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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535화 (1,533/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535화

조우, 해후(13)

문득 김현성의 얼굴을 바라본다.

녀석의 한쪽 눈이 다시 빛나고 있었다.

아마 내 눈도 빛나고 있을 것이다.

“…….”

“…….”

가면을 벗자.

진심으로 김현성을 마주하자.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숨기지 말자.

같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어쩌면 회귀자 사용설명서에 이상이 생긴 이유는 김현성이 아니라 나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쌓이고 쌓인 수신함의 편지들을 용량이 터질 때까지 내버려 두어 생긴 문제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갑작스레 회귀자 사용설명서가 되돌아오고 있는 이유도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은가.

“…….”

“…….”

물론 김현성에게도 문제가 아예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녀석 역시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많은 일들을 보고 겪고 느끼고, 생각하며, 고뇌하며, 이곳에 당도했다.

내 몸이 자란 것처럼, 녀석의 정신도 이전보다 더욱더 성장했기에 우리가 다시금 연결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서로의 눈에 다시 빛이 돌아오기 시작한 것은 내가 수신함을 열었기 때문이다.

아직 회귀자 사용설명서에 대해서, 이 신화 등급의 특성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다.

회귀자 사용설명서는 굳이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류하지 않는다. 누구의 잘못이 더 크다고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이게 단순한 프로그램 같은 것이 아니었지만 이혼 전문 변호사는 더더욱 아니라는 거다.

녀석과 내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또한 사유 중에 하나로 볼 수도 있겠지만 결국 오류가 생긴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을 것이다. 그 근본적인 이유 중에 하나가 방금 해결된 것일 테고 말이다.

‘솔직히 확신은 못 하겠어.’

특성에 대해서는 이쪽 역시 연구하고 있는 중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눈에 보이는 결과가 있다 보니 조금 더 힘이 쏠릴 수밖에 없다.

편지의 일부를 들춘 것만으로도 녀석의 눈이 빛나고 있다. 그리고 내 눈도 빛나고 있다. 만약 모든 편지를 전부 읽고 녀석에게 답장해 준다면 무언가 새로운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회귀자 사용설명서의 등급이 상승하거나,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김현성과 내 관계도 한층 더 진일보할 수 있지 않을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든다. 쓰고 있는 가면뿐만이 아니라, 정말로 가면을 벗는 것은 어떨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아니야.’

“…….”

‘안 돼.’

“…….”

‘나는 준비가 안 됐어.’

솔직히 평생이 지나도 준비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적어도 수신함을 열어봤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싶다.

급할 때일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회사설의 등급 상승이건, 변화든 간에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회귀자 사용설명서가 아니라 나였다.

이게 돌아온 게 기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김현성이 노을이 되는 꼬라지를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김현성이 자신의 눈이 빛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내 눈이 빛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이었다.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은 이쪽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1회차의 모든 것을 목도한 기영 씨가 지금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 대답을 1회 차의 이기영에게서 찾는다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아마 녀석이 내게 이유를 알 수 없는 편안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성장하지 않는 사람은 없어. 넌 멍청하지만 실수와 실패에서 배우는 사람이니 달라지기야 했겠지. 하지만 그 답을 내게서 찾으려고 하지마. 난 답을 줄 수 있는 사람도 아니거니와 네게 쓸데없는 조언을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도 아니니까.”

“…….”

“넌 많은 게 바뀌었지만 많은 게 바뀌지 않았구나. 겁먹으면 숨어버리는 것도, 염치가 없는 것도 그대로야.”

“죄송합니다.”

“넌 대체 뭘 원하는 걸까.”

“…….”

“도대체 뭘 원하고 있길래, 여기까지 이렇게 찾아와 모든 걸 놓고 내 앞에 나타난 걸까. 아니, 네가 원하는 건 뭔지 알 것 같지만 지금 우리가 나누고 있는, 보내고 있는 시간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튜토리얼 때의 이야기도, 그리고 분기점에서의 가정도, 그리고 네 개인적인 이야기들도, 전부 인상적이었어.”

“…….”

“너에 대해서 뭐든지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었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지. 그래, 너에 대해서 더욱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는 건 맞아. 하지만 현성아. 네가 무슨 목적이 있어야 대화를 할 수 있느냐고 내게 반문했지만 너도 알고 있잖아. 지금 우리의 모습을 봐. 이런 코미디가 또 없을 거야.”

“…….”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이 대화에서 찾고자 하는 게 뭐냐고.”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제가 이런 쓸데없는 말들을 늘어놓는 것인지, 어째서 형과 대화가 하고 싶었던 건지, 어쩌면 모든 게 자기변명일 수도 있을 겁니다. 저는 분명히 변명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었고, 저를 정당화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었지만 어쩌면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형이 제 사정을 알아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릅니다. 염치없지만 형이 저를 용서해 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최소한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을지도요.”

“난 너를 이해하고 있어. 아까도 말 했잖아. 네 사정과 네가 거기까지 닿은 과정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다고,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네 상황에 몰린다면 너와 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하지만 너를 용서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야.”

“…….”

“우리 이야기는 동화처럼 아름답게 끝날 수가 없어.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걸 너도 알고 있잖아. 네 입으로 직접 우리의 관계가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었나? 혹시 너도 내 사과를 바라고 있었던 걸까.”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면 넌 아마 이 모든 상황들이 아쉬운 걸 거야.”

“…….”

“지금의 네 삶을 내려놓기가 아쉬운 거라고. 넌 네가 마침표를 찍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사실은 준비가 되지 않은 걸지도 몰라. 네가 알타누스를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겠지만, 나름대로의 결착을 짓고 싶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거야. 이곳에 미련이 남아 있었던 거라고.”

