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546화
새로운 일상(1)
“…….”
“…….”
“…….”
“…….”
“오빠, 진 군사가 아무래도 안 믿는 것 같은 눈치예요.”
“그… 그래?”
“네. 확실해요. 절대로 안 믿고 있어요.”
“…….”
“그도 그럴 게, 그때 오빠 표정이나 말투가 얼마나 어색했는지 알아요? 여기 돌아온 진 군사를 보고 화들짝 놀란 것은 둘째 치거니와 누가 보더라도 거짓말하고 있는 게 빤히 보였잖아요.”
“…….”
“오빠 얼굴을 본 순간 눈치챘을 게 분명해요.”
“…….”
“평소에는 그렇게 거짓말을 잘하면서, 선의의 거짓말은 도대체 왜 이렇게 못 하는 건지… 진 군사 성격에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그때부터 고장 난 것처럼 행동한다니까요.”
“…….”
“베니고어가 컵케이크를 집어 던져도, 아무런 반응도 없고, 회의에 참석했을 때에도 멍하니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더라니까? 그것뿐이게요? 그날부터 왠지 모르게 기운이 없어 보여요.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업무 능률도 완전히 바닥이고요. 오빠 앞에서는 애써 당당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가끔 헛웃음을 터뜨린다거나, 집무실에서 쾅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거나, 혼자 욕을 내뱉는 소리가 들려온다거나 한다고요. 지난번에 몰래 집무실을 들여다봤는데 실성한 것처럼 천장을 바라보면서, 나를 잊었다고? 하… 나를? 이라고 중얼거리는 거 아니겠어요?”
“누나 말이 사실이라면… 심… 심각하기는 하네….”
“더 심각한 건 뭔지 알아요?”
“뭔데?”
지혜 누나가 과장된 연극 톤으로 손짓 발짓을 하며 입을 여는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그러고 보니… 해가 뜨는 걸… 바라보는 게… 좋다고… 했었지… 아이… 나….”
“…….”
“이것도 안 통해요.”
“…….”
“아무리 놀려도 안 통하더라고요. 조금은 화내거나 귀찮아할 줄 알았는데, 최소한 예전처럼 쿨하게 반응해 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안 통해요. 그냥 대충 준비한 것도 아니라, 베니고어랑 같이 분장까지 하고 찾아갔었다니까요. 대놓고 부들부들 떨면서 털썩 쓰러지는 연기까지 했는데 눈길도 안 주는 거 있죠? 그냥 계속 천장만 바라보다가 갑자기 책상을 부숴 버리고는 바깥으로 나가버리지 뭐예요? 뭘 하는지 따라가 봤더니 세상에나… 연초를 태우더라고요.”
“그거… 진짜 심각한 거지?”
“심각한 정도가 아니라 사람이 고장이 나 버렸다니까! 안 그래도 지금 뒤처리하느라 인력이 부족해 죽겠는데… 그 많은 업무를 담당하던 진 군사가 갑자기 멈춰 버리니까. 일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있겠냐고요! 베니고어도 덩달아 상심하고, 벨 이사 그 양반은 도대체 뭣 하는지도 모르겠고, 다른 애들도 고장 난 진 군사의 일을 도맡아 처리하기는 역부족이라고요! 원래 윗놈들 일 감각 없는 거 알잖아요! 몇몇 빼고는 그냥 낙하산으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거라고요!”
“그래도 맡은 일들은 열심히 하기야 하잖아.”
“열심히만 하니까 문제죠. 그 이상을 하려고 안 하니까 문제라고요! 이 새끼들 칼퇴하는 것만 보면 속이 뒤집어진다니까요?!”
‘이… 누나 적폐기는 하자너….’
“저도 웬만하면 이런 말 안 하는데, 정말로 힘들어요. 안 그래도, 오빠랑 진 군사랑 그쪽에 가 있는 동안 여기서 홀로 고군분투 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돌아오니까 더 바빠지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경우예요? 물론 밀린 일들이 많은 건 알겠는데…. 그래도 이건 아니죠! 관리 못 받은 지 얼마나 지난 줄 알아요?!”
“…….”
“…….”
“아니, 그 양반도 진짜 웃긴다. 누나. 그게 그렇게 충격 먹을 일인가? 뭐 평소에는 네놈이랑 알고 지낸다는 게 수치스럽다느니, 대화가 안 통하느니, 뭐니 온갖 막말을 내뱉을 때는 언제고 왜 자기가 충격을 먹고 그럴까? 막 예전에는 네놈과 함께했던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다고 했다니까. 자기가 원한대로 해 준거잖아? 갑자기 왜 청승이냐고. 그리고 내가 까먹고 싶어서 까먹었나? 그냥 나도 정신이 없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지….”
