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539화
조우, 해후(17)
“도대체 왜 나만 이곳에 남겨놓은 거냐.”
대답을 듣지 않아도,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기영 이 개자식.”
진 군사가 짜증 내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게 당연하지 않은가.
‘확실히 이건 힐링되기는 하자너.’
심심하다면 심심하다고 말할 수 있는 현 상태에서 그나마 즐길 수 있는 유희였다. 할 수 있는 게 이곳을 둘러보는 것밖에는 없었으니 말이다.
사실 둘러본다는 표현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멸망한 1회차의 대륙에서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일들을 말이다.
‘그나저나…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내가 나 자신을 인지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진 군사의 거처에 놈의 취향으로 점철된 가구들이 들어서 있는 것을 보고서는 적어도 연 단위로 흐른 것이 아닌가 짐작할 뿐이었다.
“개자식!!”
갑작스레 화가 났는지 찻잔을 집어 던지는 모습을 보고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지만 웃음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육체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새삼스레 실감한 것도 잠시, 다시 한번 분통을 터뜨리는 녀석의 모습에 또 한 번 웃음이 튀어나왔다.
하기사 절대로 시간을 허투루 쓰기 싫어하는 성격이었으니 이곳에서 썩히고 있는 시간이 얼마나 아까울까.
물론 잉여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기는 하겠지만 생각에 빠지면 빠질수록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내가 자신을 보고 있단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을 보면 답이 나온다.
‘혼자만 꿀 빠는 꼴은 또 내가 못 보자너.’
물론 이곳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은 녀석뿐만이 아니다.
1기영과 박덕구 역시 이 무너진 노을빛의 세계에 자리하고 있다.
1기영과 돼지 새끼는 아예 살림을 차린 수준. 조용한 곳,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겠는 작은 주택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이쪽을 의식한 건지 차를 마시면서 짜증만 내는 진 군사에 비하면 다이나믹한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매일매일이 사건 사고, 1기영이 하루라도 소리를 지르지 않은 날들이 없었지만 적어도 놈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돼지 새끼! 제길! 후우… 시바 내가! 내가! 몇 번이나 이야기해! 옷에 뭐 흘리면서 처먹지 말라고 했지!”
“아니… 그게….”
“그리고! 흘리면서 처먹었으면! 바로바로 말을 하라고! 그래야 곧바로 지울 거 아니야! 왜 도대체 빨간 국물만 흘리는 거야. 왜! 도대체! 왜! 너는 빨간 국물만 흘려서 지우기 힘들게 하는 거냐고! 네가 빨래해? 네가 빨래하냐고!”
“아니, 그러니까! 내가 빨래한다고 그러지 않았소!”
“네가 하는 게 빨래야?! 요즘에는 그냥 물에 넣었다가 빼는 걸 빨래라고 부르나 보지? 어!? 네가 빨래하면 쿰쿰한 냄새가 빠지지가 않아서 시바! 아예 옷을 버려야 된다고!”
“아… 아니! 아니! 그… 그렇게 화낼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니까….”
“뭐?!”
“막… 막말로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옷에 뭐 좀 묻히고 다니면 어떻소?! 다 벗고 다녀도 신경 쓸 사람도 없는데! 그리고! 여기 천지에 널린 게 옷인데 그, 그냥 아무거나 주워 입으면 되는 거 아닌가?! 아무도 보는 사람도 없는데! 그냥 마음대로 살면 되는 거 아니냐니까!”
“내가 보잖아! 이 돼지 새끼야! 그리고 그냥 마음대로 살면! 어!? 그거 전부 다 습관 돼 이 새끼야!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야지! 보는 사람 아무도 없다고 짐승처럼 살래? 어?! 그래! 이 새끼야! 여기서는 그렇다고 쳐도, 나중에 돌아가서는 또 어쩔 건데! 그거 다 나쁜 습관이야. 돼지야! 지금이라도 버릇을 잘 들여야지 나중에 네가 황정연한테 구박 안 받고 살지! 덕구야… 박덕구 이 답답한 새끼야… 내가 괜히 잔소리하는 게 아니야.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이야기라고… 이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라고….”
“그… 그건 알고 있는데….”
“덕구야 지금에야 황정연이 너 좋다고 쫓아다니지? 그거 다 네가 기적적으로 황정연의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가서 그러는 거야. 나중을 봐야지 나중을, 나이 먹고 버림받은 남자만큼 불쌍한 게 없어요. 내가 보니까 네가 딱 그 짝이야. 그러다 나중에 도미로 같은 애들 만나는 거야.”
