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545화
조우, 해후(23)
‘도대체 난 왜 아직도 여기에 있는 거냐.’
“이기영 이 개자식.”
헛웃음도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완전히 닫혀 버린 세계에 홀로 남아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신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홀로 남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2회차에서 온 이들은 본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뿐이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세계에서 아직까지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 말 그대로 이 세계는 텅 비어 있었다.
단순히 노을빛으로 물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폐허가 되어버린 린델이 시야에 비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 세계는 완전히 기능을 멈추어버린 세계선이었고, 완전히 버림받은 세계선이었다.
그야 응당 있어야 할 관리자가 사라져 버린 세계선이었으니 텅 비어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알맞는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참 이상하군.’
애초에 2회차가 시작되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시점에서 어떻게 아직까지 이 세계가 유지되고 있을까.
모든 것이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스터에그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과해 시스템이 오류가 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왔지만 이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 멍청한 녀석들은 전부 끝났다고 생각하겠지만, 아직까지 맞추어지지 않은 퍼즐이 있었던 거겠지. 그게 아니고서는 이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다.
이 버려진 세계에 남은 녀석이 하나 더 있었으니까.
좋든 싫든 간에 일단은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마음속 한구석에 있는 아주 작은 불안감을 다스리기 위함이었다.
‘내 생각이 맞아야 해.’
그 불안감의 정체는 그 개자식이 자신을 여기에 두고 온 것은 잊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이었다.
처음에는 분명히 의도적으로 자신을 남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끝을 맺는 과정에서 녀석에게 잊혀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분명히 존재했다.
평소였다면 그냥 차라리 잊어주기를 바라고 있었겠지만 이상하게도 이런 상황에서는 놈이 자신을 잊어버렸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치욕스러운 감정이 올라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리다. 차라리 장난을 치기 위해서라든지, 아니면 아직 남기지 못한 일을 위해 남겨 놓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낫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개자식.’
“개자식….”
만약 녀석이 자신의 생각을 알아차린다면, 역시 나르시시스트라든가 혹은 잊혀지는 것이 무서웠냐며 비웃을 게 분명하지 않을까.
‘절대로 잊었을 리가 없어.’
그래, 녀석이 자신을 잊을 리가 없다. 어쩌면 놈 역시 자신이 이곳에 넘어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에는 이 일이 완벽하게 마무리되지 않았음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해결되지 않은 숙제가 아직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깨닫고 있을 것이다. 지금쯤에는 이쪽과 접선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겠지.’
지금은 2회차와의 연결이 완전히 끊겨버렸으니 말이다. 육망성 또한 완전히 차단되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연락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전무하다.
혹시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해도, 그 멍청한 녀석이 그렇게나 커다란 문제를 짧은 시간 안에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에는….
“내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거겠지. 멍청한 자식. 끝까지 뒤치다꺼리를 하게 만드는군.”
괜스레 어울리지 않은 혼잣말을 중얼거린 이후에는 다시금 걸음을 옮긴다.
목적지야 뻔했다. 아직도 이곳에서 사라지지 않은 녀석이 하나 더 있었으니 놈이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물론 놈과 마주치는 것이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이 썩어가는 곳에서 계속해서 머무르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일부러 인기척을 내면서 다가서자 노을빛의 하늘을 배경으로 뒤를 돌아보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
“…….”
“뭐야? 아직 안 가셨습니까?”
1회차의 이기영이었다.
“…….”
“…….”
“무슨 볼일이 있어서 여기까지 행차하시지는 않으셨을 것 같은데… 도대체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당신은.”
“…….”
“…….”
역시나 던져올 줄 알았던 질문.
‘제기랄.’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런 곳에서 할 일이 뭐가 있다고….”
“버려진 세상과 함께 침몰하고 있는 주제에, 내가 이유를 말한다고 해서 네놈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나?”
“아니,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저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은 아니라서 말입니다. 그것보다 왜 이렇게 날을 세우고 그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2회차의 진 군사님께서는….”
“…….”
“혹시 화가 나실 만한 다른 이유가 있으십니까?”
“네놈의 얼굴을 바라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을 뿐이다.”
“에이. 아니면서. 저는 당신을 보는 게 처음이기는 하지만… 그것 때문에 화가 난 게 아니라는 건 동네 꼬마도 알아차릴 수 있을 겁니다. 혹시….”
“…….”
“그놈들이… 당신만 놔두고 간 겁니까?”
