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544화
조우, 해후(22)
“신도 인간과 다를 바 없다는 거야. 우리들도… 결코 완벽하지 않아.”
“…….”
“넌 그 사실을 잘 기억해야 돼.”
베니고어가 내게 했던 말을 되돌려 줄 날이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베니고어가 내게 그 말을 전한 이유가 외신들을 상대할 힌트를 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다른 의미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받는 입장이 아니라 전하는 입장이 되어보니 여러 가지로 느끼는 바가 달라지는 것이다.
아마… 어쩌면 베니고어는 내가 느끼고 있는 부담감들을 줄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 우리도 완벽하지 않고, 너희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 너 역시 완벽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실수해도 괜찮고, 혼란스러워해도 괜찮다.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고, 당연한 일이다.
라고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사실 지금의 상황에서 베니고어가 어떤 뜻으로 내게 저런 말을 남겼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내가 이 새끼한테 해주고 싶은 이야기자너.’
위의 말들은 내가 직접 김현성에게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였다.
물론 김현성은 지금 나누고 있는 대화들을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말이다.
‘생각해 보니까… 잘 기억하라는 말도 웃기기는 하네.’
아쉽지만 1회차의 김현성은 내가 해준 말의 속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녀석은 눈앞에 있는 초월자가 뭔가 대단한 말이나, 이 세계를 헤쳐나갈 수 있는 힌트를 던져준 것으로 아는 모양이다. 김현성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
“…….”
“완벽한 삶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우리 역시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워해. 누구나 다 발버둥 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네가 내게 흥미를 느꼈다는 건 말 그대로의 의미지. 결코 너보다 높은 곳에서 너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던졌던 말이 아니야. 네가 믿을지 믿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여기에 있고, 너와 짧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건 널 장난감 바라보듯이 바라보았기 때문이 아니라고.”
“…….”
“나는 너를 동등하게 여기기 때문에 이곳에 있는 거야. 나는 네 삶을 존중하고, 네가 행한 모든 것들을 이해해. 흑백에 상관없이 말이야.”
“…….”
“…….”
김현성이 아무 말도 없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
‘뭐야. 이 새끼 갑자기 왜 이래?’
그다지 감동적인 말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갑작스레 눈물이 터진 것이다. 속으로는 엄청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그런 티를 낼 수 있을 리 만무, 그저 의연하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대처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방금 전에 너희나 우리나 다를 바가 없다고 이야기를 한 직후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거리감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
“이해받았다고 생각했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네가 이 대화에서 이렇게 감정적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네게 이런 말을 하는 게 미안하기는 하지만 너를 위로해 주기 위해서 한 말은 아니었어. 말 그대로 너를 이해할 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냥…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그냥…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째서일까요….”
‘어째서긴 시바… 쓸데없이 감상적이 된 거야.’
다 무너져 내린 린델, 아니, 대륙, 노을빛으로 빛나고 있는 하늘, 끝나가는 시간.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다. 절절한 비지엠이 필요할 것 같은 분위기, 놈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배경음악이 깔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김현성은 이곳에서 누군가를 하염없이 찾고 있었다. 어째서 자신이 이곳에 남은 것인지 계속해서 의문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 어떤 초월적인 존재를 마주하고 있는 이 순간, 1현성은 끝이 왔다는 것을 직감했을 것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이유는 눈앞에 있는 남자 때문이고, 이 남자는 것이 자신의 마침표가 될 거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누구나 끝이 다가오면 감성적으로 변하게 마련이지 않았던가. 김현성의 현재 상태가 딱 그러했다.
별것 아닌 대화이기는 했지만 김현성이 감성이 터지기에는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환경이다.
심지어 저도 모르게 속에 꾹꾹 눌러 담았던 이야기를 꺼내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초월적인 존재를 만나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유는 자신도 모르겠지만 왜인지 모르게 대화를 하는 게 편하다고 느껴졌을 테니까.
“…….”
“…….”
여전히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녀석을 다시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난 알 것 같은데.”
“네?”
“네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네.”
“…….”
“…….”
“그래. 어떻게 보면 내가 네가 원하는 이상적인 상대의 조건에 딱 알맞을 수도 있었겠다. 나는 네가 이룬 것들을 모두 봐왔고, 네가 버린 것들도 모두 봐왔고, 네가 저지른 일들도, 네가 놓치고 있었던 것들도, 네가 가지고 싶어 했던 것들도… 그래 나는 네 모든 것을 봐온 사람이니까.”
“…….”
“네게는 그런 사람이 필요했었던 걸 거야. 네 감정과 생각과 삶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 말이야.”
“…….”
“그래, 네게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
“…….”
