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540화
조우, 해후(18)
표정 변화가 없던 녀석이 간만에 미소를 흘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좀 안타깝네….’
녀석이 허탕을 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이 멸망한 세계에 남은 것은 진 군사와 1기영, 박덕구뿐 아니었던가.
상관도 없는 엄한 곳을 뒤지면서 설레하고 있었으니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
‘선물상자에 아무것도 안 들어가 있자너.’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이것보다 더 큰 비극도 없을 것이다.
“…….”
“…….”
녀석은 침을 한 번 크게 삼킨 이후 폐건물의 안으로 들어선다. 아까와는 다르게 조금을 불안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어쩌면 녀석도 이미 이 건물에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걸 예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냥 희망을 놓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복권을 산 이후에 당첨되면 무엇을 할까 생각하는 사람들처럼, 녀석은 만약 안에 사람이 있으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 혹여나 안쪽에 있는 사람들이 놀라지는 않을까, 굉장히 조심스러워하는 모습도 눈에 띈다.
이런 세계였으니 사람이 사람을 경계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일지도, 아니, 어쩌면 사람들이 자신을 무서워할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녀석의 덩치는 작은 편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니까.
어깨는 떡 벌어져 있었고 온몸은 근육질이다. 그나마 두꺼운 옷을 입으면 태가 나지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몸을 드러내면 밀도가 높은 근육으로 꽉 차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잘 빗어진 조각도 녀석의 몸만큼 단단하지는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 정도였다.
놈의 얼굴에 그 모습을 조금은 가려질지는 몰라도, 기본적으로 무표정의 녀석은 조금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심지어 이곳은 대륙이었고, 녀석은 검도 들고 다니고 있지 않은가.
만약 겁이 많은 사람이라면 김현성을 보자마자 도망치려고 할 것이다.
녀석도 자기가 어떻게 비칠지 조금은 알고 있으니 저렇게 조심스러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눈에 띈다.
안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녀석의 얼굴에 화색이 감돈다.
“아….”
조금은 기대하는 얼굴로 조심스레 방 안을 살펴보던 녀석의 눈에 띈 것은 열려 있는 창문과 거기에 걸려 있는 옷가지다.
당연하지만 사람의 흔적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다.
“하… 하하….”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곳을 멍하니 바라보는 놈의 눈에 실망감이 감돈다.
이미 수백 번은 넘게 겪어 왔던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금의 상황이 실망스러운 것 같았다.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하… 하하….”
‘그래. 그럴 리가 없는데… 왜 그렇게 열심히 찾고 있는 거냐고.’
“그럴 리가 없는데… 하… 하하… 흐… 으윽….”
‘아… 이 새끼… 또 운다.’
“흐… 으으윽… 흐으으윽… 으… 으으으윽….”
아마 실제로 이 영화를 보고 있었다면 이 장면이 티켓을 팔아먹기 위한 영화사의 개수작이라고 생각했을 게 뻔했다.
“끄으… 으으윽… 으으윽….”
그야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기도 하다.
‘참 구슬프게도 울자너.’
저 캐릭터가 저렇게 어린애처럼 구슬프게 운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이었다.
‘종잡으려고 해도 종잡을 수가 없자너.’
그간 수많은 인간군상을 봐온 내 입장에서도 참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였다.
녀석을 처음에 봤을 때는 조금 차가운 인상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그리 느끼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아니야 실제로도 차가워.’
다른 이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을 볼 기회가 없었으니 너무 이른 평가이기도 했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적어도 몇만 명은 썰어본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렸던 평가이기도 했다.
얼핏 보면 그냥 정상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녀석의 눈 한쪽 구석에는 매우 어둡고 차가운 것이 존재한다.
조금 과장된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사이코패스 살인마 정진호와 비슷한 게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분명히 자신의 적에게는 자비가 없고, 사람을 죽이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녀석은 얼음장 같은 녀석일 거라고 결론을 내리는 게 딱히 이상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거다.
‘그렇게 프로살인마 같았는데… 어떻게 저렇게 어린애 같냐고.’
조금은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듯한 모양새다.
냉정한 살인마 새끼에게도 동심이라는 게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려주는 장면이다. 녀석의 안에도 순수함이라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보여주는 듯한 장면이다.
당연히 말도 안 된다고 대뜸 욕을 얻어먹을 장면이기도 했지만 이곳의 배경을 생각하면 또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놈은 지구에서 넘어온 이방인일 테니까. 어쩌면 지금 보여지는 모습이 녀석의 진짜 모습일지도 모르지.
뭣 모르고, 멍청하고, 순수했던 녀석이 오랜 시간 동안 이 대륙에서 지내면서 점점 인간성이 마모됐다면 놈의 이중적인 눈빛도 이해가 간다.
그야 지금까지 살아남지 않았던가. 놈이 지금까지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들을 거쳤을지, 얼마나 많은 일들을 저질러 왔을지는 딱히 유추하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아직까지도 꺼리기는 하지만 저 착해빠진 돼지 새끼도 전쟁터에 나가는 세상이다.
눈앞의 영화배우는 이곳에 있는 동안 엄청난 범죄들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사람도 죽여 봤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도 했을 것이고, 본인이 죽음의 위기에 처한 적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사회실험처럼 인간성을 시험받는 순간에서 잘못된 선택을 했을 수도 있고, 꼭 그게 아니더라도 이 모든 것들에 지치게 되며 조금씩 조금씩 인간성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다.
녀석이 저렇게 솔직하다면 솔직하다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어쩌면 이곳에 타인이 없어서겠지.
‘다른 사람 눈치를 볼 필요가 없으니까.’