분명히 미련은 남아 있었겠지만 김현성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끝마쳤다. 실제로 녀석이 노을이 되기까지 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지금 내가 던진 질문은 녀석이 내 말에 긍정하기를 바라서였다. 김현성을 설득하기 위해 덫을 깔아놓은 질문이다.

하지만 녀석은 고개를 젓는다.

“미련이 남아 있다는 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미련이 남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제야 제가 있을 곳을 찾았다는 생각했는데… 이제야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장소를 만들었는데…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사람을 만났는데… 미련이 없다고 한다면 당연히 거짓말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제 결심에 변함은 없습니다. 이게 제게 주어진 마지막 일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입니다.”

‘아니야. 그거 아니야. 그러지 마. 그거 아니야.’

“대륙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고, 기영 씨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입니다. 제 삶의 마침표이기도 하고, 제 잘못을 속죄하기 위한 길입니다.”

‘아니라니까. 시바. 아니야. 마침표 아니야. 속죄 안 해도 돼. 이미 전부 속죄했어. 내가 용서했어. 내가 라헬의 피해자들이랑 너 대신 합의 봤어. 진짜 그러지 마.’

“네. 제 잘못을 속죄하긴 위한 방법입니다.”

‘다른 방법도 많아 평생 대륙을 위해서 시바 봉사해.’

김현성의 표정이 조금 변하고 있다. 조금씩 조금씩 일그러지는 얼굴이 보인다. 지금까지 녀석이 보여줬던 모습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지금 이 순간 녀석의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장면들과 감정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을 것이다.

“…….”

“…….”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기 위한 마지막 방법이라고 지껄인 이후로 스탠스가 변했으니 아마 라헬에서의 일을, 대륙에서 자신이 저질렀던 모든 잘못들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침착했던 녀석의 얼굴이 금이 가기 시작한다. 1기영과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썼던 가면이 깨지기 시작한 것이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있었고, 감정이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아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느껴진다.

수치심,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 두려움과 공포, 여러 가지 감정이 놈을 스쳐 지나가고 이내 잠식한다.

나는 김현성이 지금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녀석의 눈에서 지독한 후회와 미안함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두 눈에서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김현성의 입이 덜덜 떨린다.

“죄송합니다.”

당연히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마음속에서 정말 우러나오는 말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증오심을 품고 있는 이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전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건만, 아니, 그게 가능한 것인지도 의문이 일었지만 김현성은 잠시 그 감정을 치워 버린 것인지, 속죄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히, 용서해 주지 않으실 것도, 제 사과를 받아주지 않으리란 것도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게 그저 제 마음이 편해지기 위한 일방적인 사과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저도 제 마음에 그런 부분이 아예 없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지만, 정말로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

“당신을 믿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믿지 않으려고 해서 죄송합니다. 지난 시절의 받았던 은혜와 감사함을 되돌려 주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당신을 상처 입혀서 죄송합니다. 당신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혀서 정말로… 흐윽… 정말로 죄송합니다. 모두 제 욕심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조금만 더 성숙한 인간이었더라면 라헬에서의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

“그곳에 있었던 모든 이들에게 일어난 일들은 모두 저의 책임입니다. 죄송합니다. 정말로… 정말로 죄송합니다. 흐으윽… 흐윽…. 정말로 죄송합니다.”

“…….”

“흐윽… 으…으으윽…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지금 김현성이 엄청 감정적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죄송합니다. 흐…으으윽….”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마치 둑이 터진 것처럼 눈물이 놈의 눈에서 흘러나온다. 몸을 부르르 떨고 있다. 종국에는 1기영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는 것처럼 미약하게 고개를 돌려 버린다.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얼마나 큰 죄책감을, 감정들을 느끼고 있었는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개중에서는 아마 수치심도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김현성은 2회차가 시작된 이후에 모든 것이 리셋되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니, 어쩌면 1회차에서의 고통스러운 삶과, 2회차에서의 여정으로 인해 조금씩 조금씩 자신이 속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녀석은 1회차에서의 일을 애써 바라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지 않을까.

바보 같은 생각이고, 멍청한 생각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런 김현성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내가 김현성의 편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그런 김현성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은 본래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는 데에 가장 특화된 종족이 아니었던가. 자신에게 벌어진 모든 일들까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

“…….”

“…….”

당연히 김현성이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1회차를 직접 목도한 이후가 아닐까. 1회차에서 본인이 저질렀던 일들이 결코 속죄가 되지 않을 일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김현성의 얼굴에는 말 그대로 지독한 자기혐오가 숨겨져 있었다. 아마 저 자기혐오는 자기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후회하는 의미도 들어 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저런 감정들을 모두 견딜 수 있을 정도로 2회차가 소중하다는 발언도 다시 되새김질하게 된다. 녀석이 지금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인지, 그대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사건의 피해자의 입장에서면 녀석의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위선이고 기만으로 보이겠지만, 김현성을 일부 이해하고 있었던 1기영 역시 놈을 전부 다 이해할 수 없을 테지만.

내가 녀석을 이해하지 않으면 누가 녀석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쪽마저 녀석을 저버린다면 누가 녀석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죄송합니다… 흐으윽… 죄송… 죄송합니다….”

이게 녀석을 이 대륙에 붙잡고 있었던 마지막 문장이었다. 녀석이 끝맺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도, 어쩌면 1회차의 이기영의 도움 없이도 노을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알아차렸다는 것도, 지금 이게 녀석과 대화하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걸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김현성이 마침표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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