“내 생각이 틀렸나?”
“아마… 당신의 말이 맞을 겁니다.”
당연히 내 말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김현성이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은 아니기는 했지만, 혼자 속에 담아둔 것들은 언젠가 터지게 마련이었으니 말이다.
그래. 1회차의 김현성은 마치 시한폭탄 같은 느낌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어도 속은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지속되는 압박과 스트레스를 눌러 담기만 하고 있었고, 자신의 감정을 그 누구에게도 공유하지 못했다.
1현성에게도 누군가가 있었다면, 어쩌면 이야기의 결말이 지금과는 달랐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조금은 덜 불행하다고, 외롭지 않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군요. 아니, 어쩌면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요. 네. 당신의 말처럼 저는 감정적인 사람이니 말입니다. 쉽게 흔들리고 이런저런 것들에… 영향을 받는 줏대 없는 사람 말입니다.”
“…….”
“제 생각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었던 사람이 있었다면 적어도 이런 최악의 결말을 맞이하지 않았을지도요.”
“…….”
“…….”
“최악의 결말? 이제 전부 끝났다고 생각해?”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
“이걸 시작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겁니다. 이게… 이 이야기의 마지막입니다.”
“과연 그럴까?”
“만약 뒤가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저는 그것을 볼 자신이 없습니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경험했고 너무 많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아니야. 지금 당장은 그렇게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을걸.”
“네?”
“아주 조금의 계기가 있어도 달라지는 게 인간이잖아. 환경에 따라 인간이 얼마나 변할 수 있는지 누구보다도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않아?”
“…….”
“내가 어째서 이런 말들을 네게 하는지 궁금하지 않아?”
“…….”
“내가 봐왔던 게 지금의 너뿐이라고 생각해?”
“그게….”
“네가 원하는 대로, 넌 곧 만나게 될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곧 만나게 될 거라고. 너를 변화시켜 줄 사람 말이야. 네 실수를 바로잡아주고, 다시 일어설 자신이 없는 너를 일으켜 줄 사람. 그래, 아까 말했던 것처럼 네게 공감해 주고, 널 지지해 주고, 네 감정과 생각과 삶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곧 만나게 될 거야.”
“…….”
“너와 같이 울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될 거야.”
“…….”
“넌 아마 지금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들을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혹시 또 모르지, 언젠가는 네가 지금의 대화를 기억하게 될지도.”
“…….”
“…….”
살짝 고개를 돌려 2회차의 김현성을 바라본다. 녀석은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내가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의 시야로는 나를 담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제야 녀석이 지금의 대화를 기억한 것 같았다.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들을 말이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내가 지금 녀석에게 지껄이는 말들은 2회차의 김현성에게도 전하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했으니까.
혼자 고민할 필요 없다고, 혼자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다고, 너를 지지해 주고, 네게 공감해 주고, 감정과 생각과 삶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여기에 있다고, 심지어는 네가 저지른 일들도 함께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이다.
1회차의 김현성은 벙찐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2회차의 김현성이 다시 한번 이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아마 기억을 더듬거리고 있을 것이다.
“현성아.”
-현성아….
“조금 이따가 보자.”
-조금… 이따가 보자….
그리고, 해가 뜨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움직이지 않았던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1회차의 김현성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커다랗게 입을 벌린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나를 바라본다. 뭐라도 말을 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인지 당황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굳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대신 손을 뻗는다. 멍하니 내 손을 바라보고 있던 녀석도 조용히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게 1회차의 김현성인지, 2회차의 김현성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아마 장담하건대 둘 모두였을 것이다.
그리고,
환한 빛이 다시금 나를 삼킨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뜰 때마다 여러 가지 장면들이 모습들이 지나간다.
보기 싫은 장면들까지 말이다. 너무나도 빠르게 지나갔던 터라 모든 것들을 전부 바라볼 수는 없었지만 그 과정은 마치 지금까지 쌓인 서사들이 거대한 건축물을 만드는 듯했다.
혹시나 혼자 온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어 옆을 바라보자 녀석도 같은 것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세계가 분해되고 조립되는 것 같다.
외신과 싸운 일도, 내가 녀석에게 미래를 선물했던 일도, 녀석이 내 배때기를 찌른 일도, 회귀자 사용설명서가 처음 연결되었던 일도, 두더지성녀의 포근한 안식처에서의 일도, 김현성이 죽은 줄 알았을 때의 일도, 녀석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었던 일도, 지금 이 1회차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과 내가 녀석과 갈등을 겪은 일도, 역병군주 때의 일도, 균열 박물관에서의 일도, 김현성이 나를 부길드마스터로 임명했을 때의 일도, 그리폰을 타고 라이딩을 했던 일도, 거울 호수에서 낚시를 즐겼던 일도, 라베하에서의 일도, 함께 식사를 하거나 별것 아닌 일상을 즐겼던 일도, 모두가 함께 있었던 자리에서 녀석이 술주정을 벌였던 일도, 캐슬락에서의 일도, 암시장에서의 일도, 검술을 가르쳐 줬던 일도, 모험을 떠났던 일도, 그래, 헤르엔에서 회귀자라는 것을 고백했던 일도.