“제가 진 군사 심정을 어찌 알겠어요? 생각해 보니까 자존심이라도 상한 모양이죠. 근데 딱히 뭐라고 말은 못 했고,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으니까 더 스트레스받는 거일 수도 있고요… 왜요. 그 나르시시스트가 누군가한테 잊혀져 버렸다는 걸 쉽게 인정할 수 있겠어요?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빠한테 말이에요.”
“내가 뭘 했는데?”
“진 군사는 부정하고 말도 안 된다고 하겠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진 군사가 오빠한테 은근히 라이벌 의식이라도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푸핫! 누나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아니야.”
“아니, 그렇게 본격적인 라이벌 의식 말고요. 조금 더 라이트한 버전으로 말이에요. 라이벌 의식이라기보다는 유일하게 인정하는… 아니, 이건 아닌가.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제가 진 군사가 아니라… 아무튼 간에 최소한 비슷한 수준에서 대화가 통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하나일 거예요.”
“진 군사랑 내가 대화가 통했었나?”
“오빠, 진 군사가 정말로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랑 대화하는 거 못 봤죠? 얼핏 보면 그냥 적당히 예의 지키면서 할 말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무슨 유인원이랑 대화하는 것 같은 표정이에요. 내가 이런 원숭이 같은 놈이랑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니, 이 원숭이가 제법 말을 잘하는군. 이 원숭이가 이런 단어도 쓸 줄 안다고? 어라? 이 원숭이는 제법이군. 이런 표정이라고요. 최소한 오빠랑 이야기할 때는 그런 표정은 아니라는 거죠.”
“아니야. 누나. 걔 나한테도….”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요! 사람 참 답답하네. 진짜 오빠 면전에 대고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정말로 진 군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어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진 군사가 오빠 사이를 떠올려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다고요! 오빠를 원숭이로 생각하면 자기는 원숭이 이하가 되는 거잖아요! 걔는 절대로 진심으로 오빠를 깎아내릴 수가 없다니까요!”
“…….”
“진 군사가 오빠가 쓴 실적보고서나 기획안은 꼬박꼬박 읽어보는 거 알아요? 물론 저한테는 들으라는 듯이 유치한 발상이다. 녀석다운 저렴한 발상이다 같은 독설들을 내뱉기는 하지만, 그 바쁜 사람이 시간 쪼개서 매일매일 오빠 작품은 꼼꼼히 살펴본다고요. 그것도 거의 병적으로 살펴본다니까요? 오빠 기획안 읽어보고 자기 기획안을 뒤집은 게 한두 번도 아니에요. 갑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폐기된 기획안이 창고에 수십 개는 쌓여 있을 거고요. 아,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베니고어 님은 그 창고에서 주워 온 걸 그대로 제출하더라고요. 이름만 자기 이름으로 바꾸고요.”
“어쩐지… 저번부터 이상하기는 했어.”
“아무튼 간에 그 고고한 사람이, 그 자기만 잘난 줄 아는 독불장군 같은 사람이… 그렇게 에고가 강한 사람이… 그나마 자신이 원숭이가 아니라 인간으로 인정하는 사람한테 완전히 잊혀져 버렸으니….”
“…….”
“어떻게 생각해 보면… 상심이 큰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때마침 저벅저벅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슬쩍 시선을 돌리니 진 군사가 지나가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괜스레 지혜 누나가 더욱더 과장되게 팔을 흔드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던 것 같았는데, 지혜 누나가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심지어는 자신을 뒤따르고 있는 베니고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진 군사의 영향을 받았는지 덩달아 기운이 없어 보이는 그녀가 눈에 띈다. 뭔가 장난을 치거나 걸고 싶었던 것 같았는데 좀비가 되어버린 진 군사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크게 상심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진 군사! 진 군사!” 하고 괜스레 기운차게 그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녀석은 반응하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녀석을 스치듯 지나가던 벨 이사가 손에 든 문서를 놈에게 내밀었지만 그 역시도 반응하지 않는다. 결국 벨 이사가 인상을 구기며 놈의 손안에 문서들을 쥐여주고 나서야 사라지기 시작했다.
“멍청이가 되어버렸군.”
나와 지혜 누나를 향해 어깨를 으쓱거리고 놈을 가리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것 좀 어떻게 고쳐줄 수 있나?”
‘아니, 진짜 심각하기는 심각하자너.’
“이기영 후…배….”