매번 긴장 속에서 자신이 유약해 보일까 두려워할 필요도, 억지로 덩치를 부풀릴 필요도 없을 테니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순수해질 수 있는 순간과 환경에 처해 있는 셈이었다.
“흐윽… 흐으으으윽… 끄윽….”
냉정해질 필요도, 차가워질 필요도 없다.
타인의 시선이 없는 곳이었으니, 대륙이라는 장소에서 마모된, 녀석이 꼭꼭 숨겨놓은 자아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뭔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진짜 불쌍해 보이기는 하자너….’
오죽하면 내가 놈과 1기영을 주선해 주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을까.
‘조합, 은근히 좋을 수도 있겠는데 말이야.’
만약 정말로 내 의지를 전달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1기영이나 박덕구에게 놈의 위치를 알려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녀석에게 1기영과 박덕구의 위치를 알려주거나 말이다.
물론 지금 돼지 새끼를 양육하기 바쁜 1기영에게는 짐 덩어리가 늘어난 셈이겠지만, 괜찮은 심부름꾼 하나가 더 생긴다는 점에서는 나쁘지 않은 거래가 될지도 모른다.
정확히 어떤 성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안에 있는 면은 나름대로 순수해 보이기도 하고… 어쩌면 잘 어우러질 수도 있다.
함께 식사를 하고, 같이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며 웃고, 식재료나 생활필수품들을 구하러 다니고 말이야… 남아 있는 시간을 그나마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그래. 분명히 그럴 것 같은데 말이야. 최소한 진 군사한테 보내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자너.’
“…….”
“…….”
‘스스로 찾을 확률은 너무 희박하지? 알려줄 수 있으면 진짜 알려주고 싶은데… 빛으로 어떻게 표시라도 해줄 수는 없나?’
놈이 대륙을 열심히 뒤지고 있었지만 이 넓은 대륙에서 세 명을 무슨 수로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조금 과장해서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이나 다름없다. 놈 역시 자신의 행동이 무모한 행동이라는 것을 드디어 인지하기 시작한 것 같다.
‘아… 꺾이는 거 아니지?’
이런 행위들이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이제는 전부 놔버려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고 있는 듯하다.
“…….”
‘저기서 안 뛰어내리는 게 다행이기는 해….’
포기하지 말라고 놈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었지만 당연히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한참이나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던 녀석이 창문을 바라본다. 노을빛으로 물든 세상이 비춰지고 있었다.
문득….
‘어째서 내가 이걸 이렇게… 아니, 도대체 이게 뭐가 재미있다고 보고 있을까.’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아마 이 이야기의 끝을, 저 남자의 끝을 보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늘은… 예쁘네….”
“…….”
문득….
문득 노을빛에 비춰지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익숙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디에선가 분명히 본 적이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
“그래…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찾아보자.”
분명히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고, 풍경이었다.
지금까지 느끼지 않았었던 의문이 갑작스레 머릿속에 들어온다. 대단한 것이 아니라 아주 기본적인 의문이었다.
‘얘는 여기에 왜 남아 있는 걸까?’
도대체 이 새끼는 여기에 왜 남아 있게 됐을까? 그리고 어째서 나는 이 남자를 모르고 있는 걸까?
물론 1회차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를 모르고 있다는 게 얼마나 이상한 상황인지는 깨닫고 있다.
눈앞에 보이는 남자가 강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 류한이나 성지훈 같은 놈들도 1회차에서 처음 마주한 놈들이지 않았던가.
대륙의 숨겨진 강자들은 모래알처럼 많고, 적어도 1회차의 인물들을 내가 전부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녀석이 강자라는 사실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 남아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녀석이 1회차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인물이라는 게 중요했다.
이곳에 머물러 있는 1회차의 인물이 1기영밖에 없다는 걸 생각해 보면 놈이 이곳에 남아 있는 게 얼마나 이질적인지 구태여 설명이 필요할까.
‘얘는 도대체 뭘까?’
이름도… 분명히 들었던 것 같은데… 왜 기억이 나지 않을까.
‘넌 대체 뭐야?’
한 번 의문이 생기기 시작하니, 계속해서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끊임없이 생각에 빠지게 되고, 자꾸만 녀석을 집요하게 바라보게 된다.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저는… 저는 김현성이라고 합니다… 혹시… 이곳에 남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래. 김현성.
“제… 제 이름은 김현성입니다! 혹시 이곳에 생존자가 있습니까?”
그래. 김현성이라고 했더랬다. 지난번에도 분명히 들었었던 것 같다.
“저는 김현성입니다!”
처음에 녀석을 봤을 때도, 분명히 녀석은 자신을 김현성이라고 소개하며 노을빛으로 가득 찬 공간에 목소리를 채웠더랬다.
“저는… 김현성… 입니다!”
그때에도 분명 기억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그 이름을 잊어버려 버렸다.
“저는 김현성입니다…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그래. 그때도 대답하려고 했었지. 들린다고 대답하려고 했었는데.
“거기 아무도 없습니까?”
나 여기 있다고 말하려고 했었는데.
“저는 김현성입니다! 저는… 린델의… 파란의 김현성입니다!
그래. 파란의 김현성. 나 알고 있어.
“아무도 없습니까?”
그래. 알고 있어. 분명히 알고 있었어.
“저는 김현성입니다!”
그래… 나 네 이름이 기억이 난 것 같아.
“저는 파란 길드의 김현성입니다!”
그래. 난… 너를… 기억하고 있어. 현성아.
잊어버리지 않았어.
현성아.
현성아!
현성아!!!
“현성아!!!!”
“…….”
“…….”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리고.
“네. 기영 씨.”
김현성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
내가 알고 있던 그 김현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