그리고
튜토리얼에서 처음 마주치고 인사를 나누었던 일도.
-…….
-제 이름은 김현성이라고 합니다.
-이기영이라고 합니다.
모든 건축물이 쌓이고 나서야 우리가 있는 곳이 1회차가 아니라 2회차라는 것을 깨닫는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무너진 린델이 아니라, 끝나지 않을 노을빛으로 가득 찬 세계가 아니라, 다시 시간이 흐르고 있는 장소라는 것을 깨닫는다.
하늘이 흐르고 있었다. 도시 안에 있는 사람들이 비치고 있었다. 두 눈이 빛나고 있었다.
김현성이 조용히 나를 바라본다.
“…….”
“…….”
나 역시 녀석을 바라보며 한참을 고민하다, 장난스럽게,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
“…….”
“…….”
“…….”
“이렇게 다시 보게 됐네요? 다시 인사드릴게요. 이기영이라고 합니다.”
“…….”
“…….”
“제… 이름은 김현성이라고 합니다.”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후기로 또 인사드리는 흙수저입니다! 로헨 편에 이어서 후기를 남기는 건 두 번째네요!
로헨 편도 로헨 편이었지만, 육망성 편도 쓰다 보니 너무 길어지게 되어서 왠지 모르게 후기를 남기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했었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쓰다 보니까 점점 더 무거워지고 호흡이 느려져서 제가 더 지치더라고요. 오히려 로헨 편보다 스케일이 더 커진 것 같아서 후기를 남겨야겠거니 하고 생각했습니다! 흙.
왠지 모르게 ‘3부 완’이라는 느낌도 들어요! 아쉬운 점도 많지만 이상하게도 뿌듯합니다….
1부가 본편이었고, 2부가 로헨 편, 3부가 육망성 편, 두더지성녀 편이 뭔가 특별편… 같은 느낌으로 돼서… 왠지 모르게 기념인장이나 업적을 차곡차곡 달성하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마음 같아서는 4부, 5부 느낌으로도 써보고 싶지만… 저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도전은 해보고 싶은데… 이번에는 진짜 외전다운 외전을 쓰고 싶습니다. 흙.
그러다가 또 갑자기 이상한 게 튀어나올 수도 있기는 하지만요. 예를 들면 몇몇 독자님들이 원하시는 무협으로 트립한다든가….
분명 욕심은 있기는 해요. 문제는 제가 무협을 잘 몰라서 개방에서 화산검법을 쓰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거지만요.
물론 정말로 그럴 일은 희박하겠지만, 지금까지 회사설을 따라와 주신 분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당황하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이렇게 길게… 무려 1544화 동안 회귀자 사용설명서를 읽어 주시는 많은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분명 정 때문에 따라와 주시는 분들도 계시겠죠. 저도 그만큼 아이들과 헤어지기 힘이 드네요. 도대체 언제 완결 칠 거냐고 윽박을 지르셔도 이해합니다. 매번 놓아주고 싶은데 놓아주기 힘들어요.
이러다 갑자기 어느 날 지칠 수도 있지만 힘이 닿는 데까지는 쓰고 싶더라고요.
끝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기영이와 아이들의 이야기를 끝내기 싫은 지경까지 와버렸어요. 얘네들이 멈추는 걸 보기가 싫더라고요. 미친 것 같아요. ㅜㅜ 진짜 미친 것 같아요.
아직 남아 있는 떡밥이 있기도 하고요.
사실 앞으로의 계획은 예정되어 있는 게 없어서… 외전다운 느낌으로 글을 쓰면서 이후 에피소드를 구상하려고 해요. 머리가 돌아가야 나오겠지만 한번 힘내보려고요!
4부, 5부로 가서 결국에는 2710으로 갈지, 아니면 적당한 에피소드로 마무리하게 될지 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흙수저가 될 것이라는 건 약속드리겠습니다!
모두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어쩌면 이번 주까지? 아니면 목요일까지 육망성 편 에필로그가 나갈지도 몰라요! 이후에는 다시 대륙에서 일어나는 소소… 네… 소소한 이야기, 밀린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두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흙수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