이제는 베니고어마저 버림받은 고라니 같은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시선을 돌려보니 흔들고 있던 손을 멈추고 있는 지혜 누나가 눈에 비쳐왔다. 자기 말이 맞지 않느냐는 표정이었다. 자신과 내가 여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치채지 못하는 걸 봤느냐는 얼굴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살펴본 것은 당연지사. 의기양양한 표정 뒤로 숨겨진 모습이 찬찬히 눈에 들어왔다.
‘시바… 이 누나… 진짜 피곤해 보이네.’
언제나 철인 같았던 지혜 누나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물론 자기관리의 화신답게 그런 모습들이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자세히 보면 다크서클이 내려온 것이 명확하게 눈에 띈다.
동공은 탁해져 있었고, 언제나 반들반들함을 유지하던 피부도 푸석푸석해진 것 같다. 작금의 상황에 그녀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사실 2회차를 기준으로는 진 군사와 내가 그리 오랜 시간 동안 자리를 비운 것도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굴리고 있는 사업의 규모가 좀 크다 보니 지혜 누나 홀로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오매불망 녀석과 이쪽을 기다리고 있었음이 분명, 심지어 1회차가 완전히 닫혀 버린 과정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잠깐의 휴식도 취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제대로 된 인력이 필요한 시점이었다는 거다.
아니, 제대로 된 인력이 아니어도 괜찮다. 실제로 지혜 누나가 이렇게 된 이상 김현성도 이곳으로 불러오는 게 좋지 않을까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냈을 정도, 일이 바쁘니 일단 불러와 단순 업무에라도 박아놓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주장이었다.
당연히 여러 가지 문제로 그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기각되었지만, 실제로 고양이 손이라도 불러와야 한다는 건 이곳에 있는 모두가 느끼고 있는 심정이었다.
애초에 베니고어야 이곳을 그저 놀이터로 생각하고 있는 터라 진 군사에게만 신경을 쏟고 있었지만, 집무실을 돌아다니고 있는 이들을 보면 스트레스가 쌓인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벨 이사는 매번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고, 언제나 활기 넘치던 리무르아의 촉수도 축 늘어져 있었다.
지혜 누나와 상시 함께 움직이고 있는 로노베는 거의 초주검 상태였고, 아직은 이곳에 일을 맡기지 않을 거라고 했던 외신 사남매의 도미니온스는 비밀리에 차출되어 잡일을 맡고 있다가 발각되었다.
어디 그것뿐이랴.
로렌은 병이 났다고 했더랬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초월자가 병에 걸린다니… 베니고어가 열렬히 그녀를 변호했던 터라 그녀의 꾀병이 들통이 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이곳에서의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었던 로렌이 도망칠 정도라면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사하가랑 겔라도 싸웠다고 했었나?’
가장 나중에 들어온 신입들도 갑작스럽게 닥쳐온 재앙을 피하지는 못했다. 라베하의 커플 사막 신으로 그렇게 서로 못 죽어 살던 둘이 지금은 각방을 쓰고 있단다.
과도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가 바로 원인이었다.
‘윗동네 분위기 완전히… 장난 아니자너.’
그나마 우울한 분위기를 환기시켜 줬던 베니고어의 활기찬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는 상황, 이 모든 게 전부 진 군사 소실 사건으로 굴러간 스노우볼이라는 걸 떠올려보면 기가 찰 정도였다.
‘미치겠다. 진짜.’
그렇지 않아도 아랫동네에서도 바쁜 일이 많았던 상황이었는데 윗동네에서까지 문제가 터졌으니 더없이 당황스럽다.
혹시 이 새끼가 자신을 놓고 온 것에 앙심을 품어 일부러 이런 짓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괜스레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을 때, 지혜 누나가 다시 말을 이어왔다.
“그냥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아니라. 이건 해결해 줘야 해요.”
“…….”
“지금 오빠가 바쁜 건 알고 있지만 이대로라면 아랫동네에까지 영향을 미칠 게 분명하다니까요. 기껏 육망성 사태를 잘 해결하고 와서 새로운 사건에 휘말리고 싶은 거 아니죠? 오빠도 알고 있겠지만 지금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라고요.”
“…….”
“원래 시작이 제일 중요한 거 알잖아요. 완전한 대륙의 양육자로 인정받고 나서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이기영 정권이 시작부터 망했다는 소리 듣지 않으려면 저것부터 먼저 해결해야 할 거예요. 윗동네 애들이 노조 결성해서 피켓 들어 올리는 꼴 보기 싫으면 뭐라도 좀 해봐야 한다고요.”
‘아니, 그래서 대체 어떻게 해결해 달라는 건데….’
“뭘…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그녀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그건 저도 모르죠. 식사라도 같이 해봐요. 게임이라고 같이 해주든가.”
“…….”
“…….”
“무시당할 게 뻔한데?”
“그건 모르는 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