“그러니까… 그… 도미로는….”
“지금 이렇게 교육을 안 시켜 놓을 수가 없다고. 어? 네가 막말로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어?! 전부 다 할 줄 안다고 개소리하고 있지만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느냐고! 물에 담갔다가 빼는 빨래? 빨간 고기 국물 스튜 요리? 집안일에 도움이 안 되면 최소한 방해는 하지 말아야 할 거 아니야! 새끼야!”
“아… 아니….”
“시바! 내가 너한테 많은 걸 바라?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것 같아?! 너 안 되겠다. 이 새끼야. 오늘 한번 검사 한번 해보자. 화장실 청소했어?! 어?!”
“하… 하기는 했는데….”
“안 봐도 뻔하지. 시바! 보이는 곳만 닦았겠지. 덕구야. 내가 너한테 결코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에요. 어!? 딱 화장실 청소랑 쓰레기 버리는 거 그거 딱 두 개잖아. 그런데 그것도 제대로 못 하면 어떻게 해?! 시바 속 터져! 속 터진다! 시키는 것도 그것도 제대로 못 하면서 뭐?!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거 아니냐고!? 여기서 마음대로 살면 거기서는 마음대로 안 살 것 같아?!”
‘웃음꽃 피어나는 거 맞나…?’
“내가 깜빡했지. 내가 깜빡했어. 시바… 이 새끼! 빨리 안 데려가고 뭐하는 거야! 진짜?! 내가 이 돼지가 뭐가 좋다고… 시바! 내가 미쳤지… 내가 내 팔자를 꼬았어. 제길!”
현타가 온 것 같기는 하다. 자신이 말년에 이렇게 개고생을 하려고 돼지와 재회했나 하는 표정이다.
주눅이 든 박덕구와 오히려 기세등등해져서 소리치는 1기영의 모습이 보였지만 아마 정말로 돼지 새끼가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놈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하루에도 이런 사건 사고들이 몇 번씩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얼핏 보이는 모습들이 굉장히 행복해 보였으니 말이다.
실제로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 피식 피식 웃고 있는 모습이나, 귀찮은 집안일들을 떠맡아 하면서도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 걸 본 적이 많다.
지금이야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손바닥으로 탕탕 치고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 보인다. 장담하건대 놈은 영원히 이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아닌가? 끝나기를… 바라고 있나?’
“시바! 더 이상 같이 못 살겠으니까! 당장 옆집으로 꺼져!”
“아… 아니… 내… 내가 잘못했다니까.”
‘조… 조금은 진짜로 현타 온 것 같기는 하자너….’
박덕구와 함께 산다는 자신의 꿈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새삼스레 깨달아 버린 듯하다.
‘애 하나 키우는 거랑 똑같기는 해….’
“그래. 읽으라는 책은? 어?! 읽으라는 책은 읽었냐고!”
아니, 이쯤 되면 진짜로 애를 키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 나는 글… 글자가 눈에 안 들어와서… 또, 또 나는… 그… 몸을 쓰는 직업인지라… 체력 단련에… 더… 공부하는 건… 영….”
“내가… 내가 공부하라고 했어?”
“그… 그게 그 말….”
“책 읽으라고 하는 거랑, 공부하라는 거랑 같아?! 너… 너 그러다가 사람들한테 무시당한다. 물론 네가 거기서 잘나가는 전위라는 건 알고 있겠지만, 거기는 전쟁통도 아니라며? 사교모임도 조금 나가고, 네 형님 따라다닐 일이 많을 텐데… 그럴 때 그냥 머리에 든 것 없는 돼지 새끼로 남고 싶어?”
“아… 아니….”
“물론 네 면전에 대고 그런 개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없겠지. 근데 덕구야. 그런데 나가서 몇 마디 할 수 있는 거랑, 못하는 거랑은 천지 차이야. 네가 왜 너한테 그렇게 열심히 테이블매너를 가르치려고 그러겠어?”
“더… 맛… 맛있게 먹으라고?”
“미… 미치겠다. 진짜. 누가 이 새끼야. 네가 동네 술집에 가서 고기 뜯고 술 마시는 거 가지고 뭐라 그래? 너도 작위를 받을 수도 있고,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랑 만날 일이 아예 없지 않을 텐데… 적어도 바보처럼 보이지는 말아야지. 어?! 다시 한번 말하지만 공부하라는 게 아니야.”
