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534화
조우, 해후(12)
“아마 다시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나는 너를 몇 번이고 회귀자로 선택했을 거야. 현성아.”
저도 모르게 입에서 쓸데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당연히 말을 꺼낸 이후에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1회차의 이기영이 아니라, 2회차의 이기영의 입으로 말을 내뱉었기 때문이었다.
‘시바.’
“…….”
‘시바.’
속마음이 가끔 입으로 튀어나올 뻔한 적은 있었지만 정말로 튀어나온 적은 처음이다. 순간적으로 몸이 딱딱하게 굳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아마 가면이 벗겨진 상태였다면 내 표정을 들켰을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가면이 없었다면 내가 2기영이라는 걸 들켰을 테니 이런 가정이 의미가 없다만 아무튼 간에 저런 말이 갑작스레 내 입에서 튀어나온 것이 당황스럽다.
이게 다….
‘저 새끼가 갑자기 형 형 거리니까 그런 거자너.’
호칭의 변화도 어느 정도는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와 꽂힌다.
그야 별게 아니라면 별게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김현성이 이걸 의도한 것인지, 의도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조금 더 거리감이 가까워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장담하건대 당신이니, 병신이니 뭐니 하면서 불렀다면 이쪽 역시 긴장을 놓고 있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작금의 상황을 살펴봐도 분위기가 조금은 풀어진 것 같지 않은가.
분명 놈이 빵형과 22살의 김현성을 드러내기 전만 해도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휩싸여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긴장감은커녕 사람과 사람이 그간의 감정을 덮어두고 일반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분위기다. 그렇게 많은 일들이 있었던 1회차의 이기영과 김현성이 말이다.
물론 나는 1회차의 이기영이 아니기는 했지만 적어도 녀석을 연기하는 만큼 어느 정도의 선은 지키고 있었다고 본다.
‘아니지. 선을 지키고 있는 건 아닌가?’
아주 약간 김현성 쪽으로 치우쳐져 손을 들어주고 있을지도….
물론 1기영 이 새끼가 김현성을 실제로 봤을 때 도끼부터 꺼내 들어 달려들지, 달려들지 않을지는 슈뢰딩거의 이기영 같은 모양새이기는 했지만 분명히 놈의 상태는 분노가 풍화되어 있던 상태가 아니었던가.
사실 김현성과 직접 이야기를 나눈 이후에는 그 사그라든 불씨가 다시 불이 붙을 가능성이 있을 가능성도 있기야 하겠지.
하지만 놈의 형 발언은 그런 급발진을 막아주는 방어막이 될 가능성이 높을 정도의 훌륭한 한 수였다.
‘이 새끼 사실은 천재 아닐까?’
모든 갈등이 터져 나온 끝 지점에 이르러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처음 만났던, 미약한 호의와 신뢰가 있었던 관계를 다시 불러온 셈이 아닌가.
1기영도 녀석의 페이스에 말려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지금 돼지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녀석을 이곳에 불러오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건 녀석의 시간을 빼앗는 꼴이었고, 괜한 벌집을 들쑤시는 일이 될 가능성도 높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봐도 내 선택은 옳았다.
문제는 지금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이 선택이 무위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것.
“…….”
‘아직 못 깨달았나? 아직 못 알아차린 거 맞지.’
생각은 길었지만 지나간 시간은 찰나다. 지금 곧바로 말을 이어나가면 어색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영웅이라는 건 흔들리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어울리지 않거든.”
‘못 알아차렸지? 그렇다고 이야기해 줘.’
“넌 주저앉지 않는 사람이었어. 아니, 주저앉는다고 해도, 언젠가는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었지. 린델의 김현성, 제국의 백작, 대륙의 영웅, 널 아우르는 호칭들은 많지만 난 그중에서도 영웅이라는 말이 너를 가장 대변해 준다고 생각해. 네 삶은 투쟁이었어. 현성아. 내가 하기에는 웃기는 말이지만 나는 너 같은 사람을 좋아했을지도 몰라. 실제로 알타누스가 이곳에 아직 존재했었고, 그녀가 나를 돕기로 결정했었다면… 나는 너를 회귀자로 선택했을 거야.”