이런 질문을 던져올 줄 알았기 때문에 녀석을 만나기 꺼림칙했던 것이었다.
“…….”
“푸…하…푸…하헤하하하헤헤헤헿!! 정말입니까? 정말 두고 간 거예요?”
“…….”
“푸…하헤헤하하하하하하핳! 콜록! 콜록!! 아니, 어떻게 푸흐흐하흐흐흐흐헤헤헿!!”
“웃기는 소리. 분명히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을 텐데.”
“아니, 그러니까… 콜록! 콜록! 진 군사님 설명은 잊혀진 게 아니라, 진 군사님이 2회차의 이기영을 위해서 친히 이곳에 남아 뒤를 봐주고 있었다고요? 아니, 그게 아니면 명령이라도 받은 겁니까?”
“개소리. 녀석의 명령이 있었던 것도, 녀석을 위해서도 아니다. 단순히 끝나지 않은 일이 있다고… 내 자신이 판단을….”
“잊혀진 거… 맞는 것 같은데.”
“아니라고 말했다.”
“그렇게 2회차의 이기영에게 잊혀지는 게 마음에 안 드십니까?”
“쓸데없는 말장난. 대답할 가치도 없군. 아직까지 네놈이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보면 모르겠나? 이 이야기는 완전히 끝이 났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기는 하지만… 사실 저도 당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는 했습니다. 그래도 당신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진 군사님께서 저를 먼저 찾아와 주실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 뭡니까. 아니, 그것보다 더 생각지도 못한 게 뭔지 압니까? 당신이 2회차에서는 저와 같이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돼지 새끼가 결혼한다는 것보다 이게 더 놀랍지 뭡니까? 아니, 도대체 거기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어째서 당신과 제가 함께 일을 하고 있는 겁니까? 사이는 좋은 겁니까?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데….”
“쓸데없는 잡담은 그만, 나는 네놈의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 아니다.”
“그럼 뭣 하러 오셨습니까? 이 세계에 완전한 종말을 고하러 오셨습니까?”
만약 할 수 있다면 백 번이라도 더 종말을 고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열쇠는 내가 아니라 녀석이 쥐고 있었으니까.
“틀린 표현은 아니군. 네놈이 가지고 있는 미련을 지우기 위해서 찾아왔으니 말이다.”
“미련 말입니까?”
“그래. 아직까지 네놈이 이곳에 남아 있는 걸 보면 답이 나오지 않나?”
“…….”
“…….”
“이 대륙은 2회차의 이기영이 관리하고 있는 세계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놈의 의지가 아예 발현되지 않는 것은 아니야. 네놈이 그놈이고, 그놈이 네놈이기도 하니 말이다. 아직까지 네 파편이 이곳에 남아 있다는 것은 네가 아직까지 이곳에 미련이 남아 있다는 거겠지.”
“…….”
“…….”
“그런 것 같습니까?”
“답은 네놈이 더 잘 알고 있지 않겠나?”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뭐?”
“미련이 남아서 제가 존재하는 건지, 아니면 아직도 풀리지 않은 개연성이 존재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도 되겠습니까?”
“무엇을?”
“제가 생각해도 이상하지만 미련이 남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
“분명히 저는 똥 밭을 굴러도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입니다. 지금은 딱히 미련이 있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더 웃긴 건….”
“…….”
“이유를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파편만 남아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건지, 아니면 삶에 너무 지쳐 버린 건지, 아니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1회차와 저와 2회차의 저를 동일시하고 있었던 건지… 웃기지 않습니까? 솔직히 삶에 미련이 없는 사람들을 멍청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예를 들면 군사님 같은 사람처럼 말입니다. 아, 혹시 모를 것 같아서 말씀드리자면 1회차의 군사님은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한 여성을 잃은 이후에… 마치 죽으려는 것처럼….”
“그만. 내 이야기를 하려고 찾아온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했을 텐데?”
“뭐. 아무튼 간에 그렇다는 겁니다. 딱히 군사님께서 미련을 지우려고 하셔도, 남아 있는 미련 같은 게 없습니다. 어쩌면 이 결말에 만족하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네요.”
“만족한다?”
“네. 완벽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결말을 맞은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 여기에 왔을 때, 아니, 그러니까 돼지 새끼가 없이 이곳에서 생활하는 동안은 이 장소가 지옥처럼 느껴졌었거든요. 어째서 내게 이런 거지 같은 일들이 일어난 건지, 도대체 알타누스는 나를 어째서 이런 곳으로 불러들인 건지, 물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원망할 게 하나 즈음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
“그런데… 지금은 말입니다.”