문제는 이 새끼가 그냥 애 엄마가 아니라 지독한 헬리콥터 맘이라는 것이었다.
‘덕구도 숨 좀 쉬게 해줘….’
그리고 너도 숨 좀 쉬어야 할 것 같아.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머릿속에 지식 좀 때려 박아 놓으라는 거지.”
“알… 알겠다니까.”
“알겠다고 하고서는 또 대충 씻고 자겠지. 시바. 안 되겠다. 오늘은 저녁 먹은 이후에 같이 책 읽을 거야. 알겠어?”
“아니… 아… 아니…이….”
스스로를 인지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동안 박덕구와 1기영이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전부 볼 수는 없었지만 저 돼지의 살이 빠진 것을 보아하니 돼지를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혹독한 트레이닝을 지속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테이블매너는 물론이거니와 쓸 만한 지식들을 억지로 머릿속에 쑤셔 넣기도 하고 심지어는 사교댄스로 가르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내가 장담하는데. 저 새끼… 2회차로 넘어가는 순간 분명히 다 까먹을 거야.’
아마 1기영 역시 그런 사실을 깨닫고 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헬리콥터 맘이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돼지 새끼가 조금이라도 더 성공하길 바라고, 다른 이들에게 조금 더 존중받기를 원하고, 인간적으로도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 때문에 결코 쉴 수 없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언제 2회차가 시작될지, 자신에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남아 있는지 모르고 있는 것이 중요했다.
주어진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쓰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내가 미쳤다는 둥, 힘들다는 둥,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었지만 장담하건대 녀석에게는 돼지 새끼에게 줄 것이 산더미처럼 남아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게 뻔했다.
나 역시 정확히 언제 2회차가 시작될지 알 수 없었지만 만약 2회차가 시작되는 시기가 다가온다면….
‘뭐가 어찌 됐든 후회하기야 하겠지.’
전하지 못한 것들이 생각나기야 할 것이다. 돼지를 잃었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아무리 퍼줘도 부족하다고 여겨질 테니 말이다.
박덕구 역시 이런 1기영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있었으니 놈의 혹독한 훈련에 따라와 주고 있다.
물론 일반인의 기준이 아니라 녀석의 기준으로.
“그리고 내일은 춤추는 법도 복습할 거야. 알아들어?”
“끄응….”
그리고,
무너진 1회차에 남아 있는 인물이 또 하나.
“…….”
“…….”
도무지 기억이 안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였다.
“…….”
“…….”
진 군사가 힐링물이고, 박덕구와 1기영 쪽이 시트콤 같았다면 이쪽은 시리어스한 다큐멘터리다.
아니, 다큐멘터리보다는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주인공도 영화배우처럼 잘생기기도 했고 말이다.
‘진짜 잘생기기는 했자너. 지구에 있었을 때 무명배우 같은 거였나 봐. 진짜.’
아무튼 간에 영화의 제목은….
영화의 제목은 아마 멸망한 세계에 혼자 남은 남자 따위가 아닐까.
솔직히 말해 큰 사건 사고가 없었던 이야기였던지라 장난으로라도 흥행할 거라고 말하기는 힘들었지만, 주인공의 외모가 화제가 되어 티켓이 팔리기는 팔렸을 것이다. 어쩌면 매니아층을 형성해 손익분기점을 가볍게 넘겨 버렸을지도 모른다.
당연하지만 웃음기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다.
웃음기 정도가 아니라 녀석을 보고 있자면 우울해질 정도였다.
“후우… 하아….”
‘한숨 쉬는 것 좀 봐…’
주인공의 표정 변화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눈을 뗄 수가 없다.
녀석의 비주얼 때문이 아니다. 이런 지독한 상황에 놓여진 남자에 대한 동정심도 아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상하게도 계속 시선이 끌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진 군사보다 녀석을 더 많이 관찰하기 시작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거기 누구 있습니까?”
‘오늘은 멀리까지 나왔네. 매일매일 부지런하기도 하자너.’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었으니 놈이 사람을 그리워하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놈의 얼굴에 화색이 비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제 딴에는 사람들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조심스럽게 바닥과 주변을 확인하고 있다.
‘웃었네.’
웃었자너.
표정 변화가 없던 녀석이 간만에 미소를 흘리는 모습이 눈에 비쳐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