“…….”
“그래. 네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물론 그것보다는 네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는 게 더 중요했지만….”
‘못 알아차렸어.’
몇 번이고 회귀자로 선택했을 거라는 대사를 너무 따뜻하게 내뱉은 것 같아 걱정했지만 아무래도 놈은 현 상황을 이끌어나가고, 1기영과 대화를 나누는 데 온 사력을 다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주 약간의 의심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이후에는 다시금 고개를 끄덕인다.
하기야 놈이 내가 1기영과 옷을 바꿔치기하고 녀석을 대신해 나타났다고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미카엘의 품에 안겨 오열하고 있던 그 1기영이 말이다.
‘오히려 좋아.’
“물론 이유가 그것뿐만은 아닐 거야. 지금 이 자리에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유가 있었겠지만, 사실 그 이유들이 중요하지는 않아. 중요한 건 내 생각이 맞았다는 거겠지. 지금 네가 이 자리에 나와 함께 있는 게 가장 큰 증거야. 넌 네가 다시 한번 더 가혹한 상황과 환경에 처해 있었다면 같은 실수를 반복할 거라고 말했었지만, 장담하건대 난 네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너는 이미 한 번 실수를 저질렀고, 그 실수가 얼마나 네게 큰 상처를 주고, 얼마나 너를 힘들게 했는지 알고 있을 테니까.”
“…….”
“그래, 네가 만약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네가 정말로 완전무결한 인간이었다면, 나는 너를 회귀자로 선택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별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이건 이 선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을 거야. 어땠지?”
“…….”
“처음 네가 회귀했을 때 말이야. 무슨 생각을 했었지?”
“잘 모르겠습니다.”
“뭐?”
“너무나 많은 생각이 들어서 몇 마디로 정리할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지독히도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저 혼란스러웠고, 현재의 제 상황을 받아들이기 바빴던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회귀한 것이라는 걸 깨달은 이후에는 아마….”
“아마?”
“모든 걸 바로잡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았습니다.”
“무엇을?”
“제가 했던 모든 것을 말입니다. 튜토리얼에서의, 파란 길드에서의, 라헬에서의, 린델과 제국 그리고 제가 대륙에서 지내는 동안 일어났던 모든 크고 작은 일들을 바로잡고 싶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저로 인해 비롯된 일들도, 저로 인해 비롯되지 않았던 일들까지도 전부 바로잡고 싶었습니다. 두 번 다시 같은 일들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대륙을 구하겠다는 거창한 목표 같은 것들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
“…….”
‘그렇구나.’
영웅이 품고 있는 생각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하찮아 보일지는 단언하건대 1기영에게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을 것이다.
극단적으로 나나 진 군사, 지혜 누나 같은 사람들에게 두 번째 기회가 주어졌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생각이기도 하다.
어울리지 않는 예이기는 했지만 지혜 누나가 말하지 않았던가. 새로운 세계에 떨어진 직후에 한참을 웃었다고 말이다.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 것처럼 느껴져 그녀는 울고 있는 사람들 뒤에서 한참을 웃었더랬다.
물론 그녀의 이야기를 대입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이들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김현성처럼 이전의 실수를 바로잡고 싶다는 것에 두 번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있을지 몰라도 그것에 집중해 포커스를 맞추는 이들을 찾아보기 힘들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개인의 영달을, 누군가는 자기 자신의 안위를, 누군가는 이성을, 또 누군가는 소중한 사람을, 누군가는 그저 큰 무력과 권력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요령이 없기는 해.’
다시 시험을 치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성적이나 결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답 그 자체에 집중한 것이니 말이다.
다른 문제를 틀릴지 몰라도, 한 번 틀린 문제는 다시 틀리지 않겠다고 다짐한 셈이다.
멍청이 같기도 했고, 모범생 같기도 했지만 1기영 역시 녀석과 같은 학생을 원했던 것이리라. 한 번 틀린 문제는 절대로 틀리지 않을 학생을 말이다.
‘근데 그런 것치고는 같은 실수를 너무 많이 반복하기는 하자너. 나한테만 특히 더 그렇자너. 그놈의 가방이 가장 큰 예자너.’
