네요.”
그렇게,
본격적인 공화국 여행의 신호탄을 터뜨리려고 했을 때였다.
갑작스레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여신의 손거울이 울려온 것.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자. 짜증 나는 기사 한 편이 시야에 비쳐왔다.
[그림자의 영웅, 진청 군사의 공식 입장 표명. 대륙민들은 인내심을 가져야만….]
“…….”
“…….”
녀석이 아예 선수를 쳐버린 것이다.
정면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