“…….”
“그녀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네놈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로군.”
“저도 그렇게 느끼고 있는데 군사님은 오죽할까요. 틀림없이 제게는 어울리지 않은 말이지만, 솔직히 이곳에서의 제 삶이 후회가 없냐고 묻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저는 그녀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돼지 새끼를 만나게 해줘서 고맙고, 이지혜를 만나게 해줘서, 카스가노 유노를 만나게 해줘서 고맙고, 그리고 그들에게 결국 좋은 결말을 만들어줄 수 있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
“끝이 다가오니 별반 이야기를 다 하는 것 같네요.”
“흥… 어처구니가 없군. 네놈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걸 듣게 될 줄이야.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
“…….”
“당연히 구라죠.”
“뭐?”
“푸…흐헤하헤헤헤헤헤헤헿! 그걸 믿었습니까?”
“…….”
“…….”
“고맙긴요. 그 여자가 내 삶을 망친 장본인인데! 시바! 썩을 대륙에 들어와서 개고생만 하다가 가는데… 고맙긴 개뿔….”
‘미친 자식.’
“하지만 뭐… 조금은… 그러니까 아주 조금은 그녀에게 감사하고 있기는 합니다. 어찌 됐건 간에 그녀가 있으므로 해서 2회차가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게 정사겠죠. 지금처럼 2회차의 이기영과 2회차의 김현성이 반반씩 갈려 나가 2회차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
“군사님.”
“…….”
“사실 저는 이 세계에 남은 개연성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정말인가. 라고 물어보려고 했지만 이내 말을 삼킨다. 놈이 또다시 거짓말이라고 말하며 자신을 비웃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을 열게 된다.
“정말인가…?”
“아니요. 거짓말입니다.”
‘개자식. 제기랄.’
“애초에 남은 개연성 따위는 없어요. 이제 조금 있으면 이 세계는 닫히고, 군사님께서는 2회차로 돌아가게 되실 겁니다.”
“…….”
“이미 대륙은 리셋 버튼을 눌렀어요. 지금 이 세계가 유지되고 있는 건 그저 시스템을 재부팅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약간의 딜레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어떻게 그걸 장담할 수 있느냐고 묻지 마세요. 그냥 알게 되는 거니까. 본능적으로 말입니다.”
“…….”
“제 마지막 순간에 군사님이 함께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마지막, 마지막에 와서는 웃다가 가네요. 아! 그래도 군사님이 하나는 맞추셨네요. 제게 미련이 남아 있다는 거 말이에요.”
“…….”
“물론 그 미련도 곧 해결될 겁니다.”
“…….”
“세계가 끝나는 순간에 알타누스한테 고맙다고 말할 거거든요.”
“이유가 뭐지?”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2회차의 이기영에게 엿을 먹여주고 싶은 게 목적이죠. 솔직히 그 새끼 얄밉잖아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전부 다 알고 이곳에 들어온 거 알죠? 2회차 초반에 카스가노 유노를 통해서 1회차의 이야기를 엿보는 건 뻔할 테고… 그래요. 카스가노 유노가 녀석에게 보여주는 세계가 정사일지, 아니면 이 세계일지, 아니면 둘 다일지 잘 모르겠지만 단편적인 정보만 볼 수 있을 테니 이 짓거리라도 해놔야죠. 보험이에요. 보험. 아마 여기에 와서 알타누스가 없는 걸 알면 까무러칠 거야. 실제로 까무러치기도 했고요. 그렇죠?”
“…….”
“지금은 이미 전부 다 끝난 일이기는 하지만, 아마 고생 꽤나 할 거라니까요. 아니, 이미 이것 때문에 고생했잖아요. 김현성이 갈려 나갈 줄 알고 벌벌 떨기도 했다니까요.”
녀석이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썩 보기 좋은 표정은 아니었지만, 이기영의 얼굴로 짓는 표정치고는 꽤 괜찮은 표정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정말로 이기영을 골려주려는 것보다는 그녀에게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자기 자신도 속이는 놈이었으니, 놈 자신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아무튼 잠시나마 즐거웠습니다. 군사님. 이건 비밀이에요?”
“…….”
“…….”
녀석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
“…….”
“고맙다. 알타누스.”
이쪽을 바라보며 검지를 입술에 올리고, 한쪽 눈을 깜빡인 이후에 말이다.
저도 모르게 그게,
녀석다운 마지막이라고 생각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