“미래를 알고 있으니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솔직히 쉽지 않았습니다. 튜토리얼에서 생존자 캠프를 만드는 것부터가 난항이었으니까요. 제게 사람들을 다루는 능력 같은 게 없다는 것은 이미 1회차를 통해 알고 있기는 했었지만,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게 무색하리만치 바보 같은 일들을 많이 저질렀던 것 같았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제한되어 있었고, 제 능력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의문을 느꼈는지 아마 상상도 할 수 없으셨을 겁니다.”
“…….”
“솔직히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제게는 너무 크고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1회차를 오랫동안 살아왔고, 다른 이들보다 정신은 더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했었지만, 전혀 성숙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럴 시간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럴 틈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애초에 성숙하지 못한 인간이기 때문에 성숙해질 수 없었던 겁니다.”
“…….”
“중간에는 몇 번이고 포기할 뻔했습니다. 아니, 실제로 포기했었던 적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게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을 뿐, 다른 실수들을 계속해서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에는 실수가 문제가 아니었던 겁니다. 저라는 사람이 문제였던 겁니다.”
‘자기객관화는 잘 되어 있네.’
“형은 제가 주저앉지 않는 사람이라고 결국에는 다시 일어서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저는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영웅 같은 것은 더욱더 아닙니다. 1회차에서 제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신에 대한 증오와 죽어간 이들과 저의 죄악 때문이었고, 2회차에 제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롯이 기영 씨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저를 일으켜 세운 것이지, 제가 스스로 일어난 적은 없을 겁니다.”
“…….”
“기영 씨가 아니었다면 저는 아마 주저앉은 채로 일어나지 않고 모든 일들을 포기했을 겁니다.”
녀석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기영 씨가 아니었다면 아마 끝까지 성장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무것도 책임지지 못하는 인간이 되었을 게 분명합니다. 물론 저는… 지금도 제가 자랐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떨까요. 지금의 저는 1회차보다는 더 나은 인간이 된 걸까요. 1회 차의 모든 것을 목도한 기영 씨는 지금의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나도 몰라. 시바.’
어쩌면 1기영은 녀석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병신이라고, 염치없는 놈이라 김현성을 비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김현성을 비난할 수 없다.
녀석을 욕할 순 있어도 비난할 수는 없다. 본래 팔은 안쪽으로 굽히게 마련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처구니없지만 녀석에게 동정심마저 느껴진다.
김현성이라는 인간에 대한 순수한 동정심, 놈이 겪어왔던 모든 일들과 고뇌와 죄책감에 대해서 말이다.
1기영이 내 머릿속을 열어보면 도끼로 나를 후려치고 싶어질 수도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그러했다.
그리고, 조금씩 녀석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문득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내가 2회차의 2기영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놈이 내게 자신의 고민과 생각을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김현성에 대해서는 전부 파악하고 있다. 김현성이 하고 있던 생각들은 하는지, 무슨 생각들을 하며 살아가는지 대충은 예상하고 있었다. 극단적으로 이 새끼는 내 손바닥 위에 있다.
사실 새롭지 않은 이야기다.
녀석이 회귀한 직후, 그리고 지금까지 하게 된 짧은 이야기들은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인간은 변한다. 이미 알고 있었던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전하는 이도, 받아들이는 이도 전과는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전까지는 굳이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고, 이미 수신함에 수없이 많이 쌓여 있는 쪽지들이었던지라 구태여 열어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야 우리는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소통하고 있었으니까. 구태여 수신함에 있는 쪽지를 열어보는 것이 무의미한 행동이었으니까.
김현성도 내게 답장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녀석은 계속해서 발신함에 쌓여 있는 편지들을 내가 읽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녀석도 내가 평생이 가도 편지를 읽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1기영의 모습을 빌리고 있는 내게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는 걸지도 모르겠다.
소통하지 않는 것은 김현성이라고 생각했지만 나 또한 소통하고 있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소통 따위는 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수신함을 연 것일지도 모른다.
문득 김현성의 얼굴을 바라본다.
녀석의 한쪽 눈이 다시 빛나고 있었다.
아마 내 눈도 빛나고 